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사람들이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공중 증발되어버렸다고 말하는 2020년이다.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 두 개는 (내게 무해한)사람들 그리고 그들과의 술자리
인데, 이렇다보니 내게도 역시 코로나 시국이란 꽤나 가혹했다. 양껏 즐기고 싶은데 참느라 고생했고, 아직 고생중이다.
코로나만 있어도 힘들었겠지만 개인적으로 인생 최대 고비 앞에서 정말 많은 고민과 스트레스, 좌절을 느끼게 된 해였다. 살아온 인생 모두와 그 속에서 형성된 내 인격을 3D로 스캔하며 많은 반성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혼과 마음을 갈아 노력했고
안되는 것도 되게 만든
그리하여 결코 후회 없는
끝내 개발자 커리어로서의 첫 해가 되어준
2020년이었다.
대학을 졸업할 때의 나는 하고 싶은 것이 없었다. 다만 피하고 싶은 것은 있었다. 회사원이 되는 것. 거의 모든 면에서 지금과 180도 다른 인간이었던 2015년 즈음의 나는 이렇다할 확실한 이유도, 근거도 없이 단지 느낌만으로 나라는 인간이 회사원을 할 수는 없다고 단정지어버렸다. 그렇다고해서 하고 싶었던 일도 없었던 나는 '내가 잘해왔고 앞으로도 잘할 것 같은, 돈도 꽤 번다는' 영어 강사 일을 하기로 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생기는 그 즉시 강사일은 그만둘 작정으로 그냥 놀고 먹긴 뭐하니 별 생각 없이 시작한 일이었다.
분명 하고 싶은 일이 확실해질 때 그만두고 깔끔하게 전직하자고 일단 시작한 일이었지만 인생이란 결코 내 맘대로 되지 않았다. (이 말은 그때도 맞고 지금도 맞고 자꾸만 더 맞다.) 일을 시작하고 약 한 달이나 지났던가, 내가 하고싶은 일에 대해 생각조차꺼내지 못한 시점에 그만두고 싶어져버렸다. 이유는 하나, 재미가 없었다. 내 예상대로 가르치는 일은 내게 너무 쉬웠다. 가르치는 일 자체는 쉬웠는데, 일이 쉽다는 것 외에는 내게 메리트가 단 한 개도 없었다. 바로 옆 방의 동료들은 재밌게 고민도 해가면서 보람차게 일하는데 나는 재미도, 고민도, 보람도 없었다. 주변 동료들이 직업적 소명, 그에 따른 사명감으로 하루하루를 전투하다시피 사는 것을 보며 아무 감흥 없는 일을 '일이라서' 해야 했던 나는 그들을 지켜보며 정말 많이 부러웠고, 한편으로는 그들의 진지한 자세 앞에 늘 죄책감을 가졌다. 웃긴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개인적인 이유로 햇수로 무려 5년을 강사로 남아야 했다는 것이다. 그 기간동안 두 세 차례 탈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탈출을 위한 탈출 혹은 도피를 위한 도피로서의 전직의 길은 쉽게 보이지 않았고, 실제로 몇번 문턱까지 갔던 기회들도 결국엔 막판에 좌절되었다. 다소 결과론적인 생각이지만 내가 마음을 다하지 않았던 일들, 기회들이었기에 성공할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강사 5년차가 되었을 때, 드디어 나는 내 인생을 포기했다. 인생을 포기한다고하면 대단히 막 살아버리는 인생을 생각할 수 있는데, 내 기준 인생의 포기란 앞날에 대해 어떠한 기대도, 어떠한 의지도 가지지 않는 것
이다. 하루종일 집에서 술 퍼먹고 길바닥에 나앉아 뒹굴며 밥 빌어먹는 인생도 미래에 대한 본인의 계획이, 꿈이 있다면 내 기준 그것은 인생을 놓은 것이 아니다. 하지만, 하루 여덟시간 꼬박 일할 때만큼은 정해진 가이드라인을 지키며 성실히 근무하고 때로는 주말에도 나가 일하면서 꼬박꼬박 적금 붓고사는 인생이라 할지라도 미래의 자신이 기대가 되지 않는다면 난 포기했다고 본다. 이는 모두에게 적용되는 기준이 아님을 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힘들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나를 포기했다고 인정해버렸기 때문에 자괴감이 컸다.
