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서울권 출신 문과생은 어쩌다 미국까지 와서 개발자가 되었나

Hojune Yoo·2022년 6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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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날 중간만 하는 인생

누군들 그렇겠느냐만 나의 어렸을적 목표가 처음부터 미국 개발자는 아니였다. 어렸을적에는 딱히 앞으로 무얼 해야할지 잘 몰랐다. 초등학생때 나이 한 30먹으면 결혼도 하고 내집도 있고 연봉 한 5천 받으면서 적당히 살고있겠지 따위의 생각을 했던게 어렴풋 기억이 난다. 대한민국은 참 이상한 나라인게 중간정도 성적으로 중간만큼 해서 적당히 대학나오면 우리가 어렸을적 교과서에서 배워오던 평범한 가정을 꾸리고 사는 인생을 살지 못 한다는게 아이러니 하다. 비서울지역 인문계 일반 고등학교 전교석차 상위 3~40퍼센트 정도밖에 안됐던 내가 무슨 자신감이였는진 모르겠지만 항상 어떻게는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대충 살았던 것 같다. 건설현장을 총 관리감독 하시는 일을 하셨던 아버지는 잘은 모르지만 그래도 꽤 괜찮게 벌어오셨다고 들었다. 하지만 형제가 많은 (4남매) 집안에 장남으로 태어난 나는 어렸을때부터 귀에 딱지가 앉게 돈없다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뭐 그래도 급식비를 못낸다거나 수학여행을 못간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던걸로 기억하니 그래도 소득계층 백분위에 놓으면 중간은 가는 집안에서 자랐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집이 뭐 엄청나게 잘 사는 것도 아니고 성적도 중간, 그나마 잘했던거는 컴퓨터를 좀 잘 다뤘다는것, 그리고 영어 듣기 말하기는 따로 특별한 영어교육을 받은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있었던 것 정도.
컴퓨터를 잘 다루게 된 계기도 지금생각하면 어이가없다. 돈없다는 소리를 계속 들으며 자라다보니 당연히 좋은 컴퓨터를 사줄리가 없다는 생각으로 이어졌고 있는 어중간한 사양의 컴퓨터를 어떻게해서든 좋게 만들어서 게임을 즐겨야 했다. 그렇게 발악하다보니 윈도우 포멧 기술부터 시작해서 각종 어둠의 경로로 이미지 파일로 게임을 다운로드 받아서 실행하기, 그래픽카드 직접 구매해서 설치하기 등등의 깨알같은 기술들을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됐다.

10개월 교환학생 프로그램으로 미국행

이렇게 중간만 대충 하며 살던 내 인생에도 전환점이 찾아오는데, 영어 성적은 안좋은데 말하기 듣기는 나름 좀 했던 나에게 아버지가 어디 신문에서 보고 오셨는지 (조선일보도 내인생에 도움이 될 때가 있었구나) 미국 국무성에서 주관하는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권하셨다. 미국의 가정집에 홈스테이 하면서 미국 공립학교를 10개월동안 다닐 수 있게 해주는 프로그램이였는데 당시 중학생도아니고 고2였던 나에게는 엄청난 도박이자 모험이였다. 그래도 어차피 이길로가면 또 중간만 대충하는 인생을 지속하게 될 것이라는게 싫었다. 그래서 앞으로 뭐가있을지 모르는 도박에 내 인생을 걸어보기로 했다. 그렇게 짧은 미국생활을 마치고 영어로 수업듣고 조금 더 영어를 많이 사용할 기회가 있었다는 것 제외하면 별 특별할게 없었던 (사실 한국인 친구들이랑 보낸 시간이 더 많았던 것 같다) 미국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서 검정고시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다음에 뭘 할지를 몰라 그럼 당장 해결할 수 있는걸 하자라는 마음에 군대로 직행했다. 미국으로 떠나기 직전에 아버지가 회사를 반강제로 퇴사하신 상태였어서 집안이 이미 많이 기운상태였고 재정적 지원을 바라기가 힘든 상황이 됐어서 수능을 본다거나 비싼 등록금 내고 어디 대학 가겠다고 말씀드리기가 참 어려운 상황이였다. 그래도 생활력 하나는 끝내줬어서 군입대 전까지 닭튀기는 일 부터 시작해서 나름 대기업 사무직 아르바이트 등등을 하면서 돈을 벌어왔다. 덕분에 군 전역 후 내 나름 어딜가던 내 몸뚱아리 굴리면 풀칠을 하고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군 전역 후.

