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번의 자가격리 2번의 실패

dongha1992·2020년 12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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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친구가 시험에 낙방했다. 4년을 준비했는데 낙방했다. 1차, 2차 다 붙고 최소한의 인간 도리만 지키면 붙는다는 면접에서 떨어졌다. 이제 서른인데. 친구는 그날 앞뒤 맥락 없이 욕을 해댔다. 내게도 욕을 했다. 보자 보자 하니까 못 하는 말이 없다며 나도 화를 냈다. 이제 서른인데 어떡하냐고. 친구는 맥아리 없이 울어댔다.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나도 이제 서른인데.

연말

연말이면 글을 쓴다. 작년엔 글을 쓰지 않았다. 글을 쓰는 건 내일 다시 보기 위함이다. 작년 이맘땐 내일이 올까 싶었다. 그래서 글을 쓰지 않았다.

아침에 눈을 뜨니 엄청난 두통이 밀려왔다. 아침으로 늘 먹던 냉동 빠에야를 먹는데 이가 찢어질 것 같았다. 문자 그대로 찢어질 것 같았다. 3일을 참고 치과에 갔다. 태생적으로 튼튼해 보험도 가장 기본적인 보험을 들었는데 그것이 화근이었다. 젊은 의사 선생님이 엑스레이를 찍더니 사랑니가 누워서 옆 이를 뚫었다는 것이다. 무려 2-3년에 걸쳐 조금씩 누워 공간을 만들고 그 공간에 음식물이 껴 세균이 신경까지 침투해버렸다. 2-3년 동안 사랑니가 천천히 누울 때 알아차리지 못했다. 사랑니가 이제 다 누웠다. 하고 신호를 보내자 별안간 어느 아침부터 잇몸부터 머리까지 모두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이 생겼다. 사랑니를 뽑고 신경치료 두 군데를 하는데 1,500 만원이라고 했다. 보험을 적용시켜도 50%는 내야 한다고 했다. 연말에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는 왜 이렇게 비싼지. 진통제와 소염제를 먹으며 한 달을 버텼다. 액땜했다고. 좋은 출발이라고 말했다.

코딩

치과 치료를 받고 다시 독일에 가야 하는데 어딘가 붕 떠버린 기분이었다. 스물 다여섯 사이를 왔다 갔다 하던 내 나이가 한국에 오니 갑자기 스물 아홉이 되었다. 아버지는 언제 독일에서 자리 잡을 거냐고 물었다. 요는 이렇다. 아버지와 약속을 했다. 2년 안에 독일에서 자리를 잡을게. 일을 하든 공부를 하든 뭐든 할게 조금만 기다려줘. 그렇게 1년 반이 지났고 아버지는 처음으로 물었다. 너 거기서 뭐하냐고. 사실 내 마음은 독일보다 글에 가 있었다. 독일어 공부를 했지만 한국어 책을 더 많이 읽었다. 일을 찾았지만 사실 글을 납품하는 걸 더 즐겨했다. 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당장 한국으로 돌아오렴. 아버지, 사실 저는 독일에서 한국에 관한 책을 내는 원대한 목표가 있습니다 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더 이상의 계략은 통하지 않았다. 뭐든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이상한 고집이 있어서 글을 포기할 수 없었다. 내가 뭐 좀 있는 것 같아 파다 보면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현실과 타협해 일단 독일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강구하기로 했다. 그러던 중 코딩을 알게 되었다. 내 친구의 친구가 부트캠프라는 곳에 들어가 취업을 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html, css를 알게 되었다. 노트북을 들고 카페에 가서 뚝딱뚝딱 무언가를 만드는 게 꽤 괜찮아 보였다. 벌써 베를리너가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실질적인 결과물은 없었지만 무언가 하고 있는 그 기분이 좋았다. 그 기분에 취하자 무언가 하는 것이 두려워졌다. 곧 2020이 찾아왔다.

