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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mp·2021년 8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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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all talks while reading The Tyranny of Merit - Michael Sandel

Why is merit important?

사회가 능력에 따라 경제적 보상과 지위를 배분해야 한다는 생각은 몇 가지 이유에서 매력적이라 할 수 있다.

  • 능력 우선 채용에서 '바람직하다'고 본 효율성과 공정성의 원칙화
  • 노력과 선도적 시도, 재능에 후하게 보상하는 경제체제는 분배주의  또는 정실주의로 사회적 지위에 따른 차등 보상을 진행하는 사회보다 생산적일 것이고, 공정할 것이다.
  • 우리 운명이 우리의 손 안에 있다는 것, 내 인생과 성공은 내가 헤쳐나갈 수 있을 거라는 믿음, 그리고 우리가 상황의 희생자가 아니며 재능과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높이 오르고 꿈을 이룰 수 있는 존재라는 것.

즉, 능력주의 원칙은 자유를 강력하게 옹호하며, 각자 스스로 필요한 것을 정당하게 얻을 수 있도록 한다.

다만, 사회가 이 원칙에 따르지 못할 때 뿐만 아니라, '누구나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될 수 있고 자수성가 할 수 있다.'라는 믿음은 견디기 힘든 부담을 준다.
이러한 믿음은 분명 사회 구성원 각자가 행동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지도록 하는 측면에서는 바람직하지만, 그것은 어느 정도까지 일 뿐 각자가 삶에서 주어진 결과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우리 삶에서 주어진 결과'는 어떤 운명이나 우연, 신의 섭리 등에 따라 주어진 것이지, 우리 스스로의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다. 이는 개인의 능력과 선택을 넘어 은총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직업과 능력은 스스로 얻는 것인가? 아니면 주어지는 것인가?

한국 내 현실을 바라봤을 때 위의 사상이 아예 틀린 것은 아니라고 본다. 하지만 그 사상이 어느 정도 옳다고 할지언정 개인의 인생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세상의 불공정함에 대해 불만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그런 사상이 그저 냉혹한 현실을 강화시키지 않을까. 불공정한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을 해내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Cosmic meritisim

인간의 능력에 대해 한껏 강조하며, 불운한 사람들에 대해 둘 다 냉혹하다. 혹은, 능력주의적 사고방식은 불운을 겪는 사람에게 냉혹한 태도를 부추긴다. '오죽 제대로 못했으면 저럴까' 하는 의심이 짙어진다.

과연 고통과 고난이 죄의 표시일까.

때로 신은 능력주의 가설을 부정함으로써 희생자를 단죄하는 잔인한 논리를 부정한다. 발생하는 모든 일이 사람의 노력과 의지로 행해지는 것은 아니며, 그 일들이 항상 사람의 행동에 대한 보상이나 처벌로 이어지지도 않는다. 우주를 인간주의적인 관점으로 바라보기에 인간은 너무나도 나약하며, 신의 뜻 역시 이해할 수도 없다.
창조의 위대함과 신비로움을 받아들여야지, 각 개인의 능력이나 성과에 따라 상/벌 피드백이 있으리라 기대해선 안 된다.

Salvation and self-salvation

'신은 정의롭다', '신은 전능하다', '악은 존재한다'는 병립하기 힘든 명제로 여겨지고 있는데, 이러한 난제를 해결하는 방법 중 하나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는 것이다.
신앙이 외적 행동으로 표현되고 교회의 복잡한 예식들로 전달, 강화될 때, 감사와 은총의 신학은 피치 못하게 자부심과 자기 구제의 신학으로 미끄러져 내린다. 11세기 이전 아우구스티누스가 능력에 대한 구원론을 비난 했듯. 
마틴 루터 경에 있어서 구원받을 자의 선택은 오로지 주어지는 것이며, 개인의 노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야 하는 존재였다.
신에 대한 믿음이 퇴보하면서 인간 능력에 대한 신뢰가 힘을 얻었다.

결국, 은총 앞에서 느끼는 무력감이 주었던 겸손함은, 이제 자기 자신의 능력을 믿는 데서 나오는 오만으로 대체되지 않을까.

Providence of now and past

성공과 실패는 자신의 손에 달려있다는 믿음 이면에 '성공할 사람은 그럴 만해서 성공했다' 라는 신념이 중요한 포인트이다. 그런 승리주의적 측면에서 분명 승자들 사이의 오만, 패자들 사이의 굴욕을 자아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운 좋은 사람은 운이 좋다는 사실에 만족하는 경우가 드물다'

그러한 사람들은 자신이 그런 행운을 가질 권리가 있다는 것을 납득하고, 확신하고 싶어한다.

