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살 대학교 입학해 29살 개발자가 된 나의 회고

Sooyoung Moon·2021년 12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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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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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 쓰러졌다.

애리조나의 투싼 어느 추운 겨울날이었다. 투싼에서 살게 되기 전까지는 애리조나는 사막 지역이라 알고 있었기에 더워서 쪄 죽으면 쪄 죽었지 밤에 덜덜 떨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내가 살던 아파트는 웃풍이 심했고 난방이 잘 안 되어 추운 겨울밤에는 이불과 담요를 세 겹씩 덮어야 했고 수면 양말은 물론 집에서도 겉옷을 입고 있는 것은 거의 필수였다. 지역 특성상 일교차가 굉장히 커 겨울 낮은 따뜻하지만, 밤에는 정말 한기가 느껴졌다. 유난히 춥던 어느 날 내가 사둔 Honeywell 히터마저 고장이 나는 바람에 덜덜 떨면서 잔 적이 있다. 이른 아침 일어나자마자 뜨거운 물로 샤워를 했는데 너무 춥고 허기진 상태에서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해서 몸이 놀랐는지 욕조에서 핑하고 머리가 돌더니 그대로 쓰러졌다. 그렇게 좀 지나서 억지로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겨우 욕조를 나왔는데 나와서 또 어질어질하더니 또 쓰러졌다. 이번에는 금방 정신을 차려 겨우 옷가지를 챙겨 방에 들어왔는데 방에 들어오자마자 또 힘을 차리지 못하고 쓰러져 한동안 그렇게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렇게 세 번 쓰러졌다. 쓰러져본 경험도 처음이거니와 하루에 세 번이나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스스로도 살짝 공포스러웠다. 한국에 계신 부모님에게는 괜한 걱정을 끼쳐드리기 싫어서 비밀로 했다. 한국 토박이인 나는 어쩌다 따뜻한 한국 집을 떠나와 이 고생을 하게 됐는가. (심지어 영어도 잘 못 하면서 무슨 배짱으로!)

나 홀로 미국살이를 시작하게 된 것은 배움과 새로운 경험에 대한 욕구로부터 비롯되었다. 한국에서 내가 맡았던 일은 실험실에서 초파리를 번식시키고 관리하고 초파리 뉴런을 연구하는 것이었다. 뇌 과학에 관심이 많았기에 나름의 사명감을 가지고 임했지만 사실 뇌 과학 그 자체보다는 뇌 과학과 엔지니어링을 합친 무언가에 늘 꿈을 가지고 있었다. 무엇부터 공부해야 될지 모르겠지만 막연히 프로그래밍 공부부터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 일찍 아무도 없는 연구실에 출근해 선배님들이 출근하시기 전까지는 몰래 파이썬을 공부했다. 그런데 웬걸. 초파리 밥 갈아주고 교배시키는 것보다 까만 화면에 하얀색 글씨 툭탁툭탁 치는 게 더 재밌었다. 그렇게 시작되었다. 나는 다니던 대학원을 아예 중퇴하기로 했다. 서울대학교 대학원에 처음 입학했을 때 부모님이 정말 좋아하셨던 터라 학교를 그만둔다고 말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아버지는 진심으로 새 출발을 응원해주셨고 오히려 중퇴하는 것을 장려해주셨다. 아버지 덕에 조금은 마음의 짐을 덜고 새로운 것을 공부하는 것에 전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독학도 머지않아 장벽에 부딪혔다. 각종 유튜브를 보고 스터디에 참여하고 논문을 봤지만 공부하면 할수록 기본기에 대한 갈증이 더 심해졌다. 결국, 대학교로 돌아가 수업을 듣기로 결심했다. 학교를 알아보던 중, 마침 미국에는 이미 4년제를 졸업한 학부생이 기존 전공과는 아예 다른 전공으로 학사 편입을 할 수 있는 second degree 제도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미국의 모든 대학교가 그러진 않았고 소수의 학교에 second degree 제도가 있었다. 컴퓨터공학과로 나를 받아줄 수 있는 대학교를 리스트업하고 그 중 상위권 대학을 추려 지원했다. 그리고 운 좋게 가장 가고 싶었던 애리조나 대학교로부터 합격 통보를 받았다.

