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재에 관해 − 비가시적 기계들의 테크노시학에 관한 반향

chaewonkang·2021년 1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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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lix Maschewski and Anna-Verena Nosthoff

2015년 WEF(World Economic Forum)에서 구글의 전 CEO 에릭 슈미츠는 말했다. "인터넷은 사라질 것입니다.(The internet will disappear.)" 그는 인터넷의 종말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넷(net)'의 무소부재를 강조하려는 것이었다. 슈미츠에 따르면, 엄청나게 많은 IP 주소들과 스마트 센서들로 가득찬 공간들이 너무나도 다양하고 인간과 상호작용하도록 발전해 왔기 때문에, 이러한 전지구적인 연결성이 곧 눈에 띄지 않게 될 것이라고 말하며, "인터넷은 매 순간 당신의 존재와 함께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슈미츠의 비전이 주로 스마트 환경과 사물인터넷에 중심을 맞추고 있는 반면, 화성을 탐구하고 있는 일론 머스크는 더욱 급진적인 형태의 디지털 부재(digital disapprearance)를 구체화하고 있다. 일론 머스크의 스타트업 뉴럴링크는 최근에 대뇌 피질 인터페이스를 통한 마음과 매질, 그리고 기계의 직접적 연결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다. 기술과 직접적인 단락회로를 통해 연결되는 것만이 부족한 인간으로서 인공 지능의 발전을 따라잡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하며, 머스크는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로봇의 애완동물이 되고 말 것이라고 주장한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러한 최근의 일들은 슬라보예 지젝에 의해 명료하게 정리된다. 머스크의 계획은 의식과 현재 사이의, 그리고 내부(internal)과 외부(external)의 '차이에 대한 부재'를 강제한다. 이는 "모호하고 위험한 작업이다." 인간과 기계의 강제된 합치는 중요한 질문들을 건드린다. 과연 누가 새로운 기술-유기적 공간(techno-organic space)을 통제할 것인가? 마지막에는 누가 결정을 내릴 것인가? 오류를 범하는 사람일까, 아니면 데이터 스트리밍을 통해 생존하는 (사람보다) '더 객관적인' 알고리즘일까? 어쩌면 이것은 그들 또는 재능 있는 해커 사이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무엇이 정확하게 인간과 기계 사이의 연결을 고민하는 의식으로서의 자격이 있는지는 여전히 모호한 상태로 남아있다. 이러한 질문들에 아주 간결한 태도로 접근하는 머스크는, 우리는 이미 쉴 새 없이 스마트폰을 이용하는, 그 자체로 사이보그라고 말한다.

어쩌면 그가 틀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사이버네틱스 이론

슈미츠가 주장한 인터넷의 부재는 단지 그 매체 자체의 양면성에 관련된 것 (예를 들어, 인터넷은 정작 인터넷 자신이 렌더링하는 결과 뒤에 숨어서 존재한다는 성질) 때문 만은 아니다. 머스크의 비전처럼, 에릭 슈미츠의 예언은 어떤 종류의 삭제, 그리고 무효화(annulment)를 입증한다. 웹의 부재(사라짐)와 함께, 어디에나 존재하는 무소부재의 기계 장치들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저 너머(beyond)'와, '다른 곳(elsewhere)'또한 사라진다. 만일 모든 것이 모든 것과 통신한다면(if everything is communicating with everything), 인터넷은 그 자체로 피할 수 없는 것이 된다.