코로나

베를린으로 돌아가 독학을 시작했다. 계산기도 만들고 아주 작은 미니 프로젝트를 하면서 코딩을 익혔다. 사실상 독학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것이 그냥 유튜브나 깃헙을 보면서 따라 쳤다. 그렇게 따라 치면 무언가 완성되긴 하니까 성취감은 들었다. 원리나 구조는 모른 채 2-3개월을 따라 치기만 했다. 이제 좀 만들 수 있으니까 이력서를 내볼까 하는 기상천외한 생각도 했었다. 그때 코로나가 터졌다. 셧다운에 들어가고 도시는 얼어붙었다. 3월 15일. 200명이었던 확진자는 일주일 만에 몇 천 명을 돌파했다. 마트에 휴지가 사라졌다. 내 이름은 킴인데 지나가던 독일인이 나를 코로나라고 불렀다. 이 곳에서 가장 취약한 계층이 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신경치료의 악몽이 떠오르며 독일이고 뭐고 여기에 있다가는 큰일 나겠다 싶어 짐을 싸 도망치듯 한국을 향했다. 한 달이면 잠잠해지겠지. 키우던 식물들에게 작별 인사도 못 하고 부리나케 도망쳤다. 공항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바라본 거리엔 사람들이 없었다. 다시는 오지 못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여름

한 달이면 될 줄 알았던 코로나는 그칠 줄 몰랐다. 비행기를 연기하고 취소하고 재구매하고 벌써 여름이 되었다. 그간 빠져나간 베를린 방 렌트비에, 유야무야 보냈던 시간들에 벌써 스물 아홉의 반이 지나간 것이다. 올해에 있어 가장 물렁물렁했던 시기였다. 나는 독일도, 한국도 어디에도 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울했고 지쳤다. 다시 독일에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고 한국에 있고 싶지도 않았다. 요 몇 년 나의 여름은 항상 왜 이런지. 결단을 내려야 했다. 짐을 정리하고 한국에 돌아오기로 했다.

3번의 자가격리

무언가를 포기하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다. 집 정리를 하는 2주 동안 그냥 여기에 있을까 하는 생각이 꽤나 많이 들었다. 사실 한국보다 익숙한 건 독일이었다. 적당한 일과 적당한 사람들 적당한 휴식 적당한 음식 적당한 놀이 적당한 강아지. 타인에게 큰 관심은 없지만 인간미는 늘 가지고 있는 주위 사람들. 여기서 만난 소중한 인연들. 발코니에서 기지개를 켜면 인사를 건넸던 티드 할아버지. 할아버지에게 편지를 써야지. 방금 든 생각이다. 기분이 울적했다. 무언가를 포기하는 건 그 시간들을 모두 버리는 것 같았다. 이어져왔던 하나의 세계를 단절하면 그 세계는 잊힌다. 나의 세계들은 많지 않아서 하나하나가 모두 소중하다. 이렇게 하나가 잊힐 것이다.

아버지는 2년 동안이나 거기서 무엇을 했냐고 물었다. 실패다. 인생의 첫 번째 실패다. 베를린을 떠나는데 묘한 씁쓸함이 들었다. 아마 실패의 씁쓸함일 것이다. 무엇을 이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되기로 결정했는지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지금 당장 결실이 없더라고 훗날 저를 지탱해줄 경험이 생겼습니다! 라고 말했지만 내게서 유리된 2.5년의 시간은 나를 빠져나갔다. 나는 2.5년이 빈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2번의 실패

