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트캠프 두 달

dongha1992·2020년 12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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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외주를 받아서 종종 글을 쓰는 플랫폼이 있다. 대학생, 대학원생, 회사원, 고등학생을 둔 아주머니까지 다양한 고객을 상대하면 여러 글을 쓴다. 보통 나를 부르는 호칭은 플랫폼에 적혀있는 아이디거나 이력에 책을 썼다는 이유로 '작가님'으로 불린다. 아직도 '작가'라는 말이 어색하다. 아마 계속 어색할 것 같다. 그러던 중 '선생님'이라면서 메시지를 보낸 고객이 있었다. 선생님이라니. 난생처음 듣는 호칭에 나도 모르게 네 선생님 이라고 답장을 보냈다. 물결 표시와 온점을 자유자재로 사용하시는 것으로 보아 연세가 있어 보였다. 선생님으로 시작한 메시지는 한참 뒤에야 '혹시 시도 잘 씁니까'라는 두 번째 메시지로 이어졌다. 자녀의 입학을 위해 독후감을 맡기는 건 아닌 것 같고 으레 묻는 '어떤 용도로 사용할 것이냐'고 물었다. 한참을 지웠다 썼다 했는지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난 것치고 간단한 답장이 돌아왔다. '사랑을 전달하고 싶어서요'

나이도, 이름도 모를 어떤 고객의 사랑의 세레나데를 수정해야 하는 임무였다. 그가 쓴 시를 수정해달라며 원문을 보내왔다. 트로트 멜로디와 잘 어울릴 것 같은 구수하고 정답고 끈적한 연과 행의 좌충우돌 사이에서 어떤 것을 어떻게 고쳐야 할지 감이 오질 않았다.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며, 사랑이 느껴질 수 있게 고쳐달라는 것이 그의 요청이었다.

별안간 끈적한 사랑 노래를 써야 하는 나는 일단 걸었다. 보문천을 걸으며 오가는 커플들을 보며 쥐어짜듯 한 글자 한 글자 써 내렸다. 늘 그렇듯이 벚꽃이 들어갔고 의인화와 비유, 직유 등등 내가 아는 모든 잡기술을 사용해 간신히 시를 완성했다. 처음엔 어설펐는데 보다 보니 꽤나 그럴듯했다. 젠체를 한 이유는 나를 선생님이라 부른 까닭도 있을 것이다. 선생님이라 불렸으니 선생님인 것처럼 괄호에 한자 정도는 넣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만만하게 보냈지만 그의 반응이 영 시원찮았다. 표현이 까무잡잡하다는 것이다. 까무잡잡한 표현 말고 좀 더 사랑스러운 느낌을 원한다는 것이다. 까무잡잡과 사랑스러움이 어떤 식으로 상관관계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공들여 쓴 시를 매몰차게 거절한 것에 대한 원인 모를 허무함이 밀려왔다. 꽤 그럴듯한데 어디가 까무잡잡하다는 건인지. 결국 그는 제 입맛에 맞게 고치면 되겠네요. 라는 평가를 남겼다.

가끔 생각이 난다. 선생님, 잘 지내시고 계신가요? 라고 몇 번 메시지를 보냈지만 답장이 없다. 사랑하는 그분과 어떻게 되셨는지. 입맛에 맞게 까무잡잡하지 않게 시를 고치셨는지 궁금하다. 사랑을 어떻게 전달하는 것입니까? 선생님이라 불린 나는 그것이 너무 궁금했다.

프론트엔드 개발자

부트캠프에서 두 달이 흘렀다. 두 번의 프로젝트를 끝냈다. 이제 웹 사이트를 보면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대충, 아주 대충은 감이 온다. 많이 부족하다. 한 달이 지나면 얼마나 좋아질까. 기대보다 걱정이 앞선다. 일인분은 잘 할지. 배워야 할 것은 많은데 배웠던 것이 내 것 같지 않아 속상하다.

2차 프로젝트는 다사다난했다. 프로젝트 일주일을 남기고 2.5단계가 되면서 위워크가 폐쇄됐다. 코딩 난민을 자처하며 동기들과 호스텔에 들어가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프로젝트 전날엔 에어비앤비를, 발표 시간 때문에 에어비엔비 시간 연장까지 하며 발표를 마쳤다. '이젠 다시 코로나 이전 시대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기업 협업 발표가 났다. 내일부터 첫 출근이다. 출근이란 말이 어색하다. 지금까지 직장을 가져본 적이 없다. 호주나, 독일에서 아르바이트 정도 해봤지 정식으로 회사를 가본 적이 없다. 비록 한 달짜리 짧은 인턴십이지만 첫출근에 첫눈이라니. 손가락이 근질근질거려서 글을 참을 수가 없었다. 가을 냄새를 맡으면, 바다를 보면, 첫눈이 내리면 글을 써야 한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2차 프로젝트 기간에 이력서를 제출했다. 오랜만에 써본 이력서다. 세원이가 '프론트엔드 개발자'라는 단어를 넣기 쑥쓰럽다고 말했다. 고작 두 달을 공부하고 '프론트엔드 개발자'라니. 그 말을 들으니 내 이력서도 덩달아 민망해졌다.

신이나 기술 스택과 프로젝트에 썼던 기술을 쓰다가 'about me'에서 주춤했다. 늘 하고 있었던 질문, 앞으로 어떤 '개발자'가 될까라는 질문이다. 코드를 짤 때는 '어떻게 하면 더'라는 생각이 가득하다. 더 잘하고 싶고 더 효율적이고 싶다. 그때 나를 건들면 물 수도 있다. vscode를 끄고 맥북을 덮으면 코드를 치다 말고 졸고 있는 현재와 규석이가 보인다. 힘내라고 포도당 하나 내민다. 그거 다 별 거 아니라고 괜찮다고 말한다. 같이 있는데 힘이 난다. 그런 생각을 하다 'about me'를 작성했다.

2020

한 달간 기업 협업을 잘 해내야지. 어디 가서 '개발자'란 호칭에 쑥스러워하지 말아야지. 어디 가서도 잘할 것이라고 누군가 내게 말했는데 사실 나는 어디 가서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인데 그래서 무척 걱정이 된다. 새로운 시작 전날이다. 나를 선생님이라고 불렀던 그분이 생각난다. 잘 지내시나요 선생님. 저는 어찌어찌하다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까무잡잡한 표현은 요새 쓰지 않고 있어요. 사랑은 어떻게 전달하는지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종종 선생님이 생각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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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코드와 사람에 관해 생각합니다.

10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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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 19일

동하님, 이런 글 더 보고 싶어요 🙂
개발자답게 써야할 것 같아서 짧게 쓰려고 노력하신다지만... 공부한 거 정리한 글도 이렇게 풀어쓴다면 동하님 생각이 더 잘 묻어날 거 같아요
기업협업 벌써 일주일 지났는데 계속 화이팅 하시고, 2021년에 좋은 일 많이많이 생기시길!

1개의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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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 20일

사랑은요..
향과 같아서 억지로 쥐어짜면..
금세 퍼져 사라진답니다..

동하님의 향 그 자체로 은은하게..
억지로 생각하지 않고..

향을 맡아 본 처음 느낌 그대로..

작가님 향은 마치..
케케묵은 청국장 향 같더라..💕

1개의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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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 20일

멋져...ㅠ 화이팅!!

1개의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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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 25일

달이 참 예쁘네요 :)
일본의 소설가 나츠메 소세키가 I love you를 번역하면서 생긴 말인데, 이 글 읽으면서 갑자기 떠올랐어요
기업협업! 화이팅 하세요 동하 센세 🌝

2개의 답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