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 를 읽고

Js_dev·2024년 7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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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 후 적응기를 갖고 있다.
이제 책 좀 읽고 생각할 여유가 생기는 것을 보니 슬슬 적응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듯 하다.
이전에 정리한 <피로 사회>를 작성한 한병철 저자가 새로운 책을 내놨다.
여전히 마음에 든다.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자.

서론

바뀌어진 지배 구조

예전 : 권력으로 체제 통제. 노동자는 소유자에게 탄압당한다.

이것은 90년대부터 자라온 세대라면 어느 정도 메타의 변화를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
점점 시간이 지나오면서 통제의 정도가 낮아진다. 당연히 나이가 들면서 자유와 함께 책임이 찾아오는 것이라지만,
글쎄, 현재 자신에게 확실하고 직접적인 통제가 주어졌다고 볼 수 있는가?

그래도 우리는 나름 자유롭게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다.
그러나 필자는 고등학교때만해도 강제적으로 밤까지 야자를 해야 했고 대들면 맞는 경우도 존재했다.
이전 세대면 더욱 심했겠지, 아무튼 통제의 빈도나 강도는 줄어든다고 생각이 든다.

직장도 마찬가지다.
예전에는 출근시간이 정해져 있었고 상명하복 구조가 확실하나, 현재에 이르러서는 아예 없는 것은 아니나,
그 빈도가 줄었음을 몸소 체감할 수 있다. 자율출퇴근과 상호평가, 수평적인 구조를 기업들이 앞다투어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는 다음과 같다.

현재 : 권력은 탄압하지 않고 유혹적이다.
노동자는 자신을 권력자로 만든다. 실패하는 자는 자책하고 부끄러워한다.

그렇다. 현재는 신자유주의 세대이다.
과거에는 기업 내부에는 연대가 이루어졌으나, 지금은 각자가 모든 주체를 상대로 경쟁하고 있다고 글쓴이는 말하고 있다.
이 절대적 경쟁은 생산성을 엄청나게 높이지만, 연대와 공동체의 파괴, 그리고 군중을 이루지 못한다.

노동자는 성과에 희열을 가진다. 그리고 이내 소진된다. 소진과 혁명은 양립할 수 없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은 체감할 지 모르겠지만 본인은 2020년대에 돌입하면서 더더욱 공동체가 파괴당했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어릴 적에 비하면 이건 공동체라고 할 수 있을까? 친구던 가족이던, 끊기지 않고 가끔 얼굴 한 번 보면 다행인 것이었다.

성과에 희열을 내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https://www.youtube.com/watch?v=X2Rh0pvgITw

200만이 넘는 유튜버도 항상 저출산과 함께 짚는 것이 바로 물질지상주의이다.
저 유튜브 영상의 요지를 짚자면, 가업을 잇는 일본 사람들을 포함하여 인터뷰를 진행한 결과,

'더 돈을 많이 벌 기회가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라는 질문을 할 때, 돌아오는 반응은 '생각해 보지 않았다' 는 것이었다.

그렇다.

우리는 성과에 희열을 느끼고 있다.
모든 것은 전부 금전이라는 가치로 분해되고 있다. 이제는 삶이 패키지 여행이 되어버린 것이다.
얼마짜리 패키지 여행을 선택할 것인가?

계속 진행해 보자.

자본주의와 죽음 충동

이 책의 핵심이 담겨 있는 부분이다.
이 부분만 잘 이해하여도 필자의 생각을 큰 틀로 이해 할 수 있다.

생산은 점점 더 파괴를 닮아간다.
파괴적 성취 강박은 자기주장과 자기파괴를 하나로 합친다. 사람들은 자신을 죽도록 최적화한다.

자본은 Mana( 마법의 에너지에 비유 )와 같다.
자본을 가질 수록 권력을 지니고, 죽음에서 부터 멀어지게 된다. 무한한 자본은 영원한 삶처럼 보여진다.
삶을 죽음으로부터 떼어놓기는 자본주의 경제의 본질인데, 이 떼어놓기가 바로 설죽은 삶을, 산 죽음을 낳는다.
성과 좀비. 인간적인 소음과 냄새가 없는, 살균된 죽음의 방

자본주의에서 많은 자본은 좋은 것이다.
그리고 높은 생산성은 많은 자본을 만들어 낸다. 따라서, 우리는 높은 생산성(=성과)를 추구하여야 한다.
즉슨, 자신을 죽도록 최적화한다는 것이다.

나름 공감도 되고 표현도 경각심을 가질 수 있도록 제시하였다.
다만 무조건 이 의견에 100% 동의하지는 않지만, 현재 사회의 추세가 그런 것은 인정 할 수 밖에 없다.