한국에 도착한 나는 부트캠프를 시작했다. 개발자라는 목표가 생겼다. 리액트와 리덕스가 꽤 재밌다. 머리는 좀 나빠도 특유의 근성으로 버티고 있다. 나 좀 잘할 것 같다. 맞다! 오늘 세 번째 자가격리가 풀린 날이다. 2020년을 하루 남기고 리액트 네이티브와 긴 하루를 보내고 있다. 에러를 찾지 못해 짜증이 밀려와 스터디카페 한 시간을 남기고 짐을 챙겨 집으로 돌아왔다. 2020년이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급하게 노트북을 켰다. Deanna Petcoff의 Terribly True를 들으며 일 년을 정리했다. 2020년의 목표가 뭐였지. 독일에서 잘 살기 그리고 글로 살아남기. 한국에 왔으니 하나는 실패했고 이제 개발자로 일할 테니 다른 하나도 곧 실패할 예정이다. 3번의 자가격리와 2번의 실패로 나의 2020년을 마무리했다.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이제 서른이다. 이럴 때 생각나는 좋아하는 소설이 있다. 결혼을 앞두고 사라진 남편이 장발의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고 힘없이 돌아오며 긴 머리는 사실 자신의 청춘의 모라토리엄이라고 말한다. 나는 아직도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던 스물다섯의 김동하인데 지구 어디든 살 수 있다고. 나는 영원히 발아하지 않은 복사 씨 살구 씨 라고. 생각하던 그때인데. 벌써 서른이라니.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그래도 꽤 기대되는 하나의 실패가 아직 남았다. 내 세계들은 많지 않아서 하나하나가 소중하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가 저버리면 속상하다. 그간 읽었던 책들, 고민했던 문장들, 살펴보았던 단어들 이제 다시 오지 않겠지만 또 다른 세계가 기다리고 있다. 어쩌겠어 그냥 살아야지. 더 잘 살아야지. 나의 실패를 위해, 세계들을 위해. 지구 상에 가장 재밌게 사는 김동하 파이팅 이라고 2021년을 시작해야겠다.

사진 : https://blog.usejournal.com/react-from-scratch-8acf7a1b00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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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코드와 사람에 관해 생각합니다.

18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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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 1일

역시 필력이 남다르시군요. 정말 좋은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제 개인적으로 20대 후반에 2~3년간 노력했던 시간들을 무시당해 우울증을 겪었던 경험이 떠올라
공감이 되는 부분도 있어요. 하지만 그 시간을 외면하지 않고 이어나가 보니 좋은 사람들도 만나고 기회도 얻게 되더군요.
동하님은 물론 친구분도 열정적인 분이라고 느껴지네요. 잘 되실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2021년 뜻 깊고 의미있는 한해 되시길 바래요. ✌

1개의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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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 1일

동하님. 글 너무 좋네요ㅎㅎ 코드도 글도 다채로운 한해되세요!

1개의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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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 2일

괜찮은 글이군..

1개의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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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 3일

울었습니다. 8ㅅ8

1개의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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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 3일

동하님 ㅋㅋㅋ
아...나는 위에서 부터 글 읽다가 '도대체 어떤 치과가 신경치료에 1500만원 받냐'고,
내가 아는 강남역 치과 선생님 소개해주려고 했었네 ㅋㅋㅋ
독일인줄 몰랐네...근데 그 강남역 치과 선생님 진짜 정직하게 잘해요...혹시 또 필요하면 말해요 ㅋㅋㅋㅋ

응원합니다 ㅋㅋㅋㅋ재밌는 동하님의 글이네요~
나중에 언젠가 동하님은 글이나 코딩을 선택하면서 독일 혹은 다른 도시에서 살고 있을 것같아요 ㅎㅎ
우리 꼭 브란덴부르크문 옆에 있는 그 카페에서 봐요!

1개의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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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 3일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좋은 글 이네요 ^^
2021년에도 화이팅 하시고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1개의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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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 4일

잘 읽고 갑니다.
개발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하고, 앞으로 멋진 2021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1개의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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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 11일

으악ㅠ 울컥하네요ㅠㅠ
새해를 맞으면서 많은 생각들이 들었는데 동하님 글로 위로 받고 갑니당
앞으로의 동하님의 세계에도 좋은 일 많이많이 생기길 바래요! 파이팅!

1개의 답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