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완성의 삶 / 존 메이

chaewonkang·2020년 9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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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 12일에 쓴 글을 이전합니다.)

퐁피두 미술관에 위치한 BPI (Bibliothèque publique d'information) 에서 자주 공부를 하곤 한다. 한달 쯤 전에 영어로 된 책이 별로 없는 이 도서관에서 흥미로운 제목을 하나 발견했는데, Ethics or the Urban: The City and the Spaces of the Political이라는 책이다. 하버드의 건축대학원(Harvard Graduate School of Design)의 Moshen Mostafavi가 엮은 책으로, 도시와 공간의 정치적 의미와 시민들의 역할에 대한 글들을 수록해 두었다. BPI에는 도서 대여가 불가능해서 꼼꼼하게 읽어볼 수가 없었고, 아마존에서 구매해 킨들로 읽으려 했으나 ebook이 없어서 실패했다. (심지어 비슷한 논조의 메타해븐 책도 찾았는데, 하버드에서 발행한 책임에도 불구하고 전자책 지원이 안 돼서 아쉬웠다.)

여튼 이 책을 서치하다가 하버드 디자인 매거진(Harvard Design Magazine)을 알게 되었다. 요 근래 읽을만한 잡지를 찾던 중이었는데, Yvon Lambert와 Pompidou Librairie에 구비되어 있다는 정보를 알고 냉큼 구입하기로 마음 먹었다. 여느때처럼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1층에 내려가 책을 사면서 직원에게 전월호는 없냐고 하니 이번 달에 처음 입고했다는 답변을 들었다.

건축에 대한 글이 대부분이지만, 디자인 전반을 아우르는 다양한 관점에서 쓰여진 텍스트가 많아 좋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들었던 글 하나를 읽어 본다.

원문 링크는 여기.

자동완성의 삶

오늘날 현대 기술 시스템의 일상적인 깊이를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분석적 부조리와 친해져야 한다. 말하자면, 마치 생생한 경험들에서 생각과 행동이 분리할 수 있는 영역에 속하기라도 한 것처럼 기술적 삶을 정신과 물질 사이에서 상상적으로 구분하는 것이 우리의 오래된 오류 중 하나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러한 구분을 수용해야 한다. 오늘날의 기술적 태도의 동기와 목적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일시적으로만 그렇게 한다(그 구분을 받아들인다). 특히 전기 기술자, 컴퓨터 공학자, 인간공학자 등 사용자와 인터페이스 사이에서 "프로그램을 실행한다"는 단일한 목적을 가진 모든 시스템 디자이너들의 의식을 고려할 때 이러한 양보는 필수적이다.

이러한 사고방식 안에서 너무나 많은 기술적 활동들이 생각을 자동화하기 위한 합의된 시도로서 등장한다. 즉 산업적 자동화의 오랜 역사를 육체 노동을 기계화하기 위한 일반화된 노력들로 이해할 수 있다면 (20세기 중반 무렵 포드주의의 테일러 공장들을 생각해 보라), 오늘날 우리는 정신 노동을 신호화하기 위한 균일하게 일치된 시도들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자동화는 결코 인간으로부터 기계에게 노동을 전가하는 단순한 문제인 적이 없었다. 자동화는 자연적이고 기계적인 영역에 동시에 속해 있는 대신 디자인에 의해 두 영역의 경계를 지우면서, 유기적이지도 않고 기계적이지도 않은 과정 속에서 의식의 혼란과 몸짓의 습관들을 결부시켜 왔다. 1934년 초, 루이스 멈포드는 "우리는 유기체가 기계를 지배하기 시작한 기술 발전의 시대에 도달했다"고 쓸 수 있었다. 그는 그러한 시대를 두고 "원기술적(ecotechnic)이고 구기술적(paleotechnic)인 위대한 발명들에 필수적이었던 것처럼, 우리는 유기체를 단순화하는 대신 유기체를 더욱 지능적으로 기계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기계를 복잡화하기 시작했고, 이는 기계를 더 유기체적으로, 결국 더 효과적으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라고 썼다.

그래서 지금, 우리의 모든 살아있는 경험을 개별적이고 측정 가능하며 계산할 수 있는 전자 신호로 변환하고자 하는 이상을 가진 신호화 시대에, 자동화는 인지로부터 감춰지는 과정에서 그것의 크기와 속도로 인해 기하학적이고 전자적인, 더욱 얄팍한 영역으로, 위상학적이고 전자적인 영역으로 옮겨간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이상을 "기계 학습(machine learning)", "인공지능(artigicial intelligence)", 혹은 "디지털 혁명(digital revolution)"으로 부르지만, 이들의 원리는 모두 기본적으로 살아있는 정신 상태들을 자동화된 계산 과정으로 치환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 반하여, '자동완성' 이라는 이름으로 지금 어디에나 존재하며 우리의 디지털 삶 전반에 걸쳐 뻗어 있는 알고리즘 기능들의 집합을 생각해 보라. (자동 채우기(autofill), 자동 작성(autotype), 자동 수정(autocorrect), 자동 대치(autoreplace) 등.). 컴퓨테이셔널 인터페이스를 사용하는 데에 있어 어려움을 가진 사람을 보조하기 위한 시도에서 출발한 이 기능들은 "인간과 컴퓨터의 상호 작용을 촉진한다"는 미명 아래-이를테면 목록이나 방향, 구입, 금전적 정보, 심미적이나 일상적 선택들, 그리고 최종적으로 단어 자체까지 아우르면서-반복적이지 않은 정신 활동에서 가장 처음 일어난 일과 가장 최근에 일어난 일을 가장 쉽게 기억한다는 심리학적 이론에 과도하게 의존하곤 한다.