그러던 2019년 하반기 어느 내신 기간(학생들 시험 기간), 내신 기간이라면 모든 입시 강사들이 두 세번은 해야만 하는 일요출근을 하던 기억 안나는 그 어느 날, 개발자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인생 최초로 내 스스로에 대한 그나마 철처하고 완벽한 고찰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이유는 이랬다.
강사 일을 그만두어야 하는 이유
-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하면 할수록 어두운 인간이 되어간다.
- 심지어 연봉이 오르는데도 기쁘지 않다. 남이 연봉 오른 것을 봐도 그렇게 안부럽다. 돈 되게 좋아하는데.
- 따라서 자존감이 사라진다.
- 낮밤이 바뀌는 것이 싫다.
(이 이유로 개발자로 전직했다니 지금 돌아보면 이런 개그가 없다. 개발자는 낮밤이 바뀌는게 아니라 낮밤이 그냥 없다.)- 나는 영어를 잘한다기보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문법 100선 가르치기를 잘하는 것 같은데 이거 맨날 능력으로 구라치고 사는 것 같아서 틈만나면 찔린다.
개발자를 해야하는 이유
- 기계와 소통하는 법을 모른다면 곧 기계에게, 혹은 기계를 잘아는 놈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고 살아야 할 것이다.
- 이 일을 하려면 죽어라 공부해야할 것 같은데 그것이 엄청나게 힘든만큼 엄청난 심리적 안정과 보람을 줄 것 같다.
(내가 이런 변태였음을 깨달은 것도 이때였다.)- (어느 정도 전문성을 갖췄다고 가정할 때) 해외 취업이 가능할 것 같다.
- (역시 어느 정도 전문성을 갖췄다고 가정할 때) 대체 불가 전문직이다.
- (역시 어느 정도 전문성을 갖췄다고 가정할 때) 남들앞에서 무언가 발표하며 공유하는 것을 하고 싶은데 그럴 기회가 많아 보인다.
- 틈틈히 알아보고 있는데 너무 간지난다.
(물론 실상을 알기 전이다..)
여러번의 강사직으로부터의 탈주 시도에 실패한 상황이었고, 한 번만 더, 그것이 내게 어떤 결과를 가져다 준다할지라도 우선은 해보자는 마음이었다. 안되면 그 때는 정말로 이렇게 포기하고 살겠다고 내 스스로에게 확실히 해두었다. 앞선 여러번의 탈주 실패로 인해 시작도 전에 다소 낡아진 나의 마지막 새 시작을 앞두고 여러 가지 준비를 했다. 뼈에 새긴 문과 성향 어디 안갔던 시절이라(사실 아직도..) 개발자, 개발 '관련'
서적을 무지 읽었다. 말하자면 실전 코딩이 아니라 자기 계발 서적처럼 이래라 저래라 하는 류의 어드바이스 따위를 모아둔 책들. 학창시절 신화창조 팬클럽 활동 이후로 단 한 번 관심도 없던 커뮤니티, 인터넷 검색에 나름 열을 올리며 여기저기 기웃거리기도 했다. 그렇게 난생 처음 듣는 개념, 처음 보는 이야기들을 머리에 하나 하나 주워담았다.
그렇게 나는 2019년 12월 말, 강사직을 그만두었다.
