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주의 노래를 다시 해보자.

Felix Yi·2020년 5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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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노래는 언제나 부르고 싶다. 그러니 한번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말해보자.

실존주의 위키백과내용을 하나씩 인용하고, 그 예시를 마중물 삼아 노래를 불러보자.

'실존(existence)'은 원래 이념적인 본질(Essence)과 대비하여 상용되는 철학용어로서 '밖에' '서 있는(Sistere)' 현실적인 존재를 의미한다.

이상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생각이나 견해(이념)와 대비되는 용어가 실존이다.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30살의 모습은, 집은 몇 평, 차는 어느급 자산은 얼마 모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다면,이것은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는 성질이나 모습을 규정하는 말이다. 인간의 본질에 대한 이념을 규정한다.

인간의 본질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 중에 특정한 성질만으로 이념을 만들면 꼰대스러움이 만들어진다. 여자는 이래야해, 남자는 이래야 해, 20대 남자 대학생은 이래야 해, 군대 이등병 신입은 이래야해. 인간은 이상적인 본질을 따라야 해. 만취한 무방비 여자를 눈앞에 둔 남자는 이렇게 되어야 해. 남자가 어떤 행위를 취하면 그 앞의 여자는 이래야 해.

이념이 만들어지는 이유는 '생존'을 담보하고자 할 때다.

  • 돈이 없으면 굶어 죽을까 한다 -> 굶어 죽기 싫어 ->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
  • 유전자가 끊기면 사회가 망할까 한다 -> 인구 멸절 싫어 -> "인간은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아야 한다"
  • 친구가 없으면 외로워 죽을까 한다 -> 외로워서 죽기 싫어 -> "친구는 꼭 있어야 한다" -> "너무나 싫은 사람이더라도 외로울까봐 붙어있고 고통을 견딘다"

구체적으로 우리는 이미 수많은 이념 속에 살고 있다.

  • 식탁에 누가 총들고 오면 죽을 지도 몰라 -> "테이블에는 흉기가 될만한 것들을 상대에게 보이도록 펼쳐 놓자" -> 흰 식탁보에 날카로운 쇠붙이를 잘 보이게 늘어놓음.
  • 저사람이 기분 나쁘면 나에게 위해를 가할지도 몰라 -> 웃는 얼굴을 하자. 먼저 위해를 가하지 않는 다는 것을 증명하자. 그럼 그도 나에게 그걸 돌려줄 거야. -> 얼굴이 근육이 얼얼할 정도로 웃고 다님.

'실존'은 첫째로 이념적 본질 밖에 빠져나와 있는 현실적 존재를 의미한다. 현실적 존재에도 여러가지가 있으나 "지금, 여기에, 이렇게 있다"는 것이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 현실 존재는 다른 것에 의해 대체될 수 없는 독자적인 '지금, 여기'를 사는, 이 현실의 '자기 자신'이라고 한다.

본질은 실제를 가리키기 위한 개념이지 실제가 아니다. 본질은 현실에 존재하는 연속적이고 변화하는 성질을 정적으로 가공한 가상이다.

내 삶은 교통사고 같은 건 당하지 않는 것이라 여겼는데, 뒷차가 나를 박아서 반신마비가 일어나 입원을 하게 되는 현실이 발생한다. 그 시점에, 그 현실을 사는 것은 나다.

아마도 그 순간에 교통사고가 나면, 피해자로서 해야할 행위들이 떠오르고, 반신마비가 되면 취업도 못하고 인생 망하고, 인간 구실 못하면 차라리 죽는게 낫지 않을까 라며 두려움이 떠오를 수도 있다.

실존은 그냥 반신마비로 입원한 내가 침대에 누워서 치료받고 있다. 그정도로 담백하다. 그리고 나는 교통사고나서 반신마비를 당해 인생 망한 어떤 사람의 스토리를 쓰고 있다. 내 실존이 아닌 또다른 본질로 나(삶)을 해석하고 그에따른 느낌으로 괴로워한다.

