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만의 Hello World (Feat 개발자를 꿈꾸기 까지)

이병수·2020년 9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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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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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기 앞서

이 글은 개발자를 꿈꾸기 까지의 저의 여정과 어떤 생각으로 개발자의 세계로 뛰어들게 되었는지에 대한 TMI 회고 글입니다. 시간이 많고 저에 대한 관심이 있는 분만 읽어주세요👌

위코드 부트캠프 3개월 과정이 끝이났다.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과정이 끝났기에 한번쯤 내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떤 계기로 이 세계에 뛰어들었는 지 그리고 어떤 개발자가 되고 싶은 지 정리가 필요할 것 같아 쓰게 된다.

막상 거창하게 시작하고 나니 무슨 말부터 해야할 지 막막하지만 이 말로 시작하고 싶다.
얼핏보면 뒤죽박죽 해보이고,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나의 과거들을 관통하는 내가 지향하는 삶의 자세와 물음에 대한 말이다.

가치관

나는 '무엇'을 보다 '왜' , '어떤 마음가짐으로' 시작하려는 지를 중요하게 여겼다.
타인과 사회에서 말하는 정답(正答)보다 자신만의 해답(解答)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좋은 답을 찾으려면 좋은 질문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품고 살아 왔다.

이런 가치관을 처음 부터 갖고 있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모범생이지만 꿈이없던 시절

학창시절 특히 고등학교 때는 선생님이 좋아하는 모범생의 전형이었다. 반장을 줄곧했고 반 열쇠를 담당하며 제일 일찍 반에 왔고 제일 늦게 갔다. 그 생활은 재수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당시에는 나에 대한 진지한 물음은 존재하지 않았다. 단순히 좋은 대학을 가서 부모님과 선생님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 내 목표이자 삶의 이유였다.

수능날 최선을 다한만큼 결과도 좋았으면 좋았겠지만 기대가 큰 만큼 긴장감이 날 짓눌렀고 1교시 언어를 말 그대로 망쳐버렸다. 다행히 그 다음부터 멘탈을 잡았지만 문과에서 한 과목을 잘 못받는 건 곧 좋은 대학을 가지 못하는 것과 같았다.

삼수를 할 자신은 없었고 선생님의 추천으로 마지막 후보라 여기는 다군에 교차지원으로 내 의지와 상관없이 성적에 맞춰 컴퓨터학부를 지원했고 입학했다.

뒤늦은 사춘기

그래서 정확히 9년 전 난 관심도 없던 프로그래밍을 내 의지와 무관하게 처음 접했다.

이후 해피엔딩이었으면 좋았겠지만 당시의 난 뒤늦은 사춘기를 맞이했다.

오로지 좋은 대학 입학만을 위해 유보했던 자기 자신과 인생에 대한 물음들은 대학에 입학하자 마자 머리 속을 지배했다. 문제는 이때까지 질문 보다 수동적으로 답을 받는 것에 익숙했던 난 어떠한 물음에도 쉽사리 답변하지 못했고 매일 같이 잡히는 신입생 술자리로 도피했다. 물론 수업도 거의 안나갔다.

그렇게 난 처참한 성적표을 받들고 한 학기만에 군대로 도피했다. 당시의 내 학점은 학고를 겨우 면한 성적이었다.

인생의 터닝포인트 군시절

군에서는 더 이상 도피할 곳이 없었다. 남는 것이 시간이었고 그 남는 시간을 허투로 보내지 않고 독서와 사색의 시간을 가졌다. 수 많은 책 중 한 문구가 나의 뇌리에 박혀 나를 바꾸게 만들었다.

"무엇이 되는, 무엇을 이루든 자기결정권 또는 자유의지를 적극적으로 행사해 기쁨과 자부심을 느끼는 인생을 살아야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결정권을 행사하는 일이다. 자기 결정권이란 스스로 설계한 삶을 옳다고 믿는 방식을 살아가려는 의지이며 권리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유시민-

나는 닥치는대로 열심히 살아 왔지만 스스로 인생을 설계한 적이 없었다. 학창시절은 오로지 좋은 대학을 위했지만 그 결과물 또한 내가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전공이고 과였다. 무엇에만 집착했지 그 이면의 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 순간부터 다르게 살기로 마음먹었고 전공이라는 첫 단추부터 다시 꿰고 싶었다.
그렇게 난 군 복무를 하며 수능 준비를 했다.

다행이 망쳤던 한 과목 빼고 기본이 튼튼한 편이었다. 그리고 그 망쳤던 과목도 수없이 읽은 책으로 다시 궤도에 올릴 수 있었다. 그렇게 난 병장 진급 전 수능을 쳤고 지난 재수 때 망친 언어에서 1개 틀리는 등 만족 할 만한 성적을 거뒀다.

엄청난 성적은 아니지만 적어도 지난 번과 달리 선택의 기회는 생겼다.
당시에 들었던 생각은 나에게 많은 학문의 기회를 줄 수 있는 전공을 택하고 싶었다. 이왕이면 좁은 시야에서 글로벌한 시야를 갖게 해 줄 전공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난 국제학과를 선택했고 24살의 나이에 늦깍이 신입생이 되었다.

직업에 대한 고찰

직업([職業])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자신의 적성과 능력에 따라 일정한 기간 동안 계속하여 종사하는 일이다. 여기서 이 하는 일을 뜻한다면 은 자기가 추구하는 것 즉 가치관이 녹여져 있다.

