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7/3 묵상

만사·2020년 7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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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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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시작할 “성경적 확신”에 대한 해석(?), 묵상(?!)은 모든 포커스가 “나”라는 한 사람을 향한 교훈, 책망, 사랑이다… 나눔을 한다고 해서 누군가에게 권면할 마음도 없고 그럴 위치도 안되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나눔을 함께 하되, 주님께서 마음을 만지신다면 함께 말씀과 기도로 승리하기를 기도한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고후 13:5).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 5:13).

두 말씀에서 요구하는 것은 “참 믿음”이다. 믿음 안에 있는가 늘 자신을 시험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대한 확증을 해야한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지만 우리가 그런 구원 신앙을 소유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구원은 믿는 자에게 주어지지만 참 믿음을 소유했는지는 무엇으로 확인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인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고 확신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역(성육신, 완전한 삶, 속죄의 희생, 부활, 하나님 오른편에 승천하심)을 믿어 구원받는다고 믿는다. 그러나 우리가 거짓 믿음에 현혹되지 않고 구원에 이르렀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자기 자신을 시험하는 것이 필요하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예시로 자기 진단의 필요성에 대하여 생각해본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 사도가 고린도전서 1장에서 말씀한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언변과 지식에 풍족했고, 모든 은사에 아무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큰 축복을 받은 공동체였다. 그러나 몇 가지 심각한 문제들이 있었다. 다툼, 분쟁, 시기, 우월주의, 무질서한 예배, 부활에 대한 불신과 부정. 이러한 사실만 고려해보아도 바울이 엄히 책망할 이유가 충분했던 공동체이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고전 3:1-3).

위 말씀에서 바울 사도는 되도록 가장 강력한 표현을 사용하여 고린도교회를 책망한다. 좋게 말하면 성도들은 음식을 소화하기 힘든 어린아이 같은 그리스도인이라 하였고 나쁘게 말하면 거듭나지 못한 육신에 속한 자, 아직 하나님의 성령을 받지 못한 이방인과 다름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말씀한다.

3장 1-3절 말씀에서 볼 수 있는데,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언변과 지식에 풍족했고, 은사에 부족함이 없던 고린도교회의 경건하지 못한 삶에 대하여 책망과 교훈의 편지를 썼고, 이 편지를 받을 고린도 성도들의 모습에 대한 두가지 가능성을 제시했다.

첫번째, 당시 그리스 문화, 사회의 오류와 같은 것들에 치우쳤다가 책망과 사랑의 훈계를 통해 다시 참된 복음을 쫓는 그리스도인이 될, 현재는 미성숙한 어린아이와 같은 그리스도인일 가능성.
두번째, 아직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일 가능성이다.

첫 번째 가능성은 믿음을 고백한 자들이 아직 성숙하지 못한 채 제멋대로 살아가고 있지만, 하나님의 섭리와 성령의 도우심과 말씀의 적절한 활용(교훈, 책망, 바르게 함, 교육)을 통해 차츰 옳게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가능성은 믿음을 고백한 자들이 아직도 회심하지 않은 상태일 수 있다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는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그 능력은 없고, 입으로는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지만 삶으로는 그분을 부인한다.

물론 옳게 회복 된 참된 그리스도인라고 해서 이 세상에서 온전히 거룩해지는 것은 아니다. 육신은 천국에서 영화롭게 되기까지 완전히 근절되지 않는다. 가장 경건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해도 여전히 죄와의 싸움이 계속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도덕적 실패를 경험하여 다시 회개와 고백을 통해 믿음을 회복해야 할 필요성이 항상 존재한다. 그러나 믿음이 연약하더라도 진지한 태도로 죄에 맞서 싸우며 조금씩 거룩해져가는 참된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속된 삶을 일삼는 거짓 그리스도인은 확연한 차이가 있다.

성경은 우리가 믿음 안에 있는지 우리 자신을 살피고 시험하여 참된 그리스도인인지 확증하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이 명령은 한 가지 중요한 문제를 제기한다.

우리가 지닌 믿음의 진정성을 옳게 평가할 수 있는 권위 있는 기준이 무엇인가? 우리 삶을 시험할 수 있는 확실한 잣대는 무엇인가? 누가 우리를 판단할 수 있고, 우리 상태를 이해하도록 도울 수 있는가?

요한 사도는 우리의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판단을 무조건 신뢰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마음이 인정하거나 단죄하는 것이 그릇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도 우리의 기준으로 우리 자신을 판단하거나 다른 사람들과 우리를 비교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그리스도를 거짓으로 고백하는 속된 사람을 기준으로 삼으면 거짓 확신을 갖게 될 가능성이 높다. 또한 가장 성숙한 그리스도인과 비교하면 자신을 그릇 단죄할 가능성이 높다. 다른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하는 것은 지혜롭지만 그들의 견해만을 구원 확신의 근거로 삼는 것은 옳지 않다. 어떤 이들은 구원을 피상적으로 생각하여 우리에게 그릇된 확신을 심어줄 수도 있다. 또 어떤 이들은 성경의 기준을 넘어서는 증거를 고안하여 스스로 감당할 생각도 없고, 감당할 수도 없는 무거운 짐을 지워 우리를 그릇 단죄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삼아야 할까? 어떤 기준으로 우리가 지닌 믿음의 진정성과 회심의 진실성을 평가할 수 있을까?
우리가 찾는 기준이 성경에 깊이 숨겨져 있어 거의 찾을 수 없거나 오로지 탁월한 지성의 소유자만 이해할 수 있는 신비가 아닌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성경은 그 기준을 구체적으로 분명하게 명시한다. 요한 사도의 첫 번째 서신은 참된 회심의 기준을 명확하고, 간결하며, 온전하게 제시하고 있다.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에서 발견되는 가장 유익하고 탁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요한 사도가 성경을 기록한 목적을 분명하게 밝혔다는 것이다.

요한은 자신을 시험하여 구원 확신의 타당성을 판별할 수 있는 다양한 교리적, 도덕적 기준을 제시했다. 그는 독자들이 막연한 생각이나 종교적인 감정, 단순한 신앙고백이 아닌, 삶을 통해 나타난 기독교의 참된 표징에 근거하여 구원을 확신하길 원했다. 요한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요한일서에 제시된 기준에 비춰보아 성경적인 구원의 확신에 도달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요한은 회심의 수단이 아닌 그 결과를 제시했다. 요한일서에 제시된 증거가 우리 삶에서 현실로 드러나고 있는지를 토대로 구원 확신의 타당성을 판단할 수 있다.

이후부터는 요한일서를 묵상하며, 참된 그리스도인인지 우리 자신을 시험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복종하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한다.

참고 문헌 : <확신 - 폴 워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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