자기 통제, 자수성가의 윤리는 복음주의 개신교에서 나왔다고 본다고 한다. 자기 통제의 문화는 기독교적 섭리론을 뽐내며 저속하게 구는 형태로 지속된다. 이것이 두 세기 동안 미국 도덕성의 근간이 되었고, 이제는 종교적인 용어보다는 기술관료적인 용어로 기술될 뿐이다. 섭리론에서 세속적인 성공에 신성함을 부여하고, 우리가 신의(또는 '진화의') 계획 중 일 뿐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인 체제를 운영하는 우리 스스로의 계획 중 일부이기도 하다는 그럴듯한 설명을 하고, 그런 관점을 심지어 국제 분쟁에까지 적용하는 모든 태도에는 분명 오만함이 깃들어 있다.

번영 복음의 매력 중 하나는 그것이 '자신의 운명에 대해 자신의 책임'을 강조하는 데 있다. 세속적으로 말하면, '사람들에게 충분한 노력과 믿음만 있다면 부와 건강을 이룰 수 있다'는 확신을 주는 것이다. 모든 능력주의 윤리처럼, 개인의 책임을 극찬하는 그 개념은 일이 잘 되어갈 때는 기꺼워할 만 하다.
하지만, 반대로 일이 잘못될 때는 개인의 사기를 꺾고 심지어 자책에 시달리게 만든다.
이는 경제뿐만 아니라 건강에도 해당하는데, 이런 생각을 가진 상태에서 병에라도 걸리게 되면 개인으로의 믿음마저 저버린다는 것이다.

번영이 구원의 증표라면 고난은 죄의 증표일 것이다.
이는 건강보험의 문제에도 관련되어 있는데, 본인의 몸은 본인이 알아서 챙겨야 하는가? 즉, 개인의 책임을 따르는가? 하는 자유 방임주의와도 크게 맞닿아 있다.

실제로, 미국에서 주로 발생하는 심장병, 암, 뇌졸중, 당뇨병, 비만 등에 들어가는 보험료가 70퍼센트에 이르고, 이 문제들은 식습관 관리, 운동, 금연 등 개인적인 노력으로도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다. 이에 따르면 건강을 해치는 사람들 다수는 그 누구도 아닌 자기 탓을 해야 한다.

이런 능력주의적 오만은 번영 복음주의 보수파와 자유지상주의적 복지국가 반대론자들 사이에서만 보이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진보 정치계에서도 2016년 힐러리 클린턴은 '미국이 위대한 까닭, 미국이 선하기 때문입니다'라는 표현을 자주 썼다. 즉,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하겠다'라는 것이다. 이는 트럼프의 난폭함과 졸부 기질과는 맞지 않다는 프레임을 은근하게 보여주기 위함이다.
하지만, 이러한 말은 미국이 세계에서 뭔가 신성한 의무를 띠고 있고, 세계를 민주주의 실현에 안전한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운명을 부여 받았다는 오래 묵은 신념과 짝을 이룬다.

Manifest Destiny : 19세기에 유행한 관념으로, 우월한 백인들이 인디언 등을 굴종시키고 아메리카 대륙을 정복하는 것은 신이 정해준 명백한 운명이라는 사상

이 나라에서는 어떻게 생긴 사람이든 어디서 온 사람이든 성씨가 뭐든 어떤 실패를 겪었든 따지지 않는다. 이 나라에서 열심히 일하기만 한다면, 책임을 다하기만 한다면 성공할 수 있다. 위로 올라갈 수 있다. 정녕 기회만 평등하다면.

모든 대통령들의 주된 담론이였던 사회적 상승 담론은 능력 주의 윤리와 한 데 엮이게 된다. 

1960-1970년 대 영미 철학자들은 능력주의를 배격했다. 시장에서 개인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우연성(개인의 재능에 대한 수요나 그 재능의 희귀성 정도)에 따르기 마련이라는 근거에서였다. 하지만 1980-1990년 대 '자기 책임의 담론'을 반영하는 집단이 다시 능력주의를 들고 나왔다. 그들은 자신의 불운에 책임져야 할 사람과 단지 운이 없었던 사람을 구별해야 한다면서 말이다.  즉, 자신의 곤경에 대한 책임이 없는 사람만이 정부 지원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보았다.