기본적으로 내가 컴퓨터와 얼마나 어색한 사람인지 스스로 잘 알고 있었고, 적지 않은 나이에 큰 결심을 하고 시작하는 일이라 독학은 우선 옵션에서 제외했다. 대부분의 양심 없는 사람들이 그러하듯 나 역시 단기간에 확실한 것을 원했기에 최대한 리스크를 줄여보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똑똑한 구글이 이런 조건으로 서칭하는 인간에게 엄선하여 보여주는 결과는 당연히 코딩 부트캠프였다. 그리고 개발, 코딩에 관심있는 모두가 아는 바로 그곳 ㅋㄷ ㅅㅌㅇㅊ를 가장 처음 먼저 알아봤다. 하지만 당시엔 그 엄청난 비용에 깜~짝! 놀라 바로 후퇴했다. 대한민국 사교육 시장은 나도 알만큼 아는데, 이 엄청난 교육비는, 그리고 그 엄청난 교육비를 요구하는 당당함은 대체 출처 모를 일이었다. 상황은 ㅋㄷ ㅅㅌㅇㅊ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코딩 부트캠프에서도 같았다. 그리하여 내가 발걸음을 돌린 곳이 국비학원이었고, 그 곳의 경우 교육비 전액을 국가에서 부담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당시, 같은 것을 배운다면 어느 정도 질적인 차이가 있다하더라도 우선은 비용적으로 가심비가 월등했던 국비학원으로 향하는게 맞다는 판단에 국비 학원을 다녔고, 2개월 후 그만두었다. 여기 공개적으로 미주알 고주알 적지는 않겠지만 나는 국비학원을 추천하지 않는다.
국비를 그만두며 든 생각은, 하루 술 값 10만원은 아깝단 생각도 없이 턱턱 잘만 내는 내가 왜 인생을 바꾸는 결정 앞에서 가성비를 아니 심지어 가심비를 따졌냐는 의문이었다. 교육비가 비싸야만 좋은 결과를 내는 것은 아니고, 비싼 곳에 가야만 좋은 강사진과 좋은 커리가 있는 것도 결코 아니다. 이건 내가 강사였기 때문에 정말 잘 안다. 모든 것은 사람 바이 사람, 기관 바이 기관이다. 하지만 여러가지 머릿속을 지나가는 경험에서 축적된 데이터들이 꼭 한번 부트캠프 쪽에서도 상담을 받아야 하는 이유를 내게 수십 수백개 던져주었다. 인터넷을 통해 여러 곳을 비교해보며 어디는 너무 고압적이라, 어디는 너무 전공자 비율이 높아서, 어디는 너무 불친절해서, 어디는 온라인 수업이라 제낄 곳 다 제낀 후 남은 곳으로 상담을 갔다. 위코드였다.
6월 22일 위코드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야말로 첫날부터 전쟁이었다. 단지 남의 떡이 커보였던 것일수도 있지만, 약 5주간의 사전 스터디를 거치고 온 동기들은 어느 정도 잘 적응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과 달리 나는 초죽음이었다. 방문 상담 당시 개강일이 한달 반가량(정확히는 기억이 안남) 남았던 11기가 아니라 당장 열흘뒤에 개강한다는 10기로 꼭 들어가고 싶어 다소 무리하여 덜컥 등록했는데, 한 달전에 등록해서 사전 스터디를 차근차근 진행하고 들어온 동기들과 나는 너무 차이가 났다. 백엔드 기준, 파이썬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그들과 달리(나중에 들었지만 django 입문 직전까지 사전 스터디를 진행한 조도 있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나는 개강일에 처음으로 print문을 사용해봤다. 지금이야 너무 당연한 'print를 찍어봐라'
는 멘토들의 조언에 위워크 내 프린터의 위치를 먼저 확인했던 나였다. (믿기 힘들겠지만 이거.. 진짜임...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아프다...) 어느 정도로 눈 앞이 깜깜했냐면 지금 다시 돌아봐도 앞이 안보이는 정도였다. 그 쾌적한, 오로지 코딩에만 몰두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심지어 거의 하루종일 양질의 드라프트 맥주 무료 제공)에서 나는 거의 분 단위로 숨이 턱턱 막히고 있었다.