디자인 또한 그 자체의 자동완성 형태를 가지고 있다. 과연 우리가 1982년 오토캐드에서 상업적으로 발행된 "복사(Copy)"와 "정렬(Array)" 명령이, 건축적인 추론에 의거하여,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파열을 구성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명령들이 엄청나게 힘든, 즉 시간이 엄청나게 많이 드는 orthographic 행위들의 전체적인 시리즈 중 하나로 건축적 사고를 자동화하기 위한 알고리즘 로직에 포함되었던 것일까? 이러한 균열에 대해 숙고해보는 것은 대체된 orthographic 기술보다 컴퓨테이션이 덜 신중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사고하는 과정은 매우 상이한 각각의 상황들 안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인정하기 위해서이다.

만약 전통 매체 (직교 매체)의 노동 시간이, 현재가 이해되고 경험되는 맥락에서, 혹은 현재를 통해 살아 있는 삶과 그것을 표현하는 것 사이에서 역사적 기록과 의식을 모두 생산하면서 어떠한 지연을 만들었다면, 전자 매체는 그러한 일시적 분리를 없앤다. 이러한 명백한 삭제는 시간과 실제 삶 사이의 평형을 주장하는 "실시간(realtime)" 이론의 기저에 깔려 있다. 그러나 엄밀하게 기술적인 견지에서는 그 반대의 것이 발생한다. 표면상으로 나타나는 '삭제'는 실은 현재와 과거 사이의 지연이 육안으로 인지할 수 있는 한계 아래에서 움직이는 것과, 전기적 어딘가로 재확립되는 것의 이동과 강화이며, 따라서 삶의 시간은 새로 구성된다. 이러한 기계적 재구성은, 디자인 필드의 내부적인 업무 방식 뿐만 아니라 이러한 실행들이 의미있게 개입하고자 하는 더 방대한 문화적 상황들을 극단적으로 대체하면서 극적인 암시를 가져왔다.

역사적으로, 자동화는 그것이 일단 착수되었을 때, 삶의 새로이 자동화된 현실들을 다룰 수 있는 개념들을 생산하며 노동의 보완적인 정치와 함께 발전해 왔다. 기계 산업화가 가장 고도화되었던 시기에 산업화 이전의 수공예 기술들이 분업 노동 논리로 대체된 현상을 정의하기 위해, 탈숙련화(deskilling)에 대한 개념이 등장했다. 베르나르 스티글러가 "기술은 기억을 돕지 않는다. 기술은 기억 그 자체이다."라고 말했듯, 삶의 기술적 차원이 기억 그 자체와 함께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것이 새로운 경험에 미칠 잠재적인 영향과 그것의 불확실한 정치적 결과들을 위해, 정신의 탈숙련화에 대한 의미를 숙고해야 할 것이다.

언젠가 니체가 쓴 "행복도, 평온도, 희망도, 가치도, 존재도 없을 것이다"라는 말을 잊어버린 것은 또 어떠한가? 아크릴처럼 철저히 두껍게 층화되고 용해된 채로, 컴퓨테이셔널 자동기억술은 그들 스스로를 살아 있는 삶 안으로 밀어넣고 있다. 정신 노동에 대한 새로운 정치학은 하루빨리 다음의 핵심적인 질문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가 어떻게 기억하는지, 혹은 어떻게 잊어버리는지에 관해 여전히 알고 있는지가 아닌,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기술 행위 시스템이 그 둘 중 어느것이라도 필요로 하고 있는지에 관하여.

기사 끝. 이 글을 읽고, 자동화 기술이 순식간에 대체하는 수 많은 인지에서 행동으로 이어지는 프로세스들을 생각했다. 파리에 오기 전, 2018년이 거의 다 갈 무렵에 썼던 일기가 생각났다.

얼마 전에 택시 파업했을 때나 KT에 화재났을 때, 집 근처에 수도관 터져서 사람이 죽었을 때도 느낀 거지만, 시대와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비가시적인 장치들이 불에 타거나 물에 휩쓸려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거나 지하의 것들이 땅 위로 유출되는 디스토픽한 순간들의 인상과 기억을 잘 묘사해두어야겠다. 움직이는 것들은 점점 콘크리트 사이사이나 땅 속으로 숨을 것이고 내가 감지할 수 있는 것들의 영역도 좁아질 것이다. (2018.12.26)

모바일 기기의 휴대성과 생김새는 참 간소하여 그것의 처리 효율과 인간의 인지-수행 능력간의 간극을, 인간 스스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렇게 믿고 싶은 욕망과 현실의 괴리 때문에 자신이 기계를 통제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계속 사진 글 영상 등의 미디어 컨텐츠를 소비하지만, 맥락 없이 인지하게 되는 정보들은 모두 순식간에 휘발되고 그 자리에는 개인의 인상만 남는다. 그 지점을 경계해야 한다. 예전에 누군가가 추천해 주었던 <전문가와 강적들> 이라는 책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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