2021년 회고

Jonas Kim·2021년 12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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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자일 개발 프로세스의 효용성은 엔지니어 사이에서도 논쟁의 주제이다. 다만 IT 업계와 상관없이 대중적으로 유행하는 용어가 하나 있는데 바로 회고 Retrospective이다. 애자일 방법론은 신속한 반복이 본질이다. 그렇기 때문에 회고의 주된 내용은 반복 단위에 대한 성찰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회고가 유행하는 이유는 좀 다른 것 같다. 현대인들은 너무 많이 보고 읽고 또 경험하며 살아간다. 많은 것들이 형상화되지 못한 채 미몽처럼 흩뿌려지곤 한다. 그러니까 회고는 이를 좀 더 보존하려는, 기억과 추억에 관한 행위이다. 이런 이유로 나 역시 올해 2021년을 회고해보려고 한다.


시간과의 전쟁

나는 작년 12월에 회사를 옮겼다. 그러니까 올해 가장 큰 도전 과제는 새 회사에 적응하는 일이었다. 영화 'The Intern'에서 앤 해서웨이가 연기한 줄스는 너무 바빠서 하루에 5시간 미만으로 잠을 자고 오피스 안을 자전거로 횡단하는 쇼핑몰 CEO이다. 영화 상의 과장이겠지만 나 역시 비슷한 난관에 봉착했다.

입사 후 첫 두 달은 온보딩 기간이었다. 한국 회사는 입사 당일에 야근시키는데 여기는 적응 기간을 2개월이나 주네, 땡큐.
...라고 말하고 아마존이 일하는 방식과 문화, 자사 서비스에 관한 엄청난 분량의 자료를 불철주야로 울면서 학습했다.

게다가 외국계 회사는 제반 업무의 대부분을 스스로 처리해야만 한다. 예를 들어, 재직증명서 하나 발급받기 위해서 장문의 가이드를 찾아내 읽은 뒤 인도에 있는 HR 팀에게 티켓을 날려야 한다. 이 모든 게 낯설고 시간 소모적인 일이다. 온보딩이 끝나자 나는 업무와 별개로 3가지 상이한 영역에서 역량을 끌어올리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첫째는 AI/ML과 MLOps, 둘째는 스토리지, 네트워크, DB, 보안 그리고 DevOps와 서버리스. 이렇게 엔지니어링 전반을 아우르는 AWS 서비스. 셋째는 영어였다.

24시간도 모자랐기 때문에 나는 다양한 생산성 향상 기법을 실험해보았다. OKR, GTD, 스크럼과 칸반 등등... 방법론마다 내게 잘 맞는 부분이 있는 한편, 전부 그런 건 아니었다. 다음은 실제로 효과가 있었던 원칙들이다.

  • 하루에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일은 5가지 이하로 해라. (사실 5개도 많다, 3개 정도.)
  • 계획과 전략을 세우는 시간, 구체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시간을 분리해라. 이 두 종류의 시간에서 사용하는 뇌가 다르다.
  • 하루의 계획을 정하고 나면 아웃룩 스케줄을 빈틈없이 채워라. 휴식이 필요하면 그것 또한 일정으로 등록하고 쉬어라.
  • 진도가 잘 안 나가거나 손대기 싫은 일은 구체화가 덜 되었기 때문이다. 어림 법 heuristics으로 규모를 추정하고 여러 단계로 수행할 수 있게 잘게 쪼개라.
  • 과욕으로 새벽잠까지 설쳐가며 일하지 마라. 장기적으로 악수다.

자기 효능감 되찾기

한국 대기업에서는 업무 중점의 99할(오타가 아니다)을 임원 보고에 둔다. 임원 방은 빌딩 가장 높은 층에 위치한다. 텅 빈 복도는 제3제국 알베르트 슈페어가 설계한 총통 관저처럼 길고 반듯하며 위압감을 준다. 임원의 질문 시나리오, 설득에 실패했을 때 따져야 할 경우의 수, 타 임원과의 정치적 역학 관계, 그리고 제일 중요한, 임원의 오늘 기분. 이 모든 걸 염두에 두고 입장한다. 우리가 발견한 비즈니스 인사이트, 대규모 데이터 처리 인프라와 SOTA 모델 개발. 모두 고객 경험 개선이 아닌, 보고서 여백을 채우는 장식으로 기능한다.

