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철학을 세우기까지

양정훈·2021년 2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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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철학을 요약한 한 마디

"한 존재가 살아온 길은 그에게는 항상 최선이었을 것이다."

인트로

내가 살아오면서 여러가지 생각들을 거듭해보고, 스스로 생각하게 된 인생의 철학이다.

나는 예전부터 항상 내 존재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보곤 했었다. 나는 왜 이세상에 태어났고, 무엇을 하기 위해 이 세상에 왔는지는 매일 나에게 중요한 화두였었다. 우리 모두가 그것을 찾기 위해서 살아가고, 그것을 찾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살아간다고 듣곤 했었다.

내가 나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항상 찾으려고 했지만, 사실 찾아지지 않았었다. 그래서 어릴적에는 이 이유 때문에 괴롭기도 했었다. 특히 내가 롤모델로 생각하던 스티브 잡스의 생을 보게 되면서 더 그랬었다.

스티브 잡스를 보면 항상 자신의 일에 대해서 열정적이고 미쳐있었다. 그가 지금 내 나이쯤이나, 나보다 더 어린시절에 말했을 것이다. 자신은 이 일을 하는게 너무 좋고, 더 새롭고 사람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꿀 것을 만들고 싶다고 했었다.

나는 그 모습이 너무 신기했었다. 나는 입시를 준비하고 내가 목표로 했던 포항공대가 있었지만, 사실은 힘이 나지 않았다.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뛰고, 계속 하고 싶어진다고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 내가 하던 공부방법은 한계가 있었다. 이과인 나에게 가장 중요했던 수학 성적은 오르지 않고 단조 하향 곡선을 타고 있었다.

나는 그 무렵 스스로를 애매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특출나게 수학을 잘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과학을 잘하거나 컴퓨터를 잘하거나 영어를 잘하지도 않았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사실 국어는 잘했다. 많이 잘했다. 그렇지만 다른 것들의 우선순위에 밀려서 그것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당장 나에게 필요한 것은 저것들인데 그 중에서 어느 것도 독보적으로 잘하지 못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매우 부러웠고, 내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다른 사람이 잘하면 시기와 짜증이 밀려왔다. 왜냐하면 우리는 경쟁해야 했던 존재고 적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나의 한마디를 생각하게 된 시기는 시간이 흘러흘러 화두를 던지게 된건 24살이었다. 그 당시 학교 교양으로 들었던 두가지의 철학 수업이 있었다. 현대 철학의 이해 와 현대 문화론이었다. 교양 필수고 재수강을 위해서 들은 과목들이었다. 그렇지만 그 시기에 그 수업들을 통해서 교수님들과 많은 인터렉션을 거쳤던 것 같다. 항상 수업이 끝나고 나면 궁금했던 화두나 수업 내용 중에 얘기할 것들을 물어보곤 했다. 현대 철학의 이해 수업은 마지막 교시 수업이어서, 교수님과 석계역에 가면서도 얘기를 계속 하곤 했다. 교수님과 얘기를 하는데 생각도 말하고 근황도 말하고 다른 화두들도 말하고 정말 재미있던 순간들이었다.

삶을 바꿨던 주제에 대한 경험과 생각

우리는 모두 세상에 던져졌다

그 두 수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주제들이 몇개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프랑켄슈타인 얘기였다. 프랑켄슈타인은 빅터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만든 괴물에 대한 소설인데, 많은 감독들이 이를 영화화 했었다.

대략적인 내용을 얘기하면 괴물(프랑켄슈타인은 박사의 이름이고 사실 괴물의 이름은 이야기가 끝날 떄 까지 지어지지 않는다)이 프랑켄슈타인 박사에 의해 만들어진다. 전기 자극과 화학 작용으로 시체를 이어붙인 몸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그러나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자신이 만든 괴물에게 공포감에 휩싸이게 되고, 괴물은 그 박사의 외투를 입고 다짜고짜 달아나게 된다.

괴물은 밖을 돌아다니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비난과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데, 그것은 그가 괴물이기 때문이었다. 태어나자마자 존재를 비난받고 부정당하는 괴물 처음에는 당혹스러움을 겪는다. 그리고 사람들을 도와주거나 그저 보기만 했을 뿐인데도 계속된 비난과 분노의 대상이 된다. 이 모든 것을 겪고 난 뒤 괴물은 곧 분노에 휩싸이게 된다. 그리고 입고 나온 외투에 있는 프랑켄슈타인의 일지를 보고 박사가 자신의 창조자임을 알게된다. 자신을 이해할 존재가 필요했던 괴물은 프랑켄슈타인을 찾아가 자신의 반려를 만들어 달라고 요구를 하게 된다. 그러나 이와 관련해서 트러블이 생기고, 결국 괴물은 복수를 하게되며 박사를 파멸시키고 자신도 파멸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우리도 괴물과 궤를 같이하는 면이 있다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생성되었다는 점이다.