나름 유학파라는 기록때문에 대형차량 운전병으로 입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비 전투부대 중대HQ 행정병으로 적당히 고생 덜 하고 전역했다. 이때 배워왔던 엑셀, 한글 같은 기술들로 전역후에도 사무직 보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그때당시 130만원 적지않은 돈을 벌 수 있었다. 군대 전역전에 미국 하와이에 있는 대학에 원서를 넣어서 합격해놓은 상태였는데 이 길도 내가 원하는 평범한 삶을 살 수 있게 해줄 것 같다는 느낌이 오지 않았다. 비자까지 다 받아놓고 출국만 하면 되는 상태에서 모든걸 다 뒤엎고 수능을 보게되는데 이때 왜 이런 미친 결정을 내렸는지는 모르지만 결론은 이 결정 때문에 미국 본토에 있는 조금 더 나은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긴 했다. 내가 결국 입학하게된 미국 대학은 다른 대학에서 24학점만 인정을 받으면 SAT를 보지않고 편입이 가능하다는 조건이 있어서 (이걸 알고 수능을 본건 아니였다) TOEFL성적만 잘 받으면 충분히 합격을 노려볼 수 있었다. 이차저차 해서 턱걸이 토플점수로 가고자했던 미국 대학에 합격을 했고 자격증있으면 굶어죽지는 않는다는 아버지의 말을 따라 회계학으로 전공을 선택했다. 여기서 나의 미친 행동이 하나 더 발동되는데, 이때 만나던 여자친구와 헤어질 수 없어서 당시 만18세이던 여자친구와 결혼을 해서 같이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내 몸뚱이 굴리면 먹고사는일이야 할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였을까? 어쨋든 그랬다. 근데 아마 이때 결혼 안했으면 지금도 못 하고 있지 않았을까?

나는 수학을 못하는데?

고등학생때 내 모의고사 수리영역 점수는 처참했다. 문과 모의고사에서 위풍당당 17점을받고 주관식을 찍었는데 맞았다며 자랑하던 나였다. 이걸 커버하기위해서 짧은기간동안 수능공부를 할때 수리영역을 집중적으로 공부했고 그래도 어디가서 자랑할만한 성적은 절대 아니지만 나름 4등급 정도까지 성적을 끌어올리는데는 성공했었다. 그런데 미국대학에오니 나보다 더 심한 수포자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물론 고등학교 유학생활때도 느끼긴 했지만 내가 한국에서 수포자라고 미국에서까지 수포자여야 된다는 법이 없다는걸 깨달았다. 회계학 전공을 하기위해서 들어야하는 그렇게 어렵지 않은 필수 수학과목들에서 꽤 괜찮은 성적들을 받았고 여기서 다시한번 내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됐다. 나는 컴퓨터를 어려서부터 좋아했다. 당연히 프로그래밍은 전혀 몰랐지만 그래도 컴퓨터를 가지고 일을 한다는 것 자체에 흥미가 있었고 한국이였으면 수능 수학의 벽에 부딫혀 꿈도 꾸지 못했을 Computer Science라는 전공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회계학 전공자들도 엑셀을 많이 사용하기때문에 간단하게 비즈니스에서 활용할수 있는 정도의 프로그래밍을 가르쳐줬고 그 수업에서 어? 코딩 재밌는데? 를 처음 느꼈다. 그리고 다음학기에 바로 Computer Science의 개론 과목을 신청해서 들었고 내가 어느정도 소질이 있음을 깨달았다. 이제는 수학도 더이상 나의 장애물이 아니였기 때문에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1년반동안 해왔던 전공을 포기하는 것 이기에 시간을 날린다는 생각에 약간 갈등하긴 했지만 그만큼 프로그래밍이 좋았고 잘 할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외국인 노동자는 기술이 짱이다

프로그래밍을 배워놓으니까 영어를 유창하게 하지 않아도 돈을 벌 수 있는 길이 많이 생겼다. 학교내에서 주는 일을 해도 시간당 기본 13달러. 전공수업을 두학기 정도 듣고 난 후 숙달 된 후에는 학교 내에서 기본 시간당 16달러 학교 밖에서 인턴으로 일을 하면 22달러 이상도 쉽게 벌 수 있었다. 이렇게 버는 돈으로 의식주에 학비까지 다 충당할 수 있었다. 그리고 추가적으로 회계학을 전공했을때는 받지 못 했을 졸업 후 1년 미국 회사에서 일 할 수 있는 기간에 2년을 연장시킬 수 있는 STEM OPT라는것도 받을 수 있었다. 아마 전공을 바꾸지 않았다면 졸업 후 1년 실습기간후에 한국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이 1년간 실습기간에도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을지도 미지수이다.