Tiqqun은 몇 해 전, 이러한 발전에 대해 설명하면서, "사이버네틱 이론(cybernetic hypothesis)"이라는 특정한 세계관을 주장했다. 사이버네틱한 시각은 인간을 "소통 상황의 반복적인 피드백을 통한 간단한 조정을 통해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일종의 기계로 여기며, 생물학적이고 물리적인, 통합적으로 프로그래밍되거나 다시 프로그래밍 될 수 있는 사회적 행동"의 총체를 전제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Tiqqun은 그들이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가시적 생산물"로 부르는, 사이버네틱 "권력의 현대화"를 기술한다. Tiqqun은 사이버네틱 개념들에 대한 지속적인 확립과, 강제된 컴퓨테이셔널 과정의 형태로 이루어진 이 개념들의 점진적인 구체화를 통해, "자유 실험의 신비로운 쐐깃돌(the mystical keystone of liberal experimentation)"이 이제는 단순한 픽션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한다. 그들은 사람들의 공동선이, 더 이상 아담 스미스가 은유적으로 말한, 다소 초월적인, '힘'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에 근거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컴퓨터 프로세스 안에서, 공동선의 기능은 "정보의 흐름과 결정들에 대한 이성적인 조정"을 통해, 투명하고 유연하게 렌더링 된 기록들과 함께 더욱 더 가시적이고 명료해진다. Tiqqun에 따르면, 결국,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은 사회의 신경계, 그리고 모든 권력의 기원이자 종착지가 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에릭 슈미츠의 사이버네틱 이론에 대한 덜 직접적인, 또는 더욱 직접적인 의존도는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그의 "새로운 디지털 시대"라는 사이버 팜플렛에서, 그는 비물질화된 디지털 시대에 "인간적인 손이 인도하는 것의 중요성"이 증대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연결성(connectivity)의 호황, 대규모로 증가하는 저장된 데이터들, 그리고 문화적으로 인정받는 사람들이 정량화를 위해 하는 노력들, 점수, 순위, 좋아요, 주식 등의 연속적인 매트릭스에 대해, 이 "인도하는 인간 손"의 증대하는 영향력을 언급했다.

디지털 '세계 파괴'

사회적 프로세스와 디지털 에피스테메의 총체를 전환하려는, 그리고 구식 기관들의 뒷방 정신(the back-room-mentality)에 빛을 비추려는 에릭 슈미츠의 비전은 주로 사회 정치적 결과들을 나타낸다. 이것은 결국 필립 하워드가 최근에 "마지막 상호연결성"(베스 노벡은 이를 "스마트 거버넌스"라고 했고, 파락 카나는 "직접 기술주의"라 했다.)이라 일컫은 결과를 이끌어 낼 것이다. 이 모든, 기술적으로 업그레이드된 개념들 - 전문가들로 정치인들을 대체하겠다는 희망이나, 알고리즘 법규에 의한 공공 담화, 증거에 기반한 데이터 시스템 또는 유연한 테크노주의의 질서에 따른 의회 정치 - 들은, ""정치의 종말"에 대한 정치학(politics of 'the end of politics')"에 이를 때 까지, 정치적 영역의 투명성에 대한 사이버네틱 프로그램이 지속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이러한 측면에서, 디지털 기계들은 널리 퍼져있는 효과를 보인다: 기계들은 문제들을 흡수하고, 따라서 마틴 벌카르트가 "세계 파괴"라고 칭한 것, 즉 어떤 물체가 디지털화 되든지와 상관없이, 자신의 고유한 퀄리티를 박탈당해야 하는 결과로 이끈다. 개별적 존재들은 디지털 복제화 프로세스를 통해 그것만의 불변하는 특이점들을 잃어버린다. 가장 최신의 것이 실체를 뒤덮는다. 피복처럼, 혹은 그림자처럼, 마침내 그 완강한 불충분함으로부터 해방되어 새로운 자유를 설계한다. 결국, 거의 시적인 "상징적 탈구조화의 순간"은 프로그래밍 그 자체의 성질이 되는 것 처럼 보인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존엄성을 경험하도록 하며, 가상의 경계를 확장하면서 인식하게 되는 판타스틱의 세계에, 즉 "두번 째 세계(second world)"에 더 가까이 안내한다. 아직 이러한 디지털 유혹과 자유에 대한 약속들은 모호한 영역에 의존하고 있다. 디지털에 관한 질문들의 경우, 모든 안정성이 파괴적인 방식으로 기관을 액화시키면서, 대체 가능하다는 감각을 제공한다. 그래서, 균질화 또는 평준화(flattening) 같은, 아주 본질적인 무관심을 초래한다. 결국, 프로그래밍의 디지털 로직은 모든 것을 1과 0 사이의 이진법적인 놀이로 귀결해 버리고 만다.