우리는 우리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이 아니며, 괴물처럼 세상에 '생성'된다. 아니, 던져졌다고 할 수 있다.

세상에 던져진 우리는 두 가지의 세계로부터의 괴리를 경험한다. 그것은 주관적 관점의 '나'와 거시적 관점의 '나'이다. 이 둘의 느껴지는 차이가 굉장히 심한데, 문제는 둘 다 '나 자신'이고 둘 다 참이라는 것이 문제다.

주관적 관점에서 내가 느끼는 세계는 다음과 같다. 나는 내 세계의 주인공이며,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이나 내가 느끼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체감이 떨어지게 된다. 내가 보는 시야와 세상이 곧 나를 결정하고, 나는 내 삶의 모든 부분을 겪고 컨트롤 한다.

거시적 관점에서의 나는 사뭇 다르다. 나는 세상에 있는 70억이 넘는 수많은 사람 중에 하나이며, 내가 하나 사라진다고 해도 세상의 관점에서는 영향이 미비할 것이다. 객관적인 수치로서의 나는 인간이라는 군체의 아주 작은 일부이며, 내가 없다해도 세상은 돌아갈 것이다.

이것을 보여주는 한 예시이다. 웹툰 금요일의 내용의 짤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과는 조금 다르지만, 그래도 비슷한 감이 있다.





이 이야기들을 봤을 떄, 두 이야기는 중에서 한쪽만을 택할 수 는 없다. 왜냐하면 둘 다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에 나는 이 두 면을 보면서 상당히 곤혹스러웠다. 그리고 반박을 하고 싶었다. 모든 사람은 각자의 삶에서 마땅히 존중받아야 하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결론은 그것과 비슷하지만 다르게 지어졌다.

이 배는 10년 전의 배와 같은 배일까?

저 수업에서 나왔던 또 다른 주제 중 하나가 토탈 리콜 이었다.

미래가 배경인 이 영화는 주인공 퀘이드의 이야기로 시작을 한다. 미래에는 즐거움을 위해서 가공된 기억을 심어주는 리콜이라는 회사가 있다. 단순 노동자인 퀘이드는 지루하고 힘든 삶의 안식을 찾기 위해서 첩보요원의 기억을 심게 된다. 이 기억심기의 조건이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이미 심어진 기억이 있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퀘이드가 이 조건을 위반한 것으로 판명이 나고, 이를 제압하기 위해서 경찰이 오는데 퀘이드는 이 모든 병력을 혼자 제압한다. 그리고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사실 자신은 칼 하우저라는 이름을 쓰는 저항군이고, 독재정권 지도자를 잡아내기 위해 활동하다가 잠시 몸을 숨긴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다시 동료들을 모아서 독재자를 몰아내기를 얘기하며, 실제로 그렇게 이야기가 전개되고 독재 타도를 위해 싸우다가 붙잡히게 된다.

그렇게 독재자에게 갔더니 독재자가 칭찬을 하면서 아주 좋아한다.

사실 또 알고보니 자신은 원래 칼 하우저라는 이름의 독재자 최측근이었는데, 저항군을 잡아내기 위해서 저항군의 기억을 심고 잠입한 이중 스파이였던 것이었다.

(사실 요게 반전인데 옛날 영화라 찾기 힘드므로 그냥 스포했다. 옛날 버전 기준이고 2012년작은 조금 다르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을 알게된 퀘이드는 선택의 기로에 놓이고, 결국 저항군으로 살았던 스스로를 택하며 독재자를 물리치고 해피앤딩을 맞는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또 얘기했던 예시가 배 예시였다.

스스로 생각하고 답을 내려보고, 답을 내린 이유에 대해서 댓글로 말해주면 좋을 것 같다.

좋은 나무로 만든 훌륭한 배가 한 척 있다고 하자. 이름도 지어주자. 이 배 이름은 정훈호다.