졸업 후

2017년 졸업당시 미국경기가 상당히 좋은 상태였고 동네에 있는 아무 중소기업이나 취직해도 연봉 6만불은 받을 수 있는 시기였다. 졸업 마지막 학기때 학교 졸업할 때 까지는 파트타임으로 그리고 졸업후에는 풀타임으로 일해달라는 좋은 제의를 받았고 그렇게 미국 개발자로서의 나의 커리어가 시작됐다. 어느덧 졸업한지가 5년째다. 경기가 매우 호황이다보니 여기저기 불러주는 회사들도 많아서 졸업5년차인데 다닌 직장도 5개다. 동네의 중소기업에서 시작해서 어도비, 마이크로소프트 그리고 지금은 트위터가 내 직장이다. 오래 다녀보자는 결심으로 입사한 현 직장도 일론 머스크의 난입으로 얼마나 더 오래 다닐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마치며

나는 내 이야기를 들려주는건 좋아하지만 절대 나처럼 하면 된다고 권하지는 않는다. 나의 케이스는 정말 수많은 경우의 수 중 운이 정말 좋았던 한가지 케이스일뿐 그냥 이런경우도 있었다로 받아들이셔야지 따라하시면 큰일이 날 수 있다. 나락으로 갈 수 있는 경우가 너무 많았고 물론 항상 대비책이 어느정도 강구돼있는 방향으로 선택을 해왔다고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면 꼭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고 생각한다. 이 글을 시작으로 앞으로 내가 할 수 있는 나만의 이야기를 이것저것 적어보려고 한다. 너무 자세하게 적으면 글이 산으로 갈 것 같아서 최대한 자제하면서 이번 글에서는 큰 맥락만 적어보았고 앞으로는 부분부분에 있었던 위기 그리고 어떻게 극복했는지 등에 대해서 하나하나 자세히 이야기를 풀어보겠다. 여기까지 읽어주신 여러분께 감사를 표하며 댓글에 더 알고싶은 내용들을 적어주시면 참고해서 다뤄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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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한 미국 개발자입니다.

25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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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6일

맨날 중간만 하는 인생, 이라는 말을 보고 고갤 끄덕이며 글을 읽었는데 ㅎㅎ 글 내용을 읽어보니 열심히 사신 것 같아요. 글 곳곳에서 노력하신 내용이 잘 느껴지네요.
저는 영어를 잘 못 하는 편이라(ㅋㅋ 저는 정말 딱 영어도 중간만 했거든요!) 영어 공부를 어떻게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ㅎㅎ

2개의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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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7일

서론이 저랑 비슷한 것 같아서 공감받고 갑니다. 저도 돈때문에 시작해서 원하는 꿈을 꼭 이루려고 합니다

1개의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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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7일

BONJOUR.V
엄청 도전적인 성격이신것 같아요! 많이 배우고 갑니다^^

1개의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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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7일

많은 도전받고 갑니다. 앞으로도 건승하시길 기도합니다! 흔한 미국 개발자 홧팅!

1개의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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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7일

멋지네요

1개의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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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7일

중간 정도만 살고 싶다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그 위치까지 가기 위해서도 노력을 하는 사람은 보기가 힘들더라고요
덤덤하고 투박한 문체로 요약된 삶의 이야기지만 그 속에서 좋아하는 것을 진심으로 즐기고
목표한 것을 이루고자 노력한 흔적이 보입니다
좋은 자극 받고 가네요
감사합니다:)

1개의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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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7일

중간의 삶이 아니셨던거 같은데요?... 너무 재밌게 읽었습니다. 저, 29쨜.. 해보려고요 ㅠㅡㅜ 퐈이팅..!

1개의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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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7일

멋지십니다 저도 나중엔 북미지역에서 개발자로 일하고싶은데 아직은 앞이 깜깜하네요🥹 부러워요

1개의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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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8일

이런 글을 적어주시고 공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1개의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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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11일

많은 회사를 다니게 된 이유도 궁금해요. 단순히 돈이 이유였는지, 아니면 어떤 추구하는 가치를 찾아 다니신건지.. 각 회사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이직에 대한 이야기도 짧게 (길면 더 좋고요 ㅎㅎ) 들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1개의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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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12일

포지션이 어떻게 되세요

1개의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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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22일

dd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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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월 22일

멋지네요 ㅎㅎ 최근 주로 사용하는 프레임워크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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