Counter of Populism

능력주의 엘리트에 대한 포퓰리즘적 반감이 트럼프 당선과 그 해 초 영국에서 이루어진 브렉시트 표결에 일정한 역할을 했다고 믿을 이유가 존재한다고 한다.
트럼프와 브렉시트, 그리고 다른 나라들의 포퓰리스트 정당들에 표를 던진 많은 노동계급 사람들은 사회적 상승에 대한 약속보다는 국민 주권 원칙의 재 확인, 국가 정체성과 국가적 자존심 등의 강조에 동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시장 주도적인 세계화를 환영하면서 그 이익 대부분을 챙기고 노동자들을 외국 노동자들과의 경쟁에 내몬 장본인들, 동료 시민들보다는 세계 각지의 엘리트들과 더 가까워 보이는 능력주의 엘리트, 전문가, 전문직업인 계층에 대해 분노를 표출한 것이다.

물론,  기존 질서에 대한 포퓰리즘 적 분노가 능력주의적 오만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은 아니었고, 외국인혐오증, 인종주의, 다문화주의에 대한 적대감 또한 한 몫 했다.

다만, 이런 포퓰리스트들의 불만은 근거 없는 것이 아니다. 수십 년간 능력주의 엘리트들은 '규칙을 지키며 열심히 일하는 자는 누구나 자기 재능이 허용하는 한도까지 성공할 수 있으리라'라고 주문을 외워댔다. 이들은 바닥에 묶여 있는 사람들, 또는 물 밑으로 가라앉지 않으려고 발버두이는 사람들의 사정을 챙기지 못했다. 그들에게 사회적 상승 담론에 관한 주문은 약속이 아닌 그저 조롱일 뿐이었다.

사실 이러한 사회적 상황이 현재 2021년 한국과 유사하다고 보진 않는다. 극심한 능력주의사회라 하기엔 한국의 정인지, 감성인지, 그것도 아니면 집단주의 정서인지, 그러한 것들이 가만 두지 않는 상황이지 않을까.
다만, 멀지 않은 미래에 한국도 미국과 같은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될 것이라 생각한다. 개인주의의 확산, 미래 산업 변화로 인한 경쟁 심화, 저숙련 노동자 도태(이에 대해선 조심스레 다룰 필요가 있지만) 등으로 인해.

트럼프 지지자들에게 있어서 진보파의 사회적 상승 담론에 짜증을 내는것은 능력주의를 배격하기 때문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기존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쪽으로 귀결될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런 담론의 원칙에는 공감했고, 각자의 능력에 대한 혹독한 평가가 필요하다는 점도 받아들였다.

능력주의의 폭정은 사회적 상승의 담론 그 이상의 것들에서 비롯 된다.

  1. 노골적인 불평등이 이어지고 사회적 이동성이 가로막힌 상황에서는 '우리는 스스로의 운명에 대한 책임자이며, 우리가 얻는 것에 대한 책임을 갖는다'라는 메시지가 사회적 연대를 약화하며, 세계화에 뒤처진 사람들의 사기를 꺾을 것이다.
  2. 대학 학위가 그럴 듯한 일자리를 얻고 품격 있는 삶을 살기 위한 기본 조건이라는 주장은 '학력주의 편견'을 조성하며, 그로써 노동의 명예를 줄이고 대학에 가지 않은 사람들의 위신을 떨어뜨린다.
  3. '사회적, 정치적 문제들은 고도의 교육을 받고 가치중립적인 전문가들의 손에 맡길 때 가장 잘 풀릴 수 있다'라는 생각은 민주주의를 타락시키고 일반 시민의 정치권력을 거세하는 상황을 초래한다.

Would 'Just do it' right?

미국 내에서 사회적 상승에 대한 흔한 믿음에 반해, 가난뱅이가 부자 되기도 훨씬 어렵다. 단지 하층민의 1/3만이 중위층 이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데, 이는 중국, 덴마크, 독일, 스페인, 일본, 스웨덴, 핀란드 등보다 낮은 수치이다. 

여기서 하층민, 중위층이란 상대적인 개념이 아닌 절대적인 개념이라 생각한다.

미국이 다른 많은 나라들보다 더 불평등할 뿐 아니라 이동성도 덜하다는 사실을 알면 충격과 당황에 빠지게 된다. 혹은, 어떤 사람은 사회적 이동성 지표를 애써 부정하며 '나 때는 말이야. 힘써 노력만 하면...' 이라는 식으로 개인 경험에 집착한다. 어느 보수적인 대학생은 자기 경험상 노력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주장하지만, 분명 다른 뒷받침 또한 있었음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물론, '재능과 노력이 허용하는 한 상승할 수 있다'는 믿음은 분명 사회적 흐름과 조화를 위해 '고귀한 거짓말'로서 여길 필요도 있다. 하지만, (유럽과 정 반대의 흐름으로) 이러한 믿음과 사회적 계층 이동의 방향은 정 반대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후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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