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temp·2021년 7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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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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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스님의 "행복"을 읽고.


Condition of happiness

부와 명예와 가족과 친구는 고통의 원인도, 행복의 조건도 아니다. 어떤 때는 그것 때문에 행복하다고 했다가, 또 어떤 때는 그것 때문에 괴롭다고 한다. 그렇게 양극단을 오락가락해서는 괴로움에서 결코 벗어날 수가 없다.
현재의 자기 삶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 삶이 자유롭고 행복해진다. 그래도, 뭔가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 무작정 앞만 보고 달리던 습관은 멈추어야 한다. 지금, 여기에서 내가 행복해야 한다.
인생에는 정답이 없는데, 이럴까 저럴까 망설이는 것은 그저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처럼, 이렇게 지은 인연의 과보를 기꺼이 받아 들인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도 괴로워하거나 원망할 일은 없다.

If you are wandering between ideal and reality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해라", "가슴 뛰는 일을 해라" 라는 말은 돈과 명예, 안정만을 쫓지 말고 자기 적성에 맞는 일을 찾으라는 뜻이다. 세상에서 좋다고 평가되는 것이 나에게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기 때문에, 자기가 잘할 것 같고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잘나가는 직업'인지 따지지 말고 시작하라는 것이다.

Walk out of the prison of false consciouness

우리가 자기 자신에게 불만을 갖는 것은 뭔가 부족해서라기보다 스스로에 대한 기대가 너무 높기 때문이다. 기대는 높은데 현실의 자기 모습은 거기에 미치지 못하니 못 마땅한 것. 자기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바탕에는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거나 아니면 대단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기대가 깔려 있다. 또 이런 자기의 자아상에 집착해서 자기를 우월하게 여긴다. 그러다보면 어느 때는 남을 탓하며 원망했다가, 어느 때는 자기 자신의 무능력을 한탄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이 좋은 부모, 좋은 환경을 만나지 못해 억울한 마음이 들다가도 그런 자기 자신에 대해 죄책감이 들어 힘들다며 토로하곤 한다. 부모님을 원망하다가도 '그래, 부모님이 나에게 많은 것을 주셨는데 나는 그에 대해 바보같이 원망만 했구나!'하면서 참회했다면, 거기서 끝내면 그만이다. 이후에 자책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좋지 못하다. 자꾸 자기를 질책하다 보면 마음이 우울해지고, 점점 심해지면 우울증에 걸릴 수도 있다.
우울한 생각이 들 때는 머리를 흔들고 생각의 늪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앉아 있을 때 우울한 생각이 나면 벌떡 일어나고, 서 있다가 우울한 생각이 일어나면 움직여서 분위기를 바꾸어야 한다. 목욕을 하든지, 산책을 하든지, 절을 하든지, 육체노동을 하든지 해서라도 우울한 생각에 빠져들 틈을 주지 말고 망상의 늪에서 재빨리 빠져나와야 한다.
때로 우리는 현실의 자기를 자의식이 원하는 수준까지 끌어 올려야 발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자기 자신에 만족할 때까지 너무나 힘들고 어려울 뿐더러, 가능하다는 보장도 없다.
넘어지면 넘어지는 것이 나고, 성질내면 성질내는 것이 나다. 그런데도 나는 쉽게 넘어지거나 성질내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성질 내는 자기를 보는 것이 괴로운 것이다. 내가 생각으로 그려 놓은 자아상을 움켜쥐고 고집하니까 현실의 내가 못마땅한 것이다.
나는 잘났다는 허위의식이 꽉 차있으니까 현실의 자기가 부끄러운 것이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
'나는 이런 사람이 돼야 한다.'
'나는 실수하면 안 된다.'
'나는 미워하면 안된다.'