상황은 2주간의 foundation course(본격 프로젝트 시작 전 백엔드 기초 다지기) 이후에도 비슷했다. 대부분의 위코드 후기가 '즐거웠다', '너무 행복했다', '시간이 너무 빨리갔다'고 말하고 있지만 나는 결코 아니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그냥 죽을 것 같았다.
위코드는 결코 밥을 떠먹여주지 않는다. 말하자면, 너무 틀어지지 않도록 가이드라인 정도를 잡아주는 커리큘럼이라는 큰 뼈대만 있고 그 안에서 다 스스로 살을 붙이고 근육을 붙이고 옷도 입히고 해야 한다.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냐면, 얼만큼 살 찌우고 근육을 붙이고 비싼 옷을 입히냐는 본인의 의지와 노력, 능력에 달려있다는 말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코디해주고 밥먹을 때 직접 씹어 삼키기 전까지 만들어주는 사교육 시장에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물이 들어버린 내게는 고역이었다. 그토록 강사직에서 벗어나고 싶어했으면서도, 계속해서 '왜 여기 사람들은 나처럼(내가 강사로 일할 때처럼) 안해주지?' 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대학 입시 자소서까지 손봐주던 나였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비싼 돈을 받고 어떻게 이렇게 나를 방목하는지 화가 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돌아보면, 그렇게 안했으면 지금 여기까지 결코 못왔다.
2주간의 파운데이션 기간, 1차 프로젝트, 2차 프로젝트 그리고 수료까지 약 3개월이 조금 안걸렸다. (자세한 커리큘럼은 어차피 다른 위코드 선후배들이 너무나 잘 써놓으셨으니 나는 생략한다.) 수료식은 9월 11일이었다.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다른 직업에서 개발자로 전향한 모든 사람들이 다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일반적인 그만큼의 노력에 조금 더 얹어야했고 본다. 이유는 돌아버린 뼈문과라 코딩을, 나아가 개발을 하기 위한 머리로 세팅하는 수고가 조금 더 들어갔기 때문이다. 매사에 평생에 걸쳐 쌓아온 생각의 방식, 논리 회로를 뒤집어야했다. 이러한 수고를 인정받은 것은 위코드 수료식 날 받은 '젤열심상'이었다. 이 상을 동기들이 주었든, 멘토님들이 주셨든 정말 값진 상이었다.
언제가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냐 누군가가 묻는다면 나는 정확히 2020년 6월 22일부터 2020년 9월 11일까지를 꼽을 것이다. 단 하루도 힘들어 미치지 않은 날이 없었고 위코드 생활은 즐겁다기 보다는 불안하고 무서웠다. 결과가 좋으니 '좋은게 좋은거'식으로 기억이 미화된다? 나는 그런거 없다. 누군가에게는 할만했겠을 수 있지만 내게는 진심으로 죽을만큼 힘들었다.
하지만 이건 확실하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힘들었던 이유는 다른게 아니라, 위코드 커리큘럼을 따라갈수록 진심으로 개발자를 하고싶다는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서 내 능력과 적성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생겼는데도, 코드 까막눈을 하고도 이상하게 이 공부가 좋았고 느릿느릿이어도 알아가는 과정이 너무 행복했다. 처음 200 OK
를 만난 그 순간의 희열이 긴 대학 입시(삼수했다) 끝에 합격증을 손에 쥐었던 그 순간의 희열과 비슷했다. 살면서 이렇게 재밌는 일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힘들었다. 너무 좋은데, 좋은만큼 내가 잘하지 못해서. 너무 좋은데, 나도 그만큼 즐기고 싶은데 하필 스스로에게 엄격한 사람이라 성취의 기준이 빡세서.