(비)가시성의 체제

인터넷의, 바깥의, 정치학에 관한, 부재에 대한 수많은 복잡한 프로세스들은 기본적인 패러독스에 근간을 둔다. 아주 철두철미하게 투명성을 요구하는 디지털 기계들은, 사실 그들 자신에 있어서는 엄청나게 불투명하다. 모든 것을 관망하는 기계들의 센서들은 사회와 사회의 객체들을 샅샅이 훑어보는 반면, 그들 자신은 대체로 이해될 수 없고, 파악하기 어려우며, 복잡하고, 우리에게 엄청나게 모호한 영역에 속해 있다. (특히 인공지능은 개발자들에게조차 파악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매체 철학자 웬디 천이 설명한 대로, 디지털 기계들은 "무시무시한 효과들을 발생시키는, 우리가 보이지 않는다고 믿는 모든 것"에 대한 메타포가 된다.

이 모호한 광학적 관계에서 알렉산더 갤러웨이는 특정 형태의 어둠인 "다크니스(darkness)"를 강조한다. 그는 이러한 모호성을 "블랙 박스(black box)"가 가진 로직-입력(input)과 출력(output)을 화면에 렌더링하지만, 내재적인 처리 기능들은 가려져 있는-이 존재하는, 사이버네틱 프로그래밍의 가능성이 가진 조건으로 묘사한다. 이러한 조건은 근대성에 내재된 성질이다. 사실 이러한 역사는 라이프니치의 모나드, 아담 스미스가 언급한 보이지 않는 손, 맑스가 정의한 상품(commodity)의 개념까지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현대의 사이버네틱 사회를 컨트롤하는 이러한 "어둠(blackness)"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선호들을 형성한다. 누군가 프랭스 파스칼을 따른다면, 이러한 사이버네틱 어둠은, 허황된 비밀 서비스와 잘 숨겨진 페이스북 피드 혹은 구글 검색 알고리즘에 대한 그림자 은행들로부터, '알 수 없는 알 수 없는 것(unknown unknowns)'과 같은 관용적인 표현에 이르기까지, "블랙 박스 사회(Black Box Society)"를 창조해 왔을 것이다. 이러한 블랙 박스 소사이어티는 총체적으로 권력의 새로운 관계를 창조한다.

사이버네틱 감시 자본주의를 작동하게 하는 공개 계정들, 일반화된 데이터피케이션, 네트워크 세대에 대한 추구 등은 선험적 불투명성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 즉, 숨겨진 소스 코드이다. 이를 통해, 가시성의 정치적 관계들을 기술적으로 최적화하는 것을 가속화하는 디지털 세대는 적어도 두 가지의 대단히 중요한 경향들을 갖게 된다. 첫 째로,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의 자기 참조 변형인, 수량화 된 자아와 함께, 효율성과 상호 평가의 서비스 영역에서 상호 가시성에 대한 비계층적인 모델 확립을 통해 얻어지는 "민주화된 판옵티즘(democratized panoptism)"이다. 두번 째는, 이러한 새로운 비가시성을 전제하는 총체적인 투명성, 즉 "블랙박스화(black boxization)"이다. 소셜 네트워크에 의해 프로파일링된 가시성은 픽셀화된 평면 미학의 모호한 기계를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