이런 식의 자기 규정은 모두 허상이다. 머리 속으로 그려 놓은 자아상과 현실의 내가 별 차이가 없어야 정신적으로 건강하다.
인생이 굉장한 것이라고 여기는 허위의식과 자만심이 자신을 괴롭게 한다. 자신감이 없거나 열등의식을 갖는 것은 과대망상에서 비롯된다. 존재라는 게 본래 특별한 의미가 없다.
이러한 의식은 타인에게도 적용이 돼서, 타인을 볼 때도 부족과 만족을 결정 짓는 기준이 되곤 한다. 이러한 허위 의식을 없애고 기준을 낮추는 것 만이 진정한 만족의 기틀이 된다. 뻔한 말이지만,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연습을 해야 스스로에게,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너그러워질 수 있는 것이다.

나도, 타인도, 모든 존재는 그저 특별할 것 없는 다만 존재이지 않을까. 산에 사는 다람쥐, 토끼, 새, 개미, 풀보다 의식 작용이 조금 가미 된 그런 존재.

Method for happiness

자기가 세워둔 기대는 허물지 않고 자꾸만 그 위에 무엇인가를 더 쌓고 얻으려 한다. 이것도 해서 얻고 싶고, 저것도 해서 얻고 싶고, 더 빨리 얻고 싶고.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뜨거운 줄 알면 그냥 놓아버려야 한다. 내려 놓으면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순간 순간 힘들 수는 있어도, 괴로움이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이전과는 다른 지혜로운 사람인 것.

Put down your greed and fill the circle

현실 회피와 내려 놓는 것의 가장 큰 차이점은 같은 문제가 재발하거나, 재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고 싶은 데 해도 되는 일은 하면 되고, 하고 싶지 않은 데 안 해도 되는 일은 안 하면 된다. 하고 싶은 데 하면 안 되는 일은 마음을 내려 놓고 하지 않으려 노력해야 하며, 하고 싶지 않은 데 해야 하는 일 또한 마음을 내려 놓고 해야 한다.
하고 싶은 마음(갈애), 하기 싫은 마음(혐오)를 내려 놓는 것을 '욕심을 버린다'고 한다. 보다 적은 노력으로 큰 결과를 얻어내려고 하는 마음인 욕심을 버리고, 더욱 잘 되려 노력하기 위한 과정 중 하나인 원을 세우는 것이 좋다.

There is also a time difference in relationship outcome

인연 과보는 즉시 나타나는 것도, 열흘 후에 나타나는 것도, 10년 후에 나타나는 것도 있다. 좋은 일을 한다고 당장 좋은 일들만 벌어진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이전의 나쁜 짓으로 인해 뒤 늦게 나쁜 일들도 벌어질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기도를 시작하자마자 바로 좋아지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이다. 모든 기대를 내려놓고 100일을 계속 수행 정진한다면 자신에 대해 더 잘 알게 될 것이고, 1000일 쯤 기도를 하면 다른 사람들도 그 변화를 인지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할 것이다.

Anger, a fuse that has nothing to do with my interior

화는 그저 옳고 그름을 가리려는 분별심으로부터 나오는 감정적 습관일 뿐이다. 옳고 그름에 대한 생각이 분명한 사람일수록 화를 잘 낸다. 분별심이 강할수록 성질은 많이 올라온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사람은 상대적으로 화가 적을 수 밖에 없는데, 주관적인 잣대를 내려놓으면 내가 옳다고 고집할 근거도 없고, 네가 그르다고 비난할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마음 상태에서는 화가 일어날 여지가 없다.
그렇다고 상대가 다 옳다, 다 잘했다고 생각하라는 뜻은 아니다. 아이가 게임에 중독되고, 남편이 술독에 빠져 사는데 무조건 잘했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그 사람이 그렇게 되기까지는 나름의 원인이 있고, 그 원인 뒤에는 그 이전부터 이어져 온 습관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라는 것이다.
감정이란 습관에 의해 형성된 결과물일 뿐이다. 내가 지금 드는 감정은 지난 시절에 내가 뿌린 씨앗이 움튼 것이고, 계속해서 감정을 이어간다면 이는 미래에 좋지 않은 열매를 맺게 할 뿐이다.
진정 현명한 사람은 남에게 상처 주는 것보다 내가 상처 입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안다. 내 안에 스며든 감정은 내가 다루면 그만이지만, 남에게 준 감정은 내가 어찌 할 도리가 없다.