다행히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순간들이 모여 끝내 내게 보상을 안겨줄 것이라는 확신은 놓지 않았다.
그 덕분에 지금도 개발자로의 전직을 다짐한 순간과 위코드행에 대한 결심에는
단 1의 후회도 남지 않는다.
성공적인 위코드 수료 이후에는 취준이라는 큰 산이 버티고 있었고, CS적 지식이 다른 지원자들보다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스스로의 판단에 걱정이 앞섰다. 위코드 때만큼은 아니어도 하루 하루 크게 스트레스 받으며 취준하겠구나, 하고 예상하며 덤덤히 준비해보기로 했다. 그러다 본격적인 취준을 시작하지도 않았던 시점에, 개발자 전직을 생각하면서부터 1순위로 일해보고 싶었던 '의료 계통'의 앱을 서비스하는 회사의 입사 공고를 보게 되었다. 전반적인 입사 조건과 회사의 비전,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체적으로 의료서비스 앱을 다루는 회사라는 점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처음으로 본 입사 공고여서 '첫술에 배부르랴'라는 마음으로 너무 기대하지 않고 준비해보려고 했으나, 하필 첫 이력서 제출이자 첫 면접이 '내가 신입 개발자가 된다면 어떨까'하며 늘 최상의 조건으로 꿈꿔오던 그림과 꼭 맞아 떨어져서 어쩔 수 없이 자꾸만 기대를 하게되었다.
꼭 이곳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드니 자기소개서 및 이력서에 정말 영혼을 갈아 넣게 되었다. 위코드 멘토님들, 그리고 스타트업에 재직중인 오랜 친구에게 여러번 자문을 얻었고 고치기도 몇 번을 고쳤다. 그렇게 영혼을 갈아 넣은 자소서 덕에 다행히도 서류 합격 통보를 받았고 서류 합격 통보일로부터 3일 뒤 1차 면접이 잡혔다. 1차 면접 과제를 준비하느라 난생 최초로API 문서
를 작성하며 뭐가 맞는 방향인지도 모르는 채로 구글링, 위코드 멘토님, 서적은 물론이고 3년차 개발자라는 친구의 남자친구에게까지 조언과 자문을 구해가며 준비했다. 그렇게 준비한 1차 면접도 어찌저찌 통과했다. 2차 면접을 준비할 때에는 역시 난생 처음으로 클라우드 보안
에 대해 공부했다. 1차 면접 통과 후 2차 면접까지 주어졌던 3일, 즉 72시간 중 약 50시간동안 클라우드 보안만 생각했던 것 같다. 전체적으로 어찌어찌 이해는 되었는데 도통 내 말로 나오지가 않아서 클라우드 보안, 기타 CS 관련 지식, 혹은 기술면접에 나올만한 내용을 A4용지로 열 네장에 걸쳐 뽑아 형광펜으로, 볼펜으로 체크해가며 100번정도 읽으며 막판에는 아예 외울 정도로 공부해갔다. 예상대로 2차 면접은 1차보다 역시 어려웠다. 간단한 자기 소개 및 인성 면접(?)은 무난히 통과했으나 기술 면접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 50시간동안 준비한 과정을 생각하며 자신있게 몰라도 담담히, 아는 것은 최대한 자세히 풀어나갔다.
그리고 2020년 9월 21일, 최종 합격 통보를 받았다.
개발자가 된지 3개월이 지났다. 나의 피나는 노력도 있었지만, 운이 좋아 본격적인 취준 없이 첫 면접으로 신입 개발자 타이틀을 달 수 있었다. 회사에 만족하고 있고 내 일, 내 업무에도 만족한다. 하지만 여전히 내 개발 실력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남아 입사할 때 마음가짐 그대로 주말도 없이 이렇다할 휴식 기간 없이 개발과 코드를 머리에서 놓지 않고, 위코드 때처럼 꿈에서도 코딩하며 끊임없이 실력 향상을 위해 노력중이다. 이 글을 쓰는 이유도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고 내년(이라고 하면 내일)부터 더 미친듯이 달리기 위함이다.