20대 중반, 친구들은 이제 취업해서 돈 벌고 홀로서기를 시작했는데 나는 다시 대학생으로 돌아가서 아예 새로운 전공으로 시작하다니 만감이 교차했다. 설렘보다는 두려움이 더 컸고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과 감사한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학교가 시골 같은 동네여서 차 없이는 생활하기 힘든 동네였지만 더는 부모님에게 손을 벌리기 싫어 최대한 학교 근처에 집을 구해 밖을 안 나가는 쪽을 택했다. 용돈은 안 받을 수 없는 상황이라 받기는 했지만, 처음에 너무 빡세게 책정해서 늘 돈이 부족했다. 그래도 스스로 자처한 나의 궁핍한 유학 생활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늦은 나이에 영어 공부도 잘 안 되어 있는 채로 미국에 와서 언어 장벽으로 힘든 게 더 컸다. 그래도 어떻게든 극복해보려고 한인 동아리는 일부러 피하고 외국인 친구들과 소통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더 노력했던 것 같다. 입학하자마자 개인 프로젝트 쇼케이스에 나가서 포스터 발표를 했는데 교수님들과 친구들 앞에서 딥러닝에 대해 손짓 발짓 해가며 설명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말도 잘 안 통하고 스스로 정말 망했다고 생각했는데 나의 노력이 가상했는지 투표에서 높은 표를 받아 2등을 차지했다. 작은 교내 대회였지만 나로서는 굉장히 의미 있는 이벤트가 되었다. 별거 아닌 프로젝트에 어눌한 영어 실력이기에 두려웠지만 그래도 눈 딱감고 나대보는 경험은 뭐가 됐든 얻는 것이 있다. 당시엔 부끄러울지라도 거기서 친구를 얻을 수 있고 운이 좋으면 이력서에도 한 줄 쓸 수 있다. 완벽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일단 해봐야 한다. 내가 만약 조금 더 영어가 유창할 때를, 조금 더 근사한 프로젝트가 있을 때를 기다렸다면 아직까지 아무 기회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 그 후로도 학교에서 개최되는 행사는 거의 빠짐없이 참여하고 수업 외 프로젝트를 끊임없이 하면서 나의 학교생활이 흘러갔다.

입학한 지 2년 반이 지난 2021년 6월, 어찌어찌 코로나와 함께 성공리에(?) 졸업을 했다! 사실 2019년 처음 입학했을 때, 어드바이저가 나에게 졸업하는 데까지는 다른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3~4년이 걸릴 것이라고 얘기했다. 나는 그래도 second degree 학사편입이라 그 정도까지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어드바이저의 말을 듣고 낙담했다. 등록금도 만만치 않고 내 나이도 많은데 4년 후에 졸업이라니 그럼 서른 살에 학부 졸업을 하는 꼴이다. 그럴 순 없어서 조금 더 전공을 부지런히 듣고 계절학기도 들었더니 생각보다 좀 더 일찍 졸업하게 되었다. 돌이켜보니 2년 반 만에 졸업하는 게 그렇게 어렵진 않은 것 같은데 어드바이저가 괜히 겁을 줬나 싶기도 하다. 아무튼! 코로나와 함께 나는 한국에 왔고 마지막 학기는 한국에서의 취업 준비와 학업을 병행하느라 정말 정신없었다. 내 수준으로 어느 회사에 어떤 직무로 갈 수 있을지도 감이 안 와서 가고 싶었던 스타트업부터 대기업 그리고 처음 들어보는 회사까지 일단 많이 지원했다. 미국 대학교 원서 지원은 하나에 10만 원씩도 하지만 회사 지원은 0원이 든다. 어디든 일단 써볼 수 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됐나 싶을 정도로 일정이 빡빡했다. 하루에 면접을 다섯 군데씩 보는 날은 점심은 거의 거르다시피 봐야 했고 대면 면접도 많아 서울 경기를 이곳 저곳 다니며 문길동이 따로 없었다. 답을 잘 모르는 면접 질문들도 많아 진땀을 빼는 일도 많다 보니 에너지 소모가 보통이 아니었다. 면접을 보다 보니 아직 내가 정말 많이 부족하구나 싶었다. 답을 제대로 못 하는 것들은 그다음 면접에서는 제대로 말할 수 있도록 다시 공부하고 채워가는 식으로 반복했다.

결과적으로 정말 많이 떨어졌고 동시에 정말 많이 붙었다. 가고 싶었던 스타트업부터 대기업까지 합격 메일을 받았고 결국 제일 끌리는 곳에 선택해서 갈 수 있게 되었다. (비전공자로 출발해 원하는 기업의 개발자로 커리어를 시작하기까지에 관련해서는 다음에 어떤 팁이 될 수 있을 만한 것이 있다면 공유하는 글을 써볼까 한다). 결국, 2021년 6월 졸업과 동시에 업스테이지에 합류하게 되었다. 업스테이지에 오기로 하기 전까지 나는 ‘어떤 선택을 해도 내가 선택하지 않은 다른 기회들에 대해 후회하겠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업스테이지에 온 후로 단 한 번도 선택에 후회하거나 의심이 들었던 적이 없었다. 오히려 친구들이 회사는 어떠냐고 물어보면 정말 다니면 다닐수록 더 오래 있고 싶어지는 회사라고 말한다. 회사가 스타트업인 만큼 회사의 비즈니스적인 성장도 중요하지만 나 스스로는 아직 신입이기에 개인 성장도 중요한데 업스테이지에서는 개인 성장을 장려하는 문화에 정말 진심이라는 것이 느껴진다. (업스에 오면 좋은 점도 나중에 써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거의 피플팀..ㅎㅎ)

지난 몇 년간 정말 커리어 적 격변이 있었다. 모든 일에는 나의 의지도 있었지만, 항상 주변 사람들의 도움도 컸기에 정말 감사하다. 이제는 개발자로서 내가 하는 일에 좀 더 프로페셔널함을 갖출 수 있으면 좋겠고 프로덕에 대해 비즈니스적인 관점으로 비판적 생각도 해볼 수 있는 개발자로 거듭날 수 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2022년에는 주변 사람들이 모두 건강하고 또 건강한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건강이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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