나는 남에게 의도적인 피해를 입히려는 사람이 아니라면, 웬만하면 사람을 내 멋대로 판단하지 않으려 한다. 그 사람도 수십년 간 살아오며 그 사람만의 자아를 확립했을 것이고, 그 사람이 행하는 모든 것에는 그 사람만의 이유가 있을테니 존중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무례하게 군다면 그건 그 사람의 선택이고, 그 사람의 잘못이기에 굳이 내가 별다른 책임을 지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나는 화가 난다면 보통 내 스스로에게 화가 나곤 한다. 내 잘못된 가치관, 잘못된 언행, 잘못된 생각 등.
나는 나의 이런 성향이 싫지는 않지만, 때로는 과도하게 화살을 나에게 돌리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항상 신경쓰며 살아가야 할 것 같다. 이러나 저러나 모든 환경과 일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지려고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뿐더러, 오히려 오만한 것일 수 있기 때문에.

Method that turns past wounds into future assets

  세상에 나를 괴롭히는 사람, 고통에 빠뜨리는 사람, 불안하게 하는 사람은 따로 없다. 그저 내가 과거의 나쁜 기억을 놓지 않고 마음속 깊은 곳에 품고 있어서 생긴 문제다. 그것을 자각하는 데서 상처가 치유되기 시작한다. 원망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감사 기도를 하다 보면 어두웠던 마음이 반드시 밝아진다.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다 행복할 수 있다. 어릴 때 어떤 경험을 했든 그것은 다 지나간 과거의 일이다. 과거의 영상만 틀지 않으면 나는 어떤 순간에도 행복할 수 있다. 살아 있는 지금, 숨이 들어오고 숨이 나가는 이 순간만이 현재이다. 현재에 집중하면 괴로움은 존재할 수 없다.
그 누구도 나이가 들게 된다면,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참이란 지나간 허물을 뉘우침이요, 회란 다시는 허물을 짓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것이다. 후회와는 다르다.

보통 정서적 상태가 안정적일 때는 위와 같이 긍정적인 사고를 잘 할 수 있다.
하지만 불안정해지는 경우 객관적인 진실을 따지기 보다는 닥치는 대로 몰려 오는 감정에 대응하기 바쁘다.
그러니 스스로를 본성적으로 탓 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Anxiety comes from an obsession with the future.

마음은 편한데 왜 혼란스러울까? 옛날처럼 정신 없이 살고 싶으면 그렇게 살아도 된다. 그런 삶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서 놓아버렸으면 이제 편하게 살면 된다.
다만, '이렇게 목표 없이 살아도 괜찮은가' 하고 불안해지는 것은 지금까지 목표를 향해 열심히 달리며 살아온 관성, 즉 오랜 습관이 덜 빠져서 그렇다. 아무리 좋은 담배를 피더라도, 담배를 안 피우는 것 만 못하고, 아무리 좋은 술을 마셔도 술을 안 마시는 것만 못하다. 내려 놓고 안 먹는 쪽으로 가버리면 아무 걱정 없는데 이러한 이치를 깨닫지 못하면 좋은 술과 담배를 볼 때마다 마음이 흔들리게 된다.
친구들이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보고 '왜 나만 세상에 뒤처져서 손해를 보나'하는 생각이 든다면 아직도 습관의 잔재가 남아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사람들이 돈을 태산같이 쌓고 지위를 높여가도 그것이 내가 가야 할 행복의 길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그것을 쳐다보고 불안해 할 이유가 없다. 아무 생각 없이 산다고 해서 인간의 존엄성을 떨어뜨리는 것도, 자연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인생에 목표가 없다고 해서 불안해 할 이유 하나 없는 법이다.
자꾸 '인생에는 목표가 있어야 해' 하고 생각하기 때문에 인생이 괴로운 것이다. 오늘 아침 한끼 배부르게 먹었다면 불안해할 일이 뭐가 있을까? 저녁에 추위에 떨지 않고 잘 곳이 있다면?
'내가 이렇게 살면 미래에는 어떻게 될까?' 하는 미래에 대한 근심과 걱정 때문에 지금 당장 혼란스럽고 불안한 삶을 살게 하는 것이다. 시험 준비, 인생 설계, 건강 문제 등도 모두 미래에 대한 근심때문이다. 이와 같은 불안감을 잠재우려면 내일 할 일은 내일 생각한다는 자세가 필요하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아마 웬만하면 괜찮을 것이다.