개인적인 이유로 마음이 아픈 나날을 보냈던 때가 있었다. 약 3년간. 당시 나는 내가 내 생각보다 인복이 참 없는 사람이라고 느꼈다. 나는 내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을 아끼지 않고 주며 최선을 다하는 타입인데, 내가 준 마음만큼 내게 돌아오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느꼈다. 사람이 그렇게 좋아서 사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살아온 세월이 내 인생의 전부인데, 스스로 인복이 없는 인생이라고 단정지어 버리니 힘이 쭉 빠지고 참 우울했다.
얼마나 그 생각이 어리석었는지를 절절하게 깨닫게 해준 2020년의 내 사람들에게 이루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감사를 보낸다. 연예인들이 연말이면 연기대상이다 연예대상이다 나와서 본인의 성취가 있기까지 어떠한 도움을 받았는지를 한 명 한 명 나열할 수 있다는 게 참 부러웠었다. 그리고 올해는 나도 한다. 고마운 마음의 크기를 감히 재단할 수가 없어 가나다순으로.
고효완, 권도경, 김나라, 김보영, 박해정, 신유진, 이상미, 장예솔, 전하늘, 정병욱, 정천감, 조은별, 진송이가 없었다면 올해를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선릉 위워크 2호점 10층에서 크고 작은 좌절을 겪을 때마다 전화로, 카톡으로, 선물로, 편지로, 때때로 만남으로 온맘을 다해 응원해준 것을 절대로 잊지 않고 살면서 보답하겠다.
또한 위코드에서의 예행연습 덕분에 지금의 개발자 생활을 버틴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어떤 에러가 떠도 내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당연한 일이라 생각할 수 있게 되었고, 처음 보는(보통 처음본다) 난관에 부딪혔을 때(하루 평균 약 5~10개) '나는 이거 못하는데'가 아니라 '찾아보면 나온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밤늦게까지, 새벽까지 해결안되는 문제 앞에서 '왜 야근하지' '왜 이러고 있지'가 아니라 '이거 해결하면 얼마나 기분좋을거지'가 먼저 생각난다. 위코드에서 모든 것을 꼭꼭 씹어 떠먹여줬다면, 그 때 겪지 못한 여러 장애물을 취직 후 처음 겪으며 이 길이 정말 내 길이 맞는지 진지하게 고민했을 것이다. 하루하루 성장해 나가는 것이 아직도 정말 힘들지만, 위코드 때완 달리 그 힘든 과정을 드디어 조금은 즐기게 되었다. 이렇듯 소중한 위코드에서 만난 멘토님과 동기들 모두에게 무한한 감사를 보낸다. 특히 10기 백엔드팀 모두와 틈만나면 쫓아가서 물어볼 때마다 도와줬던 김병준, 이태성, 최준 그리고 시차도 안맞는데 때마다 페이스타임으로 서로의 고락을 나누어준 박예진에게 특별한 감사를 표한다.
2020년 징하게 수고 많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목마르기에, 2021년에는 2020년보다 두 배 정도 열심히 살아보려고 합니다.
다시 한 번 잘 부탁드립니다.
화이팅!
안녕하세요, tech 기업에서 일하는/ 일하기를 희망하는 여성들을 모아서 모임을 만드는데 참여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자세한 사항은 및 링크 참조바랍니다 :)
https://velog.io/@emilyscone/SheKorea-1%EA%B8%B0-%EB%A9%A4%EB%B2%84%EB%A5%BC-%EB%AA%A8%EC%A7%91%ED%95%A9%EB%8B%88%EB%8B%A4
수미님 최고👍 코로나 끝나면 얼른 술 먹어요 근데 제 이름이 안들어가 있으니까 좀 섭섭하네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