결국, 이러한 모델들에는 검은 백조 이상의 것이 존재함을, 국가 기관에는 다양한 국가 기밀들과 모든 종류의 다른 불확실성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가정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자주 어둠 속에서 조심스럽게 더 많은 데이터, 투명성을 요청하고, 그리고 불빛을 요구하게 된다. 그러나 이 각각의 광선들이 그림자 또한 만들어 낸다는 사실은 자주 잊혀진다. 갈릴레이의 망원경부터 스마트폰까지, 더 많은 가시성을 약속하는 모든 매체들은, 보이지 않는 것의 어두운 배경으로부터 나타나, 보이는 것의 표현에 깊이 침입한다. 푸코주의자들의 '덮은 것, 그리고 벗겨진 것(coverings and un-coverings)'의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투명성의 방식이 사회의 육체에 어떻게 더 깊이 스며들었는지, 어떻게 사회의 사람들에게 정보를 제공하는지, 어떻게 절대적인 사이버네틱 피드백 논리를 포함하여 디지털화를 조장하는 이 소용돌이를 사회에 주입시켜 왔는지 알 수 있다.

모호함과 투명함, 두 관점 모두 기능면에서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개념과 상호 의존성을 통해 권력의 사회적 체계를 정의하는 것이 꼭 필요해 보인다. 만약 권력이, 푸코주의자들처럼, 행동 가능하고 실제적이고, 미래 또는 현재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행동이라면, 그런 다음 새로운 요원들과 기관들은 자신의 권력 영역을 넓혀 투명성의 맑은 가정을 추구할 것이다.
이것이 전 독일 법무부 장관 Maas가 의도 한 것과 같은 국가적 예외가 소용이없는 이유이다. 하나의 일화가 된 슈미트의 자기 비난적 명령은,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은 무언가가 있다면, 애초에 그렇게해서는 안된다"는 거의 종교적 지위 뿐 아니라, 우리 시대의 투명성의 가치에 더하여 확실히 전체 주의적 특성을 수반하는 (비)가시성의 의심스러운 체제이기도 하다.

새로운 무기들

Dieter Mersch는 새로운 (비)가시성과 "테크노로지컬의 축전"에 직면하여 다양한 형태의 무력감을 인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Tiqqun은 새로운 무기를 찾을 것을 제안한다. 그들의 관심은 "피드백 루프가 발생될 때 자체적으로 부과되며, 사이버네틱 장치의 협동에 의한 행동적 차이를 기록하는 데 비용이 많이 드는 배경적 간섭"을 확장하는 것이다. 투명성과 불투명도의 이분법을 초월하는 또 다른 너머의, 알 수 없는 것의 불확정성만이 일반화된 실종 과정의 돌파구일 수 있으며, Tiqqun에 따르면, 불투명한 형태 만이 알려진 모든 지각 좌표를 부술 수 있다. 그것은 무엇이 보이는지, 무엇이 보이지 않는지, 무엇이 정보이고 무엇이 사건인지를 구별 할 수 없게 만든다. 이것이 사건이 발생할 가능성에 대한 조건 중 하나를 나타내는 이유이다. 안개는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Fog makes revolt possible).

그러나 누군가가 인터넷의 외부 편재를 클라우드화 하고(슈미츠), 동시 피하 설치의 감각을 흐리게 할 수 있는지(머스크)의 여부, 내부화 된 피드백 루프가 어떻게 중단 될 수 있는지의 여부는 여전히 의심스럽다. 아마도 첫 번째 단계는 네트워크, 알고리즘 및 디지털 기술이 그 자체로 혁명적이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들이 스스로 해방적인 잠재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고, 단지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 받아들여질 때에 훨씬 더 잘 이해 될 것이다. 우리가 그들을 신자유주의적인 오토파일럿 모드에 두면, 그들은 실제로 세상을 바꿀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없는 세상으로 향할 것이다.(If we leave them in their neoliberal autopilot-mode, they indeed do change the world - but toward a world without us.) 보드리야르가 말한, "고양이의 자기애적인 희미한 미소"라는 유령 만이 남아 떠돌 것이다.

참고할만한 내용들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 이론의 검토와 사회과학에의 적용가능성
루만의 커뮤니케이션, 사회시스템 이론
The Warehouse Project. http://warehouse.industries/en/entry/malinowskis-ki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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