다만, 현대 한국 사회에서 먹을 것과 잘 곳이 있다고 안정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생각이 들긴 한다. 2021년 한국에서 먹을 것이 없거나 잘 곳이 없다면 안타까운 일을 겪었거나, 그게 아니라면 사실상 학대와 방치아닌가? 이미 한국사회에서 살아가는 이상 보편적으로 생리적 욕구는 충족된 채로 살아가기에 이로부터 안정감을 느끼는 건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Not a life that is only good for others to see

인생을 살 때 자신의 능력이 100이라면, 많아도 80까지만 알리는 게 좋다.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말고 너무 잘 보이려고 하지 말고 그냥 내 능력껏 하는 게 좋다.

Living  with responsibility makes life empty

인생을 책임감으로 살면 본인은 열심히 산다고 하지만, 돌아보면 인생 전체가 허무하고 공허하게 느껴지기 쉽다. 가정에 대한 헌신이든, 회사에 대한 헌신이든 책임감이 어깨를 무겁게 할 때는 스스로에게 솔직하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 
'회사에 헌신하는 게, 가정에 헌신하는 게 나한테 좋은 일인가?'
나한테 좋은 일이라면 희생하고, 사명감을 갖는 것은 불 필요한 부분일 수 있다. 나한테도 좋은 일인데 내가 희생한다는 생각은 분명 잘못 된 생각일 것이다.

Don't build my happiness on others' misfortunes

경쟁에서 이기면서도 타인을 억누르지 않고, 경쟁에서 지면서도 패배감 없이 사는 길은 목표를 1등이 아니라 2등에 두는 것이다. 이는 성과에 욕심을 내지 말라는 것이지 노력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만약 이런 길을 가지 못하고 경쟁하고 살고 싶다면, 그저 그 과보를 받으면 그만이다. 내가 오늘 누군가에게 이긴다면, 언젠가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질 것이다.
이기려는 마음이 없다면 어디서 누구와 사회생활을 해도 긴장하거나 초조해할 필요가 없다. 무슨 일을 하며 살든 편안하게 일할 수 있고, 구성원들과도 화목하게 지낼 수 있다.

Need, Desire and Greedy

사람은 각자 자기 욕구가 충족되어야 즐거워 하기 때문에 행복과 불행은 모두 욕구로부터 기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자기가 바라는 대로 행동한다면 모두가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욕구를 좇는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나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에게까지 큰 손해를 끼치게 된다. 물론 삶의 동력이 될 수도 있지만.
간단히 욕구의 단계에 대해 생각해보자.

