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 먼저: 재입사한다는 이야기 아님)

Story 1. 입사 직후의 회사 합병

내가 다닌 회사는 디자인 에이전시로 시작했다. 기업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사회와 환경을 생각하고, 디자인이라는 도구를 통해 심미적이지만 강한 메시지를 던지는 곳이라는 인상을 준 곳이었다. 어떤 때는 자체 리브랜딩을 진행한 과정을 샅샅이 블로그로 보여주었는데, 스스로를 명확히 조사하고 판단하기 위해 애쓰고 그것을 디자인으로 구현하는 모습이 아주 사려깊게 느껴졌다. 2016년, 나는 그 회사의 첫 번째 에디터로 입사했다.

3개월쯤 지났을까. 합병설이 들리기 시작했다. 머지 않아 정말 합병을 했다. 상대 회사는 내가 입사한 회사와 비슷한 미션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그곳의 수단은 디자인이 아닌 기술이었다. 회사를 창립한 분은 과거 다음의 아고라 서비스-약간의 과장만 더 하자면 현재 국민청원 웹사이트의 모태가 되는 듯한-를 개발한 분이라고 했다. 와, 근사하다. 그렇게 나는 입사 3-4개월 후부터 합병 기업을 다녔다.

합병한 회사는 서로의 새로운 엔진을 달고 달렸다. 업계에서는 신선한 충격이었고, 많은 분들의 응원과 비즈니스 요청이 있었다. 나는? 혼돈이었다. 사정을 모르는 일개 구성원으로서는 이런 저런 조직개편이 왜 일어나는지, 왜 이 분의 이야기와 저 분의 이야기가 다르며 뭐가 맞는지, 합병이 어떤 통합을 실제로 가져다 준 건지 알기가 쉽지 않았다. 디자인 기반의 회사와 기술 개발 기반의 회사는 그 성격이 정-말 다르다는 것 정도를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Story 2. 그때 개발자 대표님이 얘기하던 게 이거였구나

요즘 나는 데잇걸즈라는 커뮤니티 안에서 학습하고 있다. 아주 오랜만에 느끼는 순전한 배움의 감각, 일의 마감이 아닌 학습부채가 주는 적당한 압박, 함께 배우며 시도해보는 새로운 경험들이 나를 감싸고 있다. 화려한 조명보다 현란하게... 환경이 다르다보니 전과는 다른 정보들도 얻게 되는데, 사실 오늘 발견한 한 콘텐츠가 이 글을 쓰게 했다. 일부 발췌다.

"대부분 신생 기업, 특히 웹 문화(web culture)를 기반으로 설립한 스타트업들에게 개방형 혁신은 '제2의 본성'과 다름 없다. 하지만 기존 기업들에 개방형 혁신은 명확하게 이해하기도 힘들며, 심지어 잘못된 것으로 여겨지기 쉽다. 단적인 예로 지적 재산권에 대한 태도를 비교해 보자. 기존 기업들에게 지재권은 특허로 당연히 보호돼야 할 대상이다. 하지만 많은 신생 스타트업들은 지재권이 없어져야 할 대상이라고 여긴다. 시장 상황이 너무 빨리 변하기 때문에 특허도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크리스 앤더슨, 전 와이어드 편집장이자 3D로보틱스 대표)

'기존 기업들에 개방형 혁신은 명확하게 이해하기도 힘들며'

그렇다. 개방형 혁신이라니 웬 느낌적인 느낌 같은 말인가. 그런데 개발자 출신 대표님은 이런 느낌(?)의 단어를 많이 쓰셨다. 팀장급 회의에서는 '오픈 OOO'과 같은 말도 종종 언급하며, 조직의 여러 부문을 오픈소스화 하는 방안에 대한 논의도 있었는데 사실 나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은 대체 어떤 의미이고 지금 나의 일과 무슨 상관인가'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다. 부끄럽게도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대체 그 의미가 무엇이냐고 대표님에게 묻지도 못했다.