문제는 이게 일회성이 아니다. 보고 준비가 일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개인 성과 평가를 좌지우지한다. 그러나 제품과 서비스가 실제로 개선되는 일은 드물다. 이 모든 게 무의미한 부조리극처럼 느껴지면서 나는 점차 자기 효능감을 잃어갔다. 무기력해졌다. 기술만 잘 알고 중간 관리자 일은 못하는 부하직원으로 낙인찍혔다.

지금 직장으로 옮긴 후 나는 엔터프라이즈 고객의 다양한 AI/ML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자, 미화하지는 말자. 어떤 프로젝트 결과물은 썩 성공적이라고 할 수 없다. 어떤 프로젝트는 잘 마무리되었지만 고객이 지속 가능하게 운영할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만든 모델은 지금 이 순간에도 대단지 공장에서, 리테일 물류 센터에서 출력 값을 내뱉고 있다.

중세 신학자들은 '핀 헤드 위에서 천사가 몇 명이나 춤출 수 있을지 How many angels can dance on the head of a pin?'에 대해 갑론을박을 벌였다. 예전 내가 있었던 세계는 그런 곳이었다. 임원 회의는 치열했지만 결과물은 딱히 없었다. 지금은 보고 문서 작성처럼 소모적인 일은 거의 하고 있지 않다. 일과의 대부분을 고객 만족을 위해 사용하고 있다. 자기 효능감을 서서히 되찾았다. 과거 회사가 내게 고과 D를 줬고 현재 회사가 A를 줬다는 말이 아니다. 그런건 상관 없다. 나는 내 가치와 즐거움을 스스로 발견했다.

뛰어난 동료는 최고의 복지

아마존의 16가지 리더십 원칙 중 최고의 인재를 채용하라는 칙령이 나온다. 사실 구글, 넷플릭스 등 실리콘밸리의 인재 채용에 관한 이야기는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처럼 너무 매끈해서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최근에 국내 AI 반도체 스타트업 리벨리온의 박성현 대표 인터뷰를 읽을 일이 있었다. 그는 좋은 엔지니어는 대부분 '변태'라고 말한다. 팀에 신경질적이고 결벽증적인, 디테일에 집착하는 사람이 어느 정도 있어야 훌륭한 제품이 나온다는 얘기다. 좀 더 현실적인 얘기다.

국어에서 '변태'는 성적인 뉘앙스도 있으니 '괴짜' 정도로 바꾸고 싶다. 이런 의미에서 아마존은 '괴짜들이 모여사는 로마 병영' 같다. 외치고 싶다. 야이, 괴짜들아! 디테일에 집착하는, 뛰어난 역량의 엔지니어들이 팔랑크스를 짜서 전진한다. 그러한 인재들을, 그러한 박력과 역동성을 바로 옆에서 보고 배울 수 있어서 2021년은 행복했다.

가족


미국 심리학자 해리 할로는 원숭이 발달 과정을 연구했다. 할로는 원숭이들이 태어나자마자 어미와 떼어놓았다. 새끼들은 우리에 가둬진 채 인형 어미의 젖을 먹었다. 두 종류의 인형이 있었다 하나는 철사로 만들어지고 우유가 나오는 인형, 다른 하나는 나무에 천을 덧댄 것으로 진짜 어미를 닮았지만 우유가 나오지 않는 인형. 새끼들은 천으로 된 엄마를 훨씬 더 좋아했다. 심지어 철사 엄마에게 우유를 빨기 위해 목을 길게 뻗으면서도 천 엄마에게 줄곧 매달렸다. 영양분만큼이나 애착과 유대는 생명체에게 중요한 것이다.