특히 설죽은 삶과 산 죽음이라는 표현이 살에 와닿았다.
성과를 내려는 사람은 효율을 따지게 된다. 출근길에 고양이를 쓰다듬는 것, 또는 아무 생각 없이 주말에 충동적으로 떠나는 일.
그것들은 효율적인가? 고양이를 쓰다듬느라 낭비되는 시간과 손을 씻고 감염될 확률의 기댓값이,
고양이를 쓰다듬었을 때의 두뇌에 분비되는 긍정적인 호르몬들의 기댓값보다 높아야 할 것 아닌가?

저게 말이 되는 문장이라고 생각하는가?
허나, 표현이 저 모양이라서 그런 것이지, 현재의 효율 추구는 본인을 포함해서 그런 식으로 나아가고 있다.
말 그대로, 인간적인 냄새가 없는 살균실에서 최적의 성과를 얻기 위해 나아간다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기계의 커맨드와 같은 것이 되어 버린다.
참된 죽음은 에로티즘에서 온다. 죽음은 타자 안에서 자기를 잃기이며, 최고로 고조된 삶 충동은 죽음 충동에 접근한다.
허나 자본주의 조직화의 기반은 욕구와 소망이며, 그것은 생산, 소비로 치환된다.
격정과 집약성은 쾌적한 느낌과 귀결 없는 흥분에 밀려난다. 죽음도 부정적이다. 제거된다. 사랑도 욕구로 전락한다.

이런 병에게 치료 효과가 있는 것은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움은 삶에게 멈춤을 명령하고 삶의 쇠퇴를 명령한다.
우리는 죽기에는 생기가 넘치고 살기에는 너무 죽어 있다.

죽음에 대한 우리의 관점은 어떤 관점인가?
죽음은 나쁜 것이다. 우리는 죽음이 오기 전에 얻을 수 있는 쾌적함과 귀결 없는 흥분을 최대화 하여야 한다.

본인의 의견은 아래 챕터까지 합쳐서 본 뒤에 설명하겠다. 바로 이어서,

오직 죽은 것만 투명하다

투명사회는 긍정사회다. 사물이 모든 부정성을 떨쳐 버릴 때, 매끄러워지고 평평해질 때,
자본과 소통과 정보의 원활한 흐름에 저항 없이 편입될 때, 사물은 투명해진다.
행위가 예측 가능하고 통제 가능한 과정에 예속될 때,
행위가 고유한 특이성을 내려놓고 오로지 가격으로 자신을 표현할 때, 행위는 투명해진다.

그림이 모든 해석적 깊이를, 한 마디로 의미를 벗어던지고 포르노처럼 될 때, 그림은 투명해진다.
특유의 긍정성을 띤 투명사회는 같음의 지옥이다.

생각 정리

이제 나의 의견을 하나씩 적어 보겠다.

  • 투명함

우선 투명함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투명함은 곧, 예측 가능함을 포함하여 하나의 Interface라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사람은 쉽사리 행동을 예측하기가 쉽지 않고 사회도 그러하다.
그러나 만들어진 기계는 어떠한가? Rule-Based로 짜여진 프로그램이라면 완전히 투명하지 않은가?
기계의 행동은 예측 가능하고, 복잡도로 설명 가능하고, 그것의 가치를 가격으로 투영할 수 있다. 투명하다.

그러나 여기서 사람은 투명해지고 있다.
앞서서, <격정과 집약성은 쾌적한 느낌과 귀결 없는 흥분에 밀려난다>고 하지 않았는가?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음은 나쁜 것이다. 우리는 죽음이 오기 전에 불쾌한 감각을 최대한 줄이고,
쾌적한 느낌과 귀결 없는 흥분을 최대한 많이 얻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 그러한 이상 삶은 포르노다.

우리의 삶은 빠르게 포르노가 되어가고 있다.
남들에게 보여지는 여행 혹은 행동으로 빗대어 설명 가능하다.
타인의 시선에서 완전히 벗어나는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지금은 역으로 그것으로 자아가 구성되는 듯 하다.

70만원짜리 일본 여행 패키지와 200만원짜리 동남아 여행 패키지는 분명 그 즐거움의 크기가 다를 것이다.
그것은 이해가 될 만 하다. 자본주의란 그런 것이니까 말이다. 우리가 모은 Mana를 많이 쓸 수록 더 결과물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결혼 패키지를 예시로 들자면? 그것도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우리는 삶을 패키지 여행으로 바꾸고 있다.

<전문직 패키지 상품>, <대기업 초반 스타터팩>, <공무원 장기 패키지>, <좋소기업 기본 패키지>

요새 웹툰의 주제를 보면 주인공은 환생을 하고 미래에서 와서 과거의 일들을 다 알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전지전능하다. 이는 <패키지> 로서의 삶을 <초기화> 하려는 기저심리를 포함하여,
그 자체적으로 동류의 웹툰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는 그 웹툰 그 자체가 패키지와 같게 되어 버린 것이다.
젊은 세대 층 사이에서 많이 '소비' 되기 때문에 계속해서 생성되게 된다.