  1. 생존적 욕구
  • 배고프면 먹으려 하고, 졸리면 자는 등의 생존을 위한 욕구
  • 이가 충족되지 않는다면 생존이 위협받기 때문에 스스로 지켜내야 할 권리이고, 사회적으로 보장받아야 하는 욕구이다.
  1. 상대적 욕구 - 욕망
  • '더 맛있는 것을 먹고 싶다', '더 높은 곳을 가고 싶다', '남들보다 더 잘 살고 싶다'와 같은 상대적 욕구.
  • 이는 비교를 통해  생성되는 것으로 정해진 선이 없다.
  • 즉, 끝까지 따라가봐도 영원히 충족될 수 없기 때문에 스스로 절제할 줄 알아야 하고, 사회적으로도 규제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
  1. 지나친 욕구  - 탐욕
  • 과식과 과음을 했다면 그 순간은 만족했을 지 몰라도 몸에는 나쁠 것이다.
  • 이렇게 지나친 욕구들은 모두 자기를 해치기 때문에, 스스로 탐욕을 버림으로써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

검소하게 살고 싶으면서도 돈에 욕심이 자꾸만 생길 수 있다. 다만, 월급이 얼마든 검소하게 사는 것이 좋다. 딱히 필요한 데가 없다면 쓰지 않는 것이 돈을 버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타인의 시선에 비위를 맞추다 보면 불행을 자초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자기 소신대로 살고 싶다면 그냥 내 인생관대로 살다가 평생을 함께하고 싶은 사람을 만나면 결혼을 하고, 그런 사람이 없으면 결혼을 안 해도 된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살면 직업을 선택할 때도 돈 중심이 되지 않을 수 있고, 조금 더 벌려고 무리하면서 인생을 소모하지 않을 수 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인생의 주인 노릇을 할 수 있게 된다.

인생은 자기 좋을 대로, 자기 가치관 대로 살면 되지만, 많은 사람들이 함께 사는 세상인 만큼 타인의 건강, 자유, 이익, 감정을 해쳐서는 안 된다. 이러한 기본적인 윤리 외에는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살아도 되지 않을까.

Individuals is seed and Society is fileds

개인의 마음가짐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남 탓, 환경 탓만 하지, 자기가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책임의식이 너무 부족하기 때문이다. 주어진 현실을 수용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개선하려는 노력도 해야 한다는 것이지 부당한 현실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라는 것은 아니다.
더 이상 '누구 때문에'라고 남 탓하지 말고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조금 만이라도 마음 가짐을 달리 하는 게 좋은 것이다.
만약 자갈 밭에 100개의 콩 씨앗을 던져 2개가 잘 자란다면 살 놈은 사는 것이고, 기름진 밭에 100개의 콩 씨앗을 던져 2개가 죽는다면 죽을 놈은 죽는 것인가? 이러한 문제에서는 씨앗에 모든 원인을 돌리기 보다는 밭을 원인으로 삼는 것이 옳을 것이다. 농사가 잘 되려면 씨앗이 좋아야 하지만, 잘 자라날 확률이 다르다면 밭도 좋아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좀처럼 밭을 한 번에 갈아 엎는 것은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씨앗의 보강(=개인의 수양)을 보다 우선시 해야 하는 것이고, 이는  좋은 밭(=좋은 사회)을 만드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정의로운 사회, 복지사회를 만드는 것은 내 행복과 별개가 아닌 것이다.
같은 환경에 있더라도 개인의 마음가짐에 따라 기분이 달라질 수 있고, 같은 사람이더라도 주변 환경에 따라서 기분이 달라질 수 있는 법이다. 어차피 주어진 환경이라면 내 마음가짐을 바꿔 어제보다 오늘 더 행복해지자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수행이다.
좋아하는 남편과 살면서 20년 넘게 술 먹지 말라고 잔소리 하는 것보다, 변하지 않는다면 '그래 마음대로 해라' 라며 마음가짐을 바꾸는 것이 더 낫다. 하지만, 남편이 20년 내내 술을 먹는 게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가정 형편 때문이고, 그 원인이 사회 구조적인 문제에 있을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남편의 마음을 잘 헤아려서 이해하고 미워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남편이 술 먹을 일이 줄어들 수 있는 사회로 바뀌어야 할 필요성도 있다.

