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공자의 회상

후추·2023년 5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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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지 잘 버리는 편이다. 필요 없는 물건이 공간을 차지하는 게 싫어서다. 얼마 전에는 안 읽는 책들을 정리했다. 모아보니 상자 하나를 가득 채웠는데, 소설책부터 교양 수업 교과서까지 그 종류가 다양했다. 모두 중고서점에 내다 팔거나 폐지로 버렸다. 정리하고 나니 책꽂이가 한결 가벼워 보였다. 기분이 상쾌했다.


하지만 어떤 책들은 기어이 버리지 못했다. 책꽂이 한 켠을 가득 메운 경제학 책들이었다. 오랜만에 펼쳐 몇 장을 넘겼다. 이제는 내용이 가물가물한데, 꾹꾹 눌러쓴 필기와 밑줄에서 지난날이 다가왔다. 이상하게 가슴이 먹먹했다.


경제학을 좋아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경제학과를 지망했고, 원하던 학과에 진학해 4년의 시간을 보냈다. 경제학은 세상을 표현하는 도구였다. 화가가 연필과 붓으로 세상을 그리듯, 나는 경제학으로 세상을 그렸다. 사회 현상을 수와 그래프로 나타내고 경제학 이론으로 묘사하기를 반복했다. 무척 벅차고 설레는 일이었다.


진로를 고민할 때 경제학을 우선순위로 꼽았다. 가능하다면 내 경제학이 다른 이의 편의를 높여주기를 바랐다. 고민 끝에 금융공기업을 목표로 정했다. 기업에서 금융 시장의 안정을 도모하는 일이 바람을 충족시켜 주리라 생각했다. 취업 준비를 위해 학교 금융고시반에 들어갔다. 두꺼운 경제학 책에 둘러싸여 종일 문제를 풀며 살았다.


수험생활은 고됐다. 웃음을 잃었다. 오직 시험을 통과하기 위한 경제학이 스트레스 요인이 됐다. 어느 날부터 소화 장애를 앓았다. 불면증이 찾아와 밤에 잠들지 못했다. 몸과 마음이 지쳐갔다. 뜬 눈으로 기숙사 방 천장을 바라보던 밤, 어디로 가고 있는지 스스로 물었다. 아무런 답을 할 수 없었다. 두렵고 외로웠다.


그러던 중 프로그래밍을 만났다. 경제학 빅데이터 분석 수업을 들었는데 파이썬 코드와 딥러닝 모델을 다뤘다. 몇 줄의 프로그래밍 코드가 복잡한 계산을 단숨에 끝냈다. 경이로웠다. 마음속에 새로운 씨앗이 싹을 틔웠다. 프로그래밍을 배워보고 싶었다. 고시반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밤, 노트북 앞에 다시 앉아 새벽까지 프로그래밍을 공부했다. 모두가 잠든 시각 낯선 세계를 향해 은밀히 나아가고 있었다.


경제학을 완전히 그만두고 프로그래밍에 올인하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경제학은 좋아하고 익숙한 분야였다. 경제학을 뒤로하고 불확실한 세계에 발을 내딛기 무서웠다. 개발자로 실패해서 굶어 죽어도 괜찮겠냐는, 교수의 모진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 다음에야 경제학 책을 덮었다.


시간이 흘렀다. 지금은 우아한테크코스에서 개발자가 될 준비를 한다. 이제는 경제학이 아니라 코드로 세상을 그려본다. 내 코드로 풀어보고 싶은 세상 속 문제가 보인다. 가능하다면 내 코드가 다른 이의 편의를 높여줄 수 있기를 바란다.


종종 경제학을 포기했던 갈림길에 선다. 그리고 다른 우주의 나를 상상한다. 여전히 경제학을 공부하고 있는 주찬민이 어디에선가 살고 있을 것만 같다. 나는 내 우주에서 개발자로서 안녕하다. 경제학을 공부하는 그도 안녕하기를 빈다.

1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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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 17일

멋진 선택! 잘 나아가고 있군요~
당신의 앞날을 응원합니다^^

feat. 경제학을 포기 못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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