'실존'은 둘째로 인간으로서의 진실한 존재방식을 현실의 생존방식을 통해 실현해 가는 자각적 존재(自覺的存在)로서의 자기 자신을 의미하기도 한다. 무자각적 존재는 모두 이미 지정되어 있는 본질에 따라서 그 현실의 존재방식이 결정되는 것에 반하여, 자각적 존재인 인간은 '실존이 본질에 선행'하므로 현재의, 이 현실의, 자기의 생존 방식에 의해서 인간 독자의 본질 ―― 그 인간을 그 인간답게 하는 개성 ―― 이 시시각각으로 새겨져 가는 것이다. 따라서 그 실존이 그 본질을 결정하고, 실존하는 것을 그 본질로 하는 자각적 자기가 진실한 '실존'이라는 이름에 맞는 것이다.

반신마비인 사람은 일을 못하니까 인생 실패자다. 장애인이 되면 망한다 등의, 스스로 사고 느끼고 깨달은 것이 아닌, 어디서 들은 것, 사회의 이념 등으로 체념을 한다면, 그는 무자각적으로 삶을 사는 것이다. 일을 못한다고 안다면 시도조차 안하려 할 것.

그러나 실제 살아보고 느끼고 깨닫는 자각적 삶을 사는 경우, 반신마비로 살면서 그럼에도 불구하도 내가 원하는 것을 성취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하고, 찾게 될 것이다. 사회나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그들 머릿속 가상 공간에서 어떤 본질로 해석하건, 나는 내가 처한 독자적 현실에 맞는 삶을 꽃피워 나갈 것이며 그것은 나의 개성이 된다.

실존의 나, 내 인생에 적용된 조건으로 지금 여기 존재하는 내 삶. 그 삶에서 내가 살아가는 것이 내 본질을 결정한다. 자각하고 살아봤더니 이렇게 됐더라고 말하는 순간 실존으로 인한 본질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이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로 주장하는 삶을 역으로 뒤집어 '살아봤더니 이렇게 생각이 되네.'라며 고백을 하는 삶으로 변화하게한다.
(라떼는 말이야! 엉! => 이건 라떼가 먹고 싶다는 것. 고백의 탈을 쓴 주장.)

이와 같이 실존에 의해 그 본질을 결정해 가는 존재는 자유로운 존재이므로 실존의 본질은 자유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의 자유는 선택하는 것도 가능한 선택 이전의 '관념적' 가능성으로서의 자유가 아니라, 일정한 선택의 필연성을 스스로 인수하는 '실존적' 자유이다.

반신마비인의 삶을 살며 내가 누구인지 그 본질을 결정한다. 그것이 실존적 자유. 이것은 관념적 자유와 다르다. 무엇이건 할 수 있는 자유라고 부르는 것이 있다면, 그건 정말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아무것도 없다는 말과 같지 않을까? 반신마비라는 필연적인 조건을 받아들인 삶, 즉 피투성이인 내 삶을 수용하는 동시에 실존적인 자유는 나타나게 된다.

그것은 현실의 자기가 무력하며 더럽혀져 있다는 것을 직시하고, 이러한 기존(旣存)의 일상적 자기를 넘어서서 '밖에 서 있는다'고 하는 무한의 자기초극(自己超克)과 자기초월이라는 과제를 적극적으로 인수함으로써 진실한 본래적인 자기 자신이 되려고 결단하는 것이다.

'반신마비는 이렇게 살게 될거야.'라는 일련의 경험이나 인식의 범위를 벗어나 이렇게 벌어진 내 삶을 온몸으로 껴안아 살기로, 실존을 선택하기로 결심하면, 우리는 본질 바깥에서 실존적 자유를 누리면서, 자기(본질)을 초월한 삶을 살게 된다. 그것은 '반신마비 스토리'라는 가상의 내가 아닌, 지금 여기에 실존하는 내가 되는 길이다.