  1. 어느날 이 배의 나무 판자 하나가 상해서 하나를 교체 했다. 그러면 이 배는 여전히 정훈호 라고 말할 수 있을까?
  2. 시간이 10년이 흐르고, 그동안 정훈호에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처음에 제작할 때 썼던 정훈호의 부품들은 모두 교체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배이기는 하다. 이 배는 정훈호 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대답을 잘 해봤다면 이제 다음 질문도 답해보자. 아마 느낌이 조금 이상할거다.

  1. 양정훈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군인이어서 매일 전쟁터에 나간다. 어느날은 팔이 다쳐서 팔을 기계팔로 바꾸게 되었다. 그러면 이 사람은 양정훈이라고 할 수 있을까?

  2. 양정훈이라는 사람이 거듭된 전쟁 속에서 팔도 기계로 바꾸고, 다리도 기계로 바꿔서 모든 신체 구성 요소를 기계로 바꾸었다. 그러면 이 사람은 양정훈이라고 할 수 있을까?

  3. 양정훈이라는 사람의 기억장치가 손상되어 다른 기억을 주입하게 되었다. 그러면 이 사람은 양정훈일까?

  4. 토탈리콜의 퀘이드는 본래의 자신인 독재자의 부하 칼 하우저와 같은 사람일까? 퀘이드 라는 사람의 존재는 허상이고 거짓인 것일까? 저항군의 칼 하우저는 거짓인 것일까?

모두 생각 해볼 만한 질문이다.

사실 배 예시는 실제 두 철학자의 견해를 대변한 것이다. 정답은 없다.

바뀌지 않았다고 보는 견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이다. 모든 존재는 그 존재에 본질이 있기 때문에, 어떤 일부가 바뀌어도 본질이 바뀌지 않았으므로 이 배는 계속 정훈호라고 보는 견해이다.

반면에 바뀌었다고 보는 견해는 헤라클레이스토스의 견해이다. 모든 존재는 한 순간이 지날 때마다 다른 존재이다. 다만 변화의 폭이 적을 뿐이다. 따라서 저 배도 처음 바뀌는 순간에 이미 정훈호가 아니다. 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각자가 어떤게 자신의 견해인지는 스스로 선택하면 될 일이다.

나는 매 순간마다 사람은 다른 존재라고 생각을 한다. 변화의 폭이 매우 작아서 일반적인 생활 측면의 편의성을 위해 같은 사람이라고 규정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은 엄연히 다른 사람이며, 우리는 모든 순간의 다른 삶을 산다. 따라서 사람은 아주 짧은 시간 속에서도 무한한 삶의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내가 온전히 나로 살고 있는 시간은 바로 지금 뿐이 된다. 1초전의 나와 지금의 나도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비신곡 - 신이 아닌 세계의 극본

이 수업에서 또 한 가지의 재미있는 화두를 던진 영화를 보게 되었다.

바로 컨택트라는 영화였다. 2017년 작 영화였다.

사비어-워프 가설도 흥미로웠고, 여러모로 생각할 것이 많았던 영화였는데 과제로 이 영화의 감상문을 쓰게 되었다. 아래 링크는 그 당시에 썼던 감상문이다.

La Non Divina Commedia

신곡과 대비를 하여 비신곡이라는 제목을 붙여 감상문을 작성하였는데, 신곡을 알게되면 좀 더 재미있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신곡은 단테라고 하는 시인이 쓴 극본으로, 단테라는 등장인물이 지옥부터 연옥, 천국까지 여행을 하게 되며, 그 군상을 보는 극본이다. 지옥부터 연옥까지는 로마시대의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안내자의 역할을 맡고, 천국은 자신의 짝사랑이었던 베아트리체가 천사의 형상을 하고 천국을 안내해준다.

(TMI지만 말을 하면, 실제로 신곡이 나오기 전까지 지옥의 구체적인 모습을 언급한 작품이 따로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성경을 읽어보면 그냥 지옥에 간다거나 불구덩이에 빠진다 등의 내용만 있다. 그러나 단테는 신곡을 통해서 죄악에{색욕, 식탐, 인색과 낭비, 분노, 이단, 폭력, 사기, 배신} 따른 지옥의 모습을 매우 구체적으로 표현하여 실제로 단테의 신곡이 나오고 나서 교회에 열성적으로 나오게되는 사람들이 꽤 늘었다고 한다.)

내가 이 컨택트에서 주목 한 것은 인간의 삶과 태도에 대한 것이었다. 그것은 위의 감상문을 읽어보면 좋을 듯 하다.