우리 딸이 이제 두 돌이 되어간다. 육아는 육체적으로 힘들지만 정신적으로도 많은 변화를 요한다.
첫째, 자기기만이 줄었다. 예를 들어, 금요일 저녁 게임을 하다가 밤을 새웠다면 싱글인 나는 업무 스트레스 많이 받아서 그랬구나, 합리화하며 친구와의 주말 약속을 취소하고 쉴 것이다. 아이가 있는데 그렇게 밤을 새웠다, 근데 주말에 함께 놀러 나가기로 했다? 나는 자제력 부족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스스스를 책망할 수밖에 없다.
둘째, 부정적 감정 표출을 억제하게 되었다. 성인과의 대등한 관계라면 상대방의 무능함 또는 부당함에 대해 짜증과 분노를 자유롭게 표출할 수 있다. 아이와의 관계에서 그렇게 한다면 나는 그저 철없는 어른이 되는 것이다. 가끔은 같이 드러눕고 싶다.

결국 타의에 의해 나는 정신적으로 좀 더 성숙해졌다. 그렇다면 육아는 고통과 인내뿐인 걸까? 아이는 부모와 애착을 맺고 정서적인 안정을 느낀다. 근데 애착은 상호작용이다. 오래전 원숭이 실험에 대한 이야기를 읽었을 때 나는 원숭이 새끼에게 스스로를 투영했다. 나 역시도 평생 천 엄마를 찾았지만 그건 단지 부모만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다. 유대감은 인간관계 총체에서 온다. 아이가 내게 의존하고 애정을 표현하고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 역시 만족감과 내적 평화를 얻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직하고 일하느라 바빴던 나보다 몇십 배는 더 육아로 고생한 아내에게 한없이 고맙다.

그 외


유튜브와 TV쇼의 발견

나는 콘텐츠를 보고 들으며 소비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다. 라디오나 TV 강연도 잘 듣거나 보지 않는다. 주로 읽는 편이다. 근데 가사 일로 단순 노동을 할 때가 종종 있는데, 그 시간에 유튜브를 듣게 되었다. 근데 얼마나 학식 높고 재밌게 이야기를 풀어내는 분들이 많은지 줄곧 감탄했다. 올타임 베스트는 존잡생각의 김동신 센드버드 대표님이다. 유현준 교수님, 조승연 작가님도 즐겨 들었고 슈카와 부읽남 채널은 마치 노동요처럼 일상을 함께 했다.

직장 일과 육아가 끝나면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잠들기 전 넷플릭스나 왓챠를 15분 정도 시청했다. 그러다가 TV쇼, 다른 말로 미국 드라마의 매력에 빠져들게 되었다. 영화야 평생 좋아했지만 드라마는 시간 소비가 커서 좀체 보지 않았는데, 보다 보니 영화와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 영화는 약 2시간 이내에 서사를 마무리지어야 하기 때문에 등장인물 설정부터 갈등 해소까지 어느 정도 정해진 공식을 따른다. 반면, 드라마는 진행 시간이 훨씬 길기 때문에 내러티브 전개 방식, 그리고 그 너비와 깊이에서 좀 더 자유롭다. 잘 만든 드라마는 다양한 인간 군상 위로 서사와 감정의 덩이를 켜켜이 쌓아나간다. 그러다보면 극 중후반부터 카타르시스와 파토스의 깊이가 영화와 사뭇 다르게 된다. The Wire, Chernobyl, True Detective 모두 최고의 TV쇼였다.

