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개월 다닌 첫 회사를 떠나며

PlanB·2023년 3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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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25에 입사한 첫 회사 AB180을 2023-03-31에 퇴사하게 되었습니다. 첫 이직이다 보니 중요한 마일스톤 하나를 달성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도 이직을 많이 하겠지만, 이번에 느낀 바가 특별히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번 이직 스토리를 가볍게 기록해보고자 합니다.

어떤 사람이 되려나

평생 ’무엇을 할 지‘만 계획했었는데, 올해 처음으로 ‘어떤 사람이 될 지’를 정리해 봤습니다. 존경하는 분의 강의록 중에 이런 내용이 있었거든요.

To-Do List가 아니라 To-Be List를 만들어라.
Myself(개인), Private(가족과 친한 친구), Social & Professional(인맥과 직장)의 세 관계망에서 자신의 페르소나를 설정해라.

- 지금이라도 알게 되어 다행인, 새해 계획 잘 세우는 법

자기 자신을 잘 아는 것은 어렵다던데, 저도 한 1개월 걸렸습니다. 그 동안 목적 없는 생산성으로 분주하기만 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여튼 그렇게 To-Be를 구체적으로 설정하고 나니, To-Do는 자연스럽게 만들어졌습니다. 그 중에 가장 먼저 이직을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To-Be

경력 초부터 백엔드의 전체 분야를 다 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고등학생 때 해커톤이나 공모전에서 백엔드를 혼자 맡았던 적이 많았는데, 정말 재밌었습니다. 혼자서도 백엔드 시스템과 조직을 충분히 구성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주변에 “백엔드 1인 팀을 해 보고싶다”는 말을 한 적이 많은데, 여전히 그렇게 생각합니다. People management에도 관심이 많아서 CTO를 커리어패스의 한 단계로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많이 부족합니다. 아직 웹앱 짜는 거 말고는 아는 게 별로 없습니다. Terraform은 10줄도 안 짜봤고, DDD는 어떻게 시작하는 지 모르겠고, Kubernetes도 모르고, MSA는 너무 어렵습니다. 모르는 것만 늘어놓긴 했지만, 같은 일을 한 지 5년이 되어 가는데도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습니다.

그러나 AB180은 각 분야의 스페셜리스트들이 이미 자리를 맡고 있어서, 생소한 업무를 마주치기 어려운 환경이었습니다. 당연히 이런 *드림팀 형태가 이상적인 조직의 모습입니다. 잘 하는 것에만 집중하면 되고, 다들 잘 하니 협업하기도 좋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며 성공률도 높습니다. 하지만 ‘못 하는 걸 잘 하고 싶다’는 욕심은 충족하기 어렵습니다. 똑같은 결과물을 5배 빨리 낼 수 있는 사람이 팀에 있다면, 그 일을 굳이 제가 맡을 이유는 없으니까요.

드림팀이란 모든 팀원의 개별 능력이 탁월하면서 협업까지 능수능란하게 이루어지는 조직입니다. 넷플릭스가 생각하는 훌륭한 직장은 뛰어난 복지 제도와는 무관합니다. 물론 넷플릭스는 여러 복지 혜택을 갖추고 있지만요. 넷플릭스가 생각하는 훌륭한 직장이란 '열의를 갖고 도전적인 공동의 목표를 함께 추구하는 인재들이 모인 드림팀'에 투자를 아끼지 않는 곳입니다.

- 넷플릭스의 문화 — 탁월함을 추구하다

각자가 다양한 업무를 소화해야만 했던 작은 조직일 때는 반대로 제게 준비가 안 돼 있었습니다. 신입 때는 진짜 수준이 낮았거든요. 하나부터 열까지 다 알려줘야 했습니다. 좁더라도 깊게 알아야 옆으로 넓혀 나갈텐데, 그러지 못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때 생각하면 참 기회가 많았는데 아깝습니다. 저와 회사가 서로 타이밍이 안 맞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To-Do

배움의 가능성이 가장 큰 것을 기준으로 기회를 평가했고, 그런 회사로 이직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자리, 회사, 보상을 목표로 했다기보다 To-Be에 도달할 수 있는 최단경로를 선택했습니다.

어디로 가는지는 이번에 굳이 언급하진 않으려고 합니다. 가서 증명하고 채용에 기여할 때 즈음이 되면, 다른 글을 통해 공유해 볼까 싶습니다(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에서 AB180을 언급했던 것처럼요). 여담으로 제 자신이 채용 브랜드가 되면 좋을텐데, 아직 많이 멀었네요. 제 글도 언젠가 누군가의 지원 동기가 되면 참 기쁠 것 같습니다.


불안함에서 두려움으로

저는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기본 태도가 치열함과 성장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저는 의지력이 강하지 않습니다. 당장 부족함이 안 느껴지면 엄격하게 단련하지도 않고, 당장 바쁜 일이 없다면 그냥 퇴근하고 휴일을 챙깁니다.

강한 의지를 가진 최고의 스포츠 스타도 개인 코치를 두고 철저하게 통제된 환경에 자신을 놓습니다. 저도 치열하게 살 만큼의 의지는 없으니 환경을 통제하려는 편입니다. 소명을 추구하는 데에 의지력 자체를 안 쓸 환경에 살고자 하다 보니, 저는 이상하게도 편안한 환경을 불안해하고 걱정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AB180에선 편안한 만큼 불안했습니다. 오래 일하는 동안 프로세스에 대한 이해도 높아졌고, 제품에 대해 아는 것도 많아졌습니다. 개발도 많이 늘었고요.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답이 쉽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일을 뚝딱 해결하는 건 당연히 좋은 일이지만, 자연스럽게 긴장도가 떨어지고 있었던 게 문제였습니다. 이런 상태가 된 지 1년이 조금 넘은 것 같습니다.