  • 자신의 삶의 투명화

아주 작은 결함에도 몸서리 친 채로, 더 나은 <패키지> 로서의 삶을 원하고자 한다.
이러한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일까? 몇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첫째로, 공동체가 해체되었다.

필자는 어릴적 가족이 나란히 누워서 <지붕뚫고 하이킥> 을 봤던 순간이 기억이 난다.
그냥 가족끼리 풍족하진 않아도 같이 저녁을 먹고 이야기를 하다가 드라마를 보다 잠드는 느낌이 좋았던 것 같다.

그런데 중학교 이후로는 그런 경험을 크게 해 본 적이 없다.
물론 만나서 밥도 먹고 그러지만, 애초에 고등학교 이후에는 학교에 끌려가 공부라는 성과를 내야 했었다.
그래도 고등학교에서는 같이 공부할 친구가 있었다. 그들은 정말 친구였다.

그러나, 현재는?
나이가 들어가며 그러한 의식도 점점 희미해져 간다. 이건 나만 느끼는 것일까?

그렇게 공동체 혹은 의미를 상실한 채 서로에게 의미가 사라진 자신은, 자신의 존재를 눈에 보이는 것에서 찾으려 한다.
즉, 자신은 <어떤 패키지 상품인가?> 라는 것들.

둘째로, 촉매를 통해 빠르게 퍼지는 사상.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가 사람을 망친다는 말은 익히 들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사실은 가치중립적이다. 자신의 일상을 전달하는 것. 어떻게 보면 공동체와 가치를 함께하는 것 같지 않은가?

그렇게 쓰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의 행복은 상대적이다. 즉슨, 위의 삶으로서의 <패키지>를 더욱 더 절실하게 깨닫게 해 주는 촉매로서 작용한다.

과거에도 누구에게나 비교심리는 있었을 것이다.
허나, 모두가 그것에만 매몰되어 살아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자신의 공동체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공동체는 해체되어 버렸다.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매체에서는 은근히 위의 사실을 드러난다. 인생은 물질적인 것으로 정해진다는 듯한 암시를.

마지막으로, 그런 세대에게 안겨지는 양극화

몇몇 유튜브 댓글을 보면, 월 200을 버는 삶과 300을 버는 삶을 적나라하게 해부해서 전시회를 열기도 한다.
눈살이 찌푸려진다지만 자극적이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가죽과 살갖, 뼈를 보며 군중들은 고함을 친다.

"그래도 본인이 만족하는 삶이 좋은 것이다!"
"그런 너부터 결혼생활 그렇게 시작해 봐라"

결국 노력하면서 만족하는 삶을 살면 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면서도,
이 사회의 중위임금, 혹은 그 이하의 삶은 팍팍하다는 것에는 다들 공감대를 형성한다.

그렇다. 누군가에게 주어지는 삶의 패키지는, 팍팍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끝없는 해부와 전시회에 익숙해져 간다.

결국 자신의 살갗에 메스를 대기 시작한다.
자신에게 주어지는 현실에 질곡하는 청년들이 등장하게 된다.

  • 완전히 투명해진 삶은 말이 되는가

"레디메이드 인생이 비로소 겨우 임자를 만나 팔리었구나!"

그렇게 해서, 사회에서의 정해진 길을 걷고,
완전히 투명해진 길을 걷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는 삶이라고 할 수 있는가?
물론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비난 할 자격도 없고 그럴 의도도 없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하였듯 그것은 삶이라기에는 죽어 있다.
적당히 돈을 모으며 결혼을 하고, 그리고 뼈빠지게 일해서 가정을 지탱하고, 그 다음 은퇴 후 노후자금을 걱정하며
안락한 1인실 병동으로 기어들어가는 삶으로 투명해지게 된다면?

그것은 행복하고 기대되는 일인 것인가?

  • 애초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고통받지 않아도 될 텐데

또 최근에 진격의 거인을 정주행 해 보았다.
꽤나 이 책의 맥락을 관통하는 내용을 볼 수 있어서, 엮어봐도 좋을 것 같다.

해당 작품의 지크 예거라는 캐릭터는 반출생주의를 표방한다.
자신이 살아오며 겪은 고통들과 주위에 참사를 겪으며, 결국 그러한 고통은 태어나서 겪는 것이라고 한다.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러한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생명은 무생물과 다르게 증식하며, 증식을 위해 살아가기에 오늘날의 우리가 있다.
이러한 무의미한 행동의 반복이 멈춘다고 하여 무엇이 달라지는가?