행복은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이런저런 문제에 내가 어떻게 대응하느냐 하는 삶의 자세와 주변 환경이 어떤가 하는 이 두 가지가 함께 맞물려서 오는 것이다. 행복이 오랫동안 꽃을 피우려면 개인이라는 씨앗과 사회라는 밭이 모두 건강해야 한다.

two hunter catch three rabbit

경제와 생산, 그리고 분배의 문제이다. 보통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활동한다면 혼자서 할 때보다 큰 이익이 생길 것이다. 혼자서 1마리 잡는 게 고작이라면, 둘이서는 3마리를 잡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 때, 기본적인 권리로서 서로에게 1마리 씩은 보장해주고 증산된 1마리를 갖고 어떻게 분배할 지 따져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 때 1마리를 요구하는 것은 기본적인 권리(욕구)이며 1~2마리를 바라는 것은 욕망이다. 2마리 이상을 원하는 것은 과욕이고 이는 장기적인 이익 저하로 이어질 것이다.
현재 신 자유주의랑 맞물리며 1명의 엘리트가 수십, 수백, 수천, 수만명을 먹여 살리는 이 시대에 약자의 기본 권리 보장은 물론이고, 강자의 과욕 또한 규제할 필요성이 있다.

하지만 (사회, 경제적 관점에서) 자유와 규제의 밸런스 잡기는 너무나도 어려운 문제이기에..ㅎ 현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약자에 속하는 사람이, 강자에 속하는 사람보다는 훨씬 많기 때문에 강자에 대한 적절한 규제는 필요하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많은 사회 구성원이 언더도그마에 빠지는 것도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

Before blaming others, blame me first

우리는 대체로 일은 조금 하고 수입은 많기를 원하고, 공부는 못해도 좋은 대학에 가고 싶어 한다. 늦게 도착 하고도 좋은 자리에 앉기를 원하고, 잘못을 저질러도 눈감아주길 바란다. 하지만, 입장을 바꿔 다른 사람이 그렇게 된다면 너무나도 억울해 할 것이다.
우리는 보통 내 바람이 이루어지면 다른 누군가는 피해를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좀처럼 하지 못한다. 내가 부당한 방법으로 바람을 이루고 싶다면 그 곳에서 오는 과보를 기꺼이 받으면 되고, 그렇지 않다면 그저 떳떳하게 살아가면 된다.
우리가 무엇을 개선해보자고 할 때, 습관적으로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 그런데, 대개 해보지도 않고 지레짐작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세상에서 할 수 없는 일은 (너무 터무니 없는 게 아닌 이상) 거의 없다.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것이 돈과 출세보다도 더 중요하다면 두려울 게 없어야 한다. 어느 정도 손실과 비난은 감수해야 한다. 그런데 그게 쉽지는 않고, 대체로 도중에 포기하게 된다. 그것은 자신의 삶의 원칙이 불분명하기 때문이지, 삶의 원칙이 분명하다면 주변 환경에 휩쓸리지 않을 것이다.
회사 내 술자리를 좋아하지 않거나, 자신의 원칙과 어긋난다면 술자리를 빠져도 무방하다. 처음에는 분위기가 흐려지겠지만 몇 달, 혹은 일 년 쯤 버티다 보면 알아서 교통정리가 된다. 다만, 모임이 있으면 미꾸라지처럼 싹 빠지고, 승진철만 되면 먼저 올라가기 위해 기웃대다간 미움을 살 수 있다. 승진할 기회가 있을 때 '먼저 가라', '먼저 올라가십쇼' 하고 말하고 2등을 노린다면 전혀 미움 받을 일이 없다. 시간이 지나면, 주위에서도 인정하고 이해할 것이다.
다만 먼저 못 견디고 포기할 뿐.