성장세는 언젠가 꺾인다


요즘 청춘의 키워드는 '성장'인 것 같다. 내가 대학생일 때는 '개성'이나 '끼' 같은 소비의 캐치 프레이즈가 그 자리를 차지했었다. 내 친구 승국은 '성장' 말고 '성공'하고 싶은 주니어를 만나고 싶다고 한다. 근데 트렌드와 상관없이 나는 그동안 기쁨과 편안함을 포기하고 성장에 몰두해온 사람이었다. 남들 쉴 때 공부하는 이른바 성장 중독자로서 나 같은 유형의 사람들이 꽤 있다. 근데 40대를 넘어서면 이 성장세가 자연스럽게 하락하는 경우가 많다. 첫째, 신체적, 지적 능력이 감퇴하고 둘째, 가족을 챙기면서 가용 시간이 줄어든다. 내가 생각하는 세 번째 이유는 다음과 같다. 2, 30대의 성장의 근간은 시간 탄력적인 요소인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지적 노동의 숙련도는 보통 시간 들이는 만큼 향상된다. 근데 40대 이상에서의 성장 게임은 시간의 함수가 아닌 경우가 많다.

구글 본사에서 HR 업무를 담당했던 황성현 님은 동아시아 출신 중 실리콘밸리 테크 기업 리더가 나오지 않는 이유를 연구하기 위해 40대 후반~50대 중반의 구글 한중일 직원들을 인터뷰했다. 구글 본사에 올 정도로 일을 잘했고 목표 지향적으로 살았지만 더 올라갈 곳이 없고 목표를 잃어 허무감을 호소하는 직원들이었다. 그들에게 지금까지 왜 그렇게 열심히 살았냐고 물었다. "최고의 회사에 가고 싶었다.", "훌륭한 아들, 남편, 아버지가 되고 싶었다." 등등. 황성현 님은 대부분의 답변에 외적 성장과 타인의 인정 욕구 때문에 노력했음을, 열정과 즐거움 같은 내적 동기가 빠져있음을 지적한다.

나는 작년 회사를 옮기고 나서 굉장히 많이 성장했다고 느낀다. 재밌게도 동 시기에 이 성장세가 곧 꺾이겠구나 하는 예감이 들었다. 왜냐하면 이곳은 붉은 여왕 효과 Red Queen Effect처럼 가만히 있어도 도태되는, 치열한 곳이기 때문이다. 아마 그게 현실일 것이다. 황성현 님의 연구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성장세의 하락이 꼭 불행을 의미하진 않는다. 그저 또 다른 삶의 단계로 옮겨가는 것이다. 미리 준비하고 현명하게 대처하면 된다.

자북이 아닌 진북으로 나아가라


이런 이유로 나는 무얼 할 때 가장 즐거운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프로그래밍 코드가 됐든, 장문의 픽션이 됐든 나는 무언가 콘텐츠를 만들 때 가장 즐겁다. 그러나 동시에 타인에게 인정 못 받을 것이라는 불안, 완성도에 대한 강박의 수준이 높은 성격이어서 그런 활동이 꺼려지거나 어렵게 느껴진다. 그래도 2022년에는 콘텐츠를 만드는 일에 좀 더 시간을 투자할 생각이다.

자북 Magnetric North 과 진북 True North의 차이를 아는가? 자북은 나침반의 바늘이 가리키는 곳이다. 반면 진북은 북극성이 있는 방향이다. 진북의 북극점은 북위 90도 지점으로 북극해의 가운데 있다. 반면 자북점은 캐나다 북부 천연 자력 지대에 위치한다. 이 일대는 자기력이 강하다. 그래서 나침반의 바늘은 늘 이곳을 향한다. 진북점과 자북점은 1,000km가 넘게 떨어져 있다. 그래서 내가 어릴 적 본 서바이벌 가이드는 얘기한다. 북극 근처에서는 나침반에 의존하지 말고 북극성을 보고 나아가야 길을 잃지 않는다고. 생전에 북극 근처를 딱히 갈 일은 없을 것 같지만 마치 다음처럼 조언해주는 것 같다.

"삶의 성장세가 꺾이고 불안과 우울이 엄습해도 낙담하지 말고 저 멀리 뜬 북극성을 바라보고 진북으로 나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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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r. Data Scientist at A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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