그래서 내가 영화를 보고 생각한 삶의 철학 중에 하나는, 사람은 스스로 삶을 선택하고 긍정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영원히 반복하고 살더라도, 살 수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는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니체의 영원회귀와 운명애와 일치한다.

모든 존재는 항상 자신에게 가장 좋은 방향으로 살아간다

또 다른 수업에서 나는 니체에 대해서 배우게 되었다. 안그래도 좋아하는 철학자 였는데, 니체에 대해서 배우니까 매우 신나게 수업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항상 맨 앞자리에서 수업을 듣다가, 이 수업도 끝나면 교수님과 얘기를 나누곤 했다. 처음에 교수님이 말했던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사실 저는 선생이라고 불리고 싶습니다만, 그 무게에 대해서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저에게 너무 과분한 칭호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교수라는 단어로 단지 교습을 하는 나가는 권위적인 모습으로 여러분들에게 기억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차라리 강사님이라고 불러주시면 서로 강의를 만들어 나가면서 잘 지내보죠.

수업의 내용은 모두 좋았으나, 한 가지 기억에 남는 말이 있다. 수업의 내용에는 연관성이 적은 이야기 이기는 했으나, 나에게는 매우 신선하고 중요하게 들렸다.

그것은 모든 생명은 자신에게 가장 좋은 방향으로 살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항상 100% 자신에게 좋은 방향이 되지는 못하는데, 그 당시 과거의 최선과 현재의 최선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의 지평이 넓어질 수도 있고, 환경이 달라질 수도 있기 떄문에 그 당시의 최선이 현재의 관점에서는 독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듣고 생각하게 되면서 사실 큰 위로와 힘을 얻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동안 항상 나에게 불만족스럽고 스스로의 나약한 태도를 비판하면서 살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에 공부를 더 했었더라면, 더 좋은 대학교에 갈 수 있었을 것이며, 이것은 내가 그때 공부를 안한 내 나태함의 잘못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성적장학금을 못받았던 건, 내가 학점을 던지고 다른 일을 했기 때문이며 이 역시 내 유약함 떄문이라고 생각해왔었기 떄문이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그 당시의 내겐 그게 최선이었다.

내가 방황을 한 것도, 공부를 안했던 것도, 재수를 하며 마음이 힘들었던 것도, 고등학교를 다니며 휴식을 취하는 것에도 죄책감을 가지고 어느 것도 몰입해서 하지 못했던 것도, 그 당시에는 그게 나에게 최선이었기 떄문에 스스로가 그렇게 행동했던 것이었다.

위의 단락의 주제와 결합을 해보니 그게 더 명확해졌다.

내가 지금 하는 후회들을 하지 않는 삶을 살았다면, 그건 '내'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내가 여기 있는건 그 후회들을 하고 지금까지 삶을 그대로 겪었기 때문에 지금의 '나 자신' 이었다.

그러니 내가 매순간 나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니 위로가 되면서 엄청 눈물이 나왔다.

눈물을 펑펑 흘린 후에, 나라는 사람의 기틀이 잡히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겪어온 모든 일들을 그대로 겪어야 지금의 내가 되고, 지금의 나는 항상 최선을 다해 살았기 때문에 여기에 왔다. 매 순간마다 우리는 다른 삶을 살게 되며, 나는 내 자신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지금 뿐이다. 그러니 지금을 살자. 그리고 내가 살고자 하는 삶을 지금 살아보자. 그러면 내 꿈이 진짜 내 삶이 될 것이다.

이 철학을 스스로 정립하고부터 나는 내 주관과 생각에 공리를 세웠음을 알 수 있었다.

아웃트로

현재에서 과거의 내 생각들의 흐름을 보았을 때, 지금 봐도 굉장히 뿌듯하고 기분이 좋다. 내 삶과 철학이 잡히니 다른 사람의 말을 듣되, 스스로 결정을 하게 되었다. 삶의 주인이라는 생각이 들고, 오늘 내가 꿈꾸는 삶을 살려고 하고 실행을 옮기면, 그것은 내 삶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가 태어난 이유는 없지만, 그렇기에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내가 살 수 있는 것은 지금 뿐이며, 살고자 하는 꿈을 살아보려 하자. 어느 순간 뒤를 돌았을 때, 현재의 자신은 과거의 당신이 그토록 바라던 모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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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현실로 만드는 성장형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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