'기존 기업에게 지재권은 특허로 당연히 보호돼야 할 대상이다. 하지만 많은 신생 스타트업들은 지재권이 없어져야 할 대상이라고 여긴다.'

회사에서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편집 디자인을 통한 인쇄물을 만들 때는 계약 시 2차 저작이나 디자인 사용권에 관한 내용이 종종 따라 붙었다. 창작의 영역에서는 지켜야 하는 중요한 권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커뮤니티 기반의 웹 플랫폼이 넘쳐나는 때에, 한쪽에서는 정 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당장 나만 해도 엊그제 CSS를 배웠고, 나의 조악한 그리드 대신 오픈소스로 공개된 유려한 템플릿을 공짜로도 갖다 쓸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대충 알던 걸 명확하게 알았다. 아, 엄청나고 조용한 이 발견.


Story 3. 나는 왜 몰랐을까

(급 청승 느낌 주의)
솔직히 창피하다. 전에 더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던 점이. 나는 따지자면 내가 기술 개발 파트보다는 비디지털 분야의 기획, 콘텐츠, 디자인 사업부 소속이기 때문에 다른 파트의 이야기는 잘 몰라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뭐랄까 당장 수정하고 작업해야 하는, 손에 잡혀도 너무 잡히는 내 과업과 달리 저쪽에서 하는 얘기는 상당히 뜬구름 같았다. 지금은 안다. 그 부분이 세상, 특히 비즈니스 전체를 놓고 봤을 때는 아주 큰 현상이라는 것을.

한편으로 다행스럽고 감사하기도 하다. 스스로 기특하다. 새로운 학습에 도전하고, 그 학습의 환경을 통해 대충 알던 것도 전혀 다른 느낌과 감각으로 인식하게 된 것에 만족한다. 지금은 나 자체가 개방형 혁신을 추구하는 편이고, 이러한 상태를 계속 유지하고 싶다는 점도 다행스럽다. 그러니 앞으로 더 잘하면 된다.


Story 4. 앞으로 이런 걸 놓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슬픈 인용 하나 더 기록해둔다. 어쩌면 내 변명용이다.

내가 보기에 한국에서 스타트업이 활성화되지 않는 이유는 일을 너무 열심히 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렇게 본업에 매여 있다 보니, 그것이 사람들의 에너지를 모조리 고갈시켜 다른 일을 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하는 것 같다. 또 다른 이유는 한국의 경기 상황이 여전히 좋기 때문일 수도 있다. (당시 2015년) 많은 경우 경기 침체가 심화될수록 창업이 늘어난다. 하지만 한국에는 언제나 기존 기업들이 제공하는 일자리가 있어서 창업이 더딘 것일 수도 있다.
(크리스 앤더슨, 전 와이어드 편집장이자 3D로보틱스 대표)

일을 너무 열심히 하지 말자. 대충하자는 의미가 아니고, 현재의 일에 너무 매몰되어 큰 그림을 놓치지 말자는 의미로 지금에 내게 해석된다. 한때 나는 정치라는 큰 세계와 경제라는 큰 세계가 서로 결탁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노동자가 너무 심하게 일을 해서 정치에 관심이 없어지게 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한 달 중에 15일을 귀가하지 못한 경험이 있다. 그 즈음의 생각 같다.) 아무튼 '너무 바빠서'라는 핑계로 봐야할 것을 보지 못하는 건 결국 내 손해고, 내가 속한 조직의 손해라는 걸 안다.

크리스 앤더슨은 마지막으로도 '리스크를 감수하고 두려움 없이 커뮤니티와 협력하기로 결정한다면 혼자서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한국 기업뿐만 아니라 개별 한국인(=나)에게도 매우 유효한 조언이다. 현재의 학습 커뮤니티에서 좀 더 많이 연결되고, 물어보고, 부딪히고, 적극적으로 배우면 그게 우리의, 곧 나의 역량이 되리라 믿는다.

회사 이해로 시작한 콘텐츠를 이런 ... 알 수 없는 다짐으로 마무리한다. 오늘의 길었던 TIL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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