내 원칙은 지키되, 궂은 일을 찾아서 하고, 한정 된 자리에 욕심 내지 않으면 동료들이 미워하지 않지 않을까(내가 무엇을 해도 미워할 사람들은 제외하고).

Making others happy as well as me

나도 좋고 남도 좋은 삶을 살려면 지혜와 용기가 필요하다. 늘 긍정적으로 생활하면서도 부당한 관행을 보는 순간 '이거 안 됩니다' 하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궂은 일에 솔선수범 하면서도 중요한 순간에는 삶의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남도 행복해야 한다.
세상의 불평등함을 인정하고, 평등을 향해 나아간다면 진보일 것이고 세상의 불평등함을 인정하지 않고 평등을 향해 나아간다면 그건 그저 이상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내 두발은 비록 불평등한 현실일지라도 늘 그곳을 딛고 있어야 하고, 내가 나아가야 할 목표는 평등의 세계를 향해야 한다.  그러면 불평등한 현실에서 한 발 한 발 평등한 세상으로 나아가는 과정에 놓이게 된다. 이런 관점을 가져야 꿈이 있으면서도 현실적인 인간이 될 수 있고, 더 나아가 현실 속에서 꿈을 실현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이는 불평등한 현실 속에서 고통스럽게 머무르기만 한 사람이나, 혜택만을 받아온 사람보다 좋은 위치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자기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게 먼저이다. 사회 변화를 위한 활동도 먼저 나에게 보람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결과에 상관 없이 행복할 수 있다. 그런 다음에서야 사회 변화를 위한 활동을 할 때 파급력이 더욱 클 것이다(또한, 시도 조차 할 마음이 들 것이다).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면서 사회 운동도 하고 타인의 부조리함에 구호도 외칠 줄 알아야 한다. 물론, 결과는 엄청나게 천천히 나타날 것이다.
희생보다 더 좋은 것이 자리이타("내가 너를 돕는 것이 나한테 좋다"라는 마음가짐)이다. 자기를 이롭게 하는 '자리'와 남을 이롭게 하는 '이타'가 둘이아니라는 뜻이다.

여전히 나는 사회운동과 거리가 멀고, 흔히들 하는 국민청원 또한 잘 하지 않는다. 특정 사건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습관이 안 갖춰진 것은 차치하고, 그냥 크게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이런 내 성격적 특성은 개선을 조금 해야하지 않을까 싶긴 한데.. 모르겠다.

Method to make tommorrow better than today

이미 지은 인연의 과보는 기꺼이 받아들이되 그 과보가 싫다면 다시는 그런 인연을 짓지 말아야 한다. 그 다음에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을 찾아서 제거해나가야 한다.
협상에서는 언제나 항상 유리한 쪽, 조금이라도 더 힘이 있는 쪽에서 먼저 양보를 해야 실마리가 풀린다. 양보와 포용은 굴복과 굴욕이랑은 다르기 때문이다.

이미 일어난 현실을 인정하고 긍정적으로 갈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 가야 하는데, 이미 일어난 현실에 대해 내 도덕적 기준에 따라 판단하기 때문에 다툼이 일어나는 것.

Post script
법륜 스님이 최근 한국 사회에 적합한 가치관을 지닌 인물은 아니라는 비판은 많이 존재해왔다. 특히 남성 역차별 논제에 대해 여성이 오랜 기간 핍박을 받아 왔으므로 현재 남성들이 과거의 죄를 물려받아야 한다든지, 남자로 태어난 죄라고 생각하라든지 등의 발언도 있었고 말이다.
다만, 법륜스님이 이전부터 해왔던 말들에는 항상 일관성이 있었다(심지어 옛날엔 여성차별로도 논란이 생긴 적도 있었다).
법륜스님의 말은 결국 자신을 되돌아보고 상대방에게 한 발 양보를 하라는 것이기에, 발언이 조금 직설적이여서 논란이 생겼을지언정, 그 말 안에 담긴 진의까지 그르다 생각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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