따라서 실존주의는 기성관념이 나타내는 형식적 보편성을 돌파하고 유한한 단독적 자기의 입장으로 되돌아와 거기서부터 재출발함으로써, 현존하는 자기의 유한성 밖으로 빠져나가는 탈자적(脫自的)인 자기초월의 결단이 인간 본래의 존재방식이며, 이러한 결단을 바탕으로 비로소 구체적인 진리도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본질을 진리처럼 이야기 한다. 가상의 스토리를 실존처럼 간주한다. 하지만 실존은 본질을 결정한다. 또한 실존적 삶은 구체적인 진리를 결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살고 싶다고 결단하는 선택 자체가 인간이 본래 존재하는 방식이라는 말을 하고 있다. 쥬라기 공원에서 "Life finds a Way"라는 대사가 이를 타나낸다고 할 수 있다. (공룡이 도시를 파괴하고 인간을 도살하는 게 Way라는 말이 아님)

무한한 자기초극의 노력으로써 진실한 자기를 실현하려 하고, 이러한 자기의 결단으로 선택하는 것이 근원적 진리라고 하는 실존철학의 주장은 추상적 관념이나 객관적 제도나 대중문화의 노예가 되어 개성과 주체성을 상실해 가고 있는 인간들에게 강력한 경종의 역할을 하고 있다. 실존철학은 모든 도그마의 절대화 경향에 반항하고 인간실존의 진실을 우선시킴으로써 현대 휴머니즘 철학으로서의 진가를 발휘한다. 특정한 주의, 주장이나 중우적(衆愚的)인 당파성에 의존해서 안이한 수면을 즐기려 하는 자에 대해 자유로운 선택의 필요성과 책임감을 각성시키는 부단한 문제 제기자로서 실존주의는 커다란 의의를 갖고 있다.

이건 잘 모르겠어. 이건 약간. 구지 의의를 가져다 짜낸 거 같다. 숙제하듯.

그러나 기존의 일상성에 대한 비판만으로는 문제 해결이 불가능하며, 선택의 자유와 책임의 강조만으로는 행동의 구체적인 내용이나 방향의 명확화는 불가능하다. 여기에서 상식이나 과학과의 적극적인 결합이 요구된다. 이러한 객관적 요구에 등을 돌리고 실존의 주관적·내면적인 입장에서 절대화시켜 실존의 '교설체계(敎說體系)'를 쌓아 올리고 그 안에 묻혀 있으려 할 때, 실존철학은 본래의 체계외적(體系外的)인 실존성을 상실하고 스스로 극복하려고 했던 낡은 추상적 관념론의 입장으로 역전하는 위험성을 초래하게 된다. 여기에 실존철학의 커다란 한계가 있다. 실존 철학의 탄생을 일찍이 간파하고 크게 평가했던 철학사가 하이네만(1889- 1970)이 '실존'은 사상의 방향을 설정해 주는 규제 원리일 수는 있어도 사상의 내용체계를 만들어 가는 구성 원리는 아니라고 한 것도 이 때문이다.

내가 실존주의를 접한 건 실존상담을 통해서다. 상담과의 결합된 상태로 그것을 접했다. 음, 위험성? 상담, 아니 수 많은 마음판 도판에서 한소식 했다며 산속에서 추종자를 거느린 상태가 위험성을 나타내는 대표적 예라고 할 수 있다.

실존주의는 사실 '모르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뭔가가 있는데 뭔지는 모르겠다. 그걸 다 안다고 주장하기에는 시간-공간 그리고 인간의 한계가 있다. 정말로 모르는데도 불구하고 그 모르는 것을 내 몸과 영혼으로 끌어안아 느끼게 알아간다. 즉, 현실이 없다면 실존주의가 아닌 교설체계주의 삶일 뿐이다.

여튼, 연봉이 X 가 안되면 죽어야 해. 남자가 X는 있어야 지. X 살에는 어떤 조건을 취야해지. 그래야 '삶'이지 라며 어디서 추출한 에센스 개념으로 모든 개개인의 삶을 다 안다고 말하는 이들이 너무나 쉽게 출현하게 되는 답답한 현실에서, 실존주의는 자유를 선물할 것이다.

내가 잘 살고 있는 것일까의 '잘'이 본질이다. 그것으로 답답하다면 실존주의 상담소를 찾아서 상담 한번 받아보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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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누구와도 같은 시장 육체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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