무의미한 자극으로 구성된 세계에서는,
행복의 크기보다 고통의 크기가 크다면, 우리는 가감없이 <패키지 리셋> 버튼을 눌러야 하는 것인가?

글쎄.. 반사회적인 입장일 수 있지만 나는 저 주장이 나름 일리가 있게 느껴진다.
따라서 해당 캐릭터의 행보가 더욱 궁금해졌다. 본인의 생각을 바꾸게 될 것인가?

결론적으로 그는 생각을 바꾸게 된다.

그런 그의 생각을 바꾸게 해 준 것은 바로 캐치볼을 하던 추억이었다.
캐치볼을 하기 위해서라면 다시 태어나도 괜찮지 않을까 하며 깨달음을 얻게 된다.

본인의 생각을 고쳐먹게 된 계기가 고작 캐치볼이라니, 그래도 되는 것인가?
나는 그래도 된다고 생각한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을 한다.

논리적인 설명으로서는 오히려 저 논리를 뒷받침 할 뿐이다.
논리의 세계에서는 우리는 정말 무한히 증식하는 무의미한 생명활동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죽으나 마나 정말 아무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캐치볼은 다르다.

결론

  • 반투명

저자가 저렇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나는 아직 그 정도로 우리 사회가 살균실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여전히 각자의 삶의 의미를 추구하고 개성을 가진 개인들이 존재한다. 오히려 내가 더 투명한 쪽에 가깝다.

본인은 투명한 삶이 되는 것이 어느 정도는 인간으로서 행해야 할 의무와도 같다고 생각을 했다.
하고 싶은 것만을 하지 않고, 해야 할 일들을 선택하는 것 말이다.

고생 하더라도 공부를 하고, 현실에 안주하기 보다도 늘상 새로운 것을 찾아야 한다.
그러다 보니 많이 움직인다고 해서 무작정 좋은 것이 아니고, 비용 대비 효율이 좋아야만 한다.
즉슨, 성과가 좋아야 한다. 라는 흐름으로 흘러 가는 듯 하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의 삶은 섣불리 예측할 수 없는 것이라고.

정말 우리는 투명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투명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불투명하기에 투명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어렵게 설명하는 것 같더라도 결국은, 우리는 반투명하다는 것이다.

작중 표현을 가져다 쓰자면,
우리는 성과 좀비라기에는 개성이 충만하고, 격정에 가득 차 있다기에는 칙칙하다.

사회 풍토가 그렇게 흘러가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균형은 어떠한 압력에 대항하여 반발하는 힘을 만들어 낼 것이다.
따라서 저자가 사회의 흐름의 핵심점을 추출한 점은 정말 마음에 들지만, 단정지을 수는 없다.

오히려 아래와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된다.

  • 각자의 캐치볼 / 삶의 아름다움

그럼에도 삶이 팍팍한 것은 사실이다.

죽고 싶도록 본인을 괴롭히는 일이 발생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고,
심지어는 반복되는 쳇바퀴같은 하루하루가 본인의 정신을 갉아먹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요지는 본인만의 캐치볼이 있다는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보내는 시간, 선선한 날의 러닝, 도서관의 종이 냄새, 가을 아침, 숙면 후의 아침, 공학 문제를 해결한 직후의 느낌, 성장하였다는 자각과 어려운 시기를 버텨낸 기분

이것들은 좋아하는 것을 찾아라 혹은 잘하는 것을 찾아라와는 다른 방향의 설명이다.

이것들은 아름다움에 가깝다.

위의 책에서 우리는 죽음을 회피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자본주의는 죽음에서 멀어지려고 한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아름다운 것일까?

핀 꽃은 아름답다. 그러나 지는 꽃은 아름답지 않은 것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점점 수분을 잃고 말라 비틀어 질 테니.

이 책을 읽기 전이었다면, "진다는 것이 핀 꽃에게 아름다움이라는 가치를 부여할 것이다" 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피고 지는 것이 아름답다"

죽음을 기피하는 것이 사람에게 편익을 가져다 줄 것 같은가?
나는 오히려 갖고 있는 것들을 떨어뜨릴까 전전긍긍하는 영혼의 형상이 그려진다.

아름다움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살다 보면 끔찍한 일들도 많이 벌어지고 보기 좋은 일들도 많이 벌어진다.
허나, 그러한 것들의 궤적에는 아름다움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넌지시 그러한 것들을 제시해 주고 있지 않았을까.
만약 이 책의 결론이 그러한 것이었다면,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다.

단지 효율과 성과에도 아름다움이 있다는 말을 하고 싶다.
하지만 그것에 영혼을 파는 것은 어느 정도는 본인도 반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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