일의 난이도를 높이는 식으로 돌파해 봤습니다. 긴장감이 부족하다면 일을 어렵게 만드는 것이 보통의 해법이니까요. 다른 접근 방법도 써 보고, 다이어그램도 그려 보고, 결과물의 예상 수준을 평소보다 높게 잡아 보기도 했습니다. 몰입도 잘 되고, 성장도 있어서 유의미한 방법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보다 더 큰 도전을 해보고 싶다는 모험심이 생겼습니다. 경험해 보지 못 했던 미션을 해결하며 높은 긴장감을 유지하고 싶었습니다. 평소에 B2C 비즈니스나 다른 도메인에 대한 욕심도 가지고 있었어서, 이런 명분들을 합쳐보면 이직할 이유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직을 확정하게 되며 불안함은 많이 줄었고, 대신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완전히 다른 비즈니스에서 3개월 수습을 시작해야 합니다. 직무는 똑같지만 기술 스택도 산업군도 바뀌어서, 증명하지 못 하고 망할까 걱정됩니다. 컬쳐 인터뷰를 하긴 했지만 핏이 안 맞는다면 다시 회사를 알아봐야 할 수도 있습니다. 리드 급으로 제안받았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는데, 아닙니다. 가서 증명하고 얻어내야지요. 지금은 그냥 위험하고 고비용인 일을 저질렀을 뿐입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앞으로도 이런 어려움을 발전의 잣대로 삼고 싶습니다. Comfort zone을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 큰 용기라고 하던데, 저도 용기있는 결정을 한 것이라면 좋겠습니다.


미안함

많은 레거시를 남기고 가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인프런의 CTO로 계신 향로님의 글 우아한형제들 부검 - 왜 떠나는지 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Q. 그럼 왜 Exit (2019년)에 떠나지 않았는지?**

[…]

특히나 망분리 환경에서 정산 개발을 해보고 싶어요라고 지원하는 사람들은 주변에서 1명도 못봤기 때문에 기술부채와 개발팀 브랜딩은 저한테 있어서는 숙제와 같이 남아있었는데요.

이 상황에서 이직을 한다는 것은 도망친다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그것 보라고 너도 도망치는거 아니냐고"
"너도 환경이 싫은데 어디서 약을 파냐고"
"정산 개발자들은 고인물들만 하는거라고"

등등의 이야기들을 주변에서 듣는 것도 싫었고, 저 스스로도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건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어느 팀보다 개발과 일을 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고 회사와 팀을 졸업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레거시를 부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 옛날부터 열심히 싸워왔다고는 생각합니다. 그래도 아직 쌓여있는 레거시가 많아 미안한 감정이 큽니다.

대단한 결과물을 만들어내지 못 하고 떠나는 것도 아쉽습니다. 현실적으로 커리어 관점에서도 아쉽고, 받은 만큼 보답하지 못 한 것 같다는 생각도 있습니다. 이제 직관도 좀 생기고, 모호하고 복잡한 문제를 풀어나갈 요령과 경험이 쌓인 것 같거든요. 가서 잘 하는 걸로 만회해보려 합니다.


감사한 송별회

송별회를 가졌습니다. 회사 전체 인원이 130명 정도 되는데, 30분 넘게 와 주셨습니다. 물론 여느 송별회가 그렇듯 모여서 술 마시고 노는 명분이긴 하지만요(ㅎㅎ). 그래도 다들 격려의 말씀을 한 마디씩 해 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저녁식사 자리도 몇 번 가졌습니다. 리더와 C레벨 몇 분, 그리고 다른 팀의 IC분들도 맛있는 밥을 사 주셨습니다. 리더의 가치관이나 커리어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많이 배웠고, 책 몇 권을 추천받았습니다. 제가 입사한 뒤로 회사가 이사를 두 번 했는데, 옛날 이야기 하면서 추억팔이도 하고 재밌었습니다.

헤어짐에 있어 좋은 기억을 많이 남겨주신 것 같습니다. 스타트업 오래 다니는 게 쉽지 않다고 하던데, 이렇게 좋은 분들이랑 함께했던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퇴사자 분들이 그렇게들 회사로 놀러오시나 싶습니다. 제 이직도 회사의 많은 분들이 멀리 볼 수 있는 시야를 열어주신 덕분입니다.

배를 만들고 싶다면,
사람들이 나무를 모으고
일을 분담하게 시키는 대신
사람들이 넓고 끝없는 바다를
동경하게 하라.

- 《어린 왕자》 저자 생텍쥐페리의 명언

첫 이직이라 그런지 괜히 노심초사 하고 호들갑 떠는 것 같습니다. 반면 인생에 아직 처음인 게 많아서 앞으로 또 어떤 일이 있을 지 설레기도 하네요. 따뜻한 응원과 격려를 해 주셨던 분들께, 좋은 성적표를 들고 오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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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엔드를 주로 다룹니다. 최고가 될 수 없는 주제로는 글을 쓰지 않습니다.

5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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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 3일

민규님 어디서든 바라시는 일 모두 이루어지도록 응원합니다! 종종 회사 놀러오세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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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 3일

화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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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 7일

글 잘 읽었습니다. 치열함과 성장 잊지 말아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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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월 9일

자신이 채용 브랜드가 되는 순간이라... 정말 멋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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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11일

위치에 관계없이 모든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connections puzz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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