늦게 입학한 만큼 지난 과거와 같이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힘든 선택이었던 만큼 가치있는 활동들을 통해 나와 세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직업을 탐구하고 싶었다. 직업을 선택하려면 자기 자신이 어떤 것에 흥미를 가지고 적성에 맞는 지에 대한 고민을 바탕으로 선택해야 된다고 생각 했기에 맹목적인 스펙보다 가치있는 활동들을 많이 하고 싶었다.

그래서 인생의 경험치를 위한 활동들로 내 대학생활 4년을 채워갔다.

인문학 동아리, 자교 공식 입학홍보대사 회장,외국인 한국어 도우미, 집수리 봉사활동, 국제학 취업활성화 동아리, 근로장학생, 해외 전공연수 4회 등등

그 중 대표적으로 1년 동안 자교의 공식 입학 홍보대사 활동을 했는데 그 활동으로 많게는 천명이 넘는 학생들과 매주 캠퍼스투어를 진행했다. 또 수시로 입학처와 함께 지방출장을 가서 의전과 입학설명회를 진행했고 자체 블로그 개설 및 관리를 통해 수험생들에게 복잡한 입학전형을 손쉽게 전달하려고 노력했다. 입학처와 별개로 활동하는 모든 활동은 자체적으로 기획부터 실행해야 했기에 학업 외 모든 시간은 이 활동에 쏟아 부었다.

일련의 과정 속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과 누군가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활동을 좋아하는 것을 알게됐다. 또한 많은 프로그램을 기획하며 새로운 무언가를 만드는 일에 재미를 느낀다는 것을 알게됐다.

그 이후에는 기회가 되는 대로 해외연수를 나갔다. 다행히도 국제학과 특성상 해외연수 프로그램이 많았고 소수에게는 장학금 혜택을 주었다. 운이 좋게도 그 해에만 교환 프로그램 포함 4번의 연수를 장학금을 받고 가게 됐다.

대학원을 목표로

중국, 싱가폴, 미국의 명문대학에서 전공연수를 받고 한국 너머의 세계를 보고 배우는 것은 학문 그 자체보다 시야를 넓히는 데 있어 인생의 큰 자산이 되었다.

해외에서의 경험들은 내가 사는 곳에서 통용되는 게임의 법칙이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고 더불어 오로지 자기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을 갖게 해주었다.

특히 상해에서의 반 년간의 교환학생 기간에는 일부러 혼자만의 외로운 시간을 가지며 나 자신과 마주하려고 노력했다.
나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삶을 추구하고 어떤 것에 즐거움을 느끼는가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찾으려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전공 연수과정 속에서 새로운 배움과 공부를 즐겼기에 꽤 학구적인 삶이 나와 잘맞다는 생각을 했다. 그 길로 1년동안 대학원을 준비했다.

얼떨결의 취업

결과적으로 가고자 했던 국립 대학원은 떨어졌다. 그렇다고 사립 대학원을 가자니 터무니 없이 비싼 등록금은 감당 할 수 없었다. 1년 동안 재도전하는 것 또한 큰 부담이었다.

마침 공채가 시작되는 시즌이었기에 취업을 먼저 해서 현실감각을 키우고 학자금을 마련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란 생각이 들었다. 대학원은 나이가 들어도 갈 수 있지만 기업은 아닐 것 같았다.

그렇다고 무차별 기업 지원은 하고 싶지 않아 고르고 골라 단 4곳의 회사에만 지원했다. 친구들은 미쳤다고 했다. 취업을 위한 스펙도 많지 않은 놈이 40곳이 아닌 4곳을 지원하니 취업 안할 거냔 걱정에서이다.

그치만 운명의 장난처럼 얼떨결에 그 중 한 곳의 회사에 최종합격되어 친구들 중 가장 먼저 취뽀하는 영광을 누렸다.

2년 반의 직장생활

까다로운(?) 선별 과정을 거쳐 고른 회사이기에 회사와 나의 fit은 괜찮았다. 더군다나 높은 연봉, 좋은 근무환경, 성장세의 회사 그렇게 난 적응이라는 핑계로 어느샌가 안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1년이 지나고보니 업무적으로는 풀리지 않는 갈증이 항상 느껴졌다. 외부적인 인정보다 내부적인 성장감에 가치를 두는 나에게 업무상 루틴이 있는 사무직은 사실 맞지 않는 옷이었다.

그렇다고 대학원을 가고 싶지는 않았다. 사회를 경험해보니 나한테는 학문만을 위한 학문보다 현실을 바탕으로한 수단으로서의 공부가 더 가치있게 느껴졌다.

선배들에게 물어보니 다들 그렇게 산다는 답변이었고 부장에 물어보니 더 열심히 하면 괜찮을 것이라 했다.
그렇게 1년은 맡은 업무에서 더 열심히 해봤다. 일부러 아무도 하지 않은 업무에 자원하기도 했고 직무 순환에 지원해서 다른 채널의 업무도 해보았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개발자 친구들과의 만남

9년전 컴공과 한 한기로 비싼 등록금을 날렸지만 지금도 연락하는 친한 친구들을 남겼다. 이 친구들은 다들 졸업 후 국내의 대표 it회사에 들어가 나와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업무 외적으로도 자기들끼리 토이프로젝트를 자주 진행하곤 했는데 우연히 옆에서 어떤 것을 하는지 보게됐다.

정말 놀랐다. 내가 아는 친구들이 맞나 싶었다
사적으로 만났을 때 볼 수 없었던 뜨거운 열정이 느껴졌고 자신들이 만든 결과물에 대한 큰 자부심이 느껴졌다.

그때부터 친구들에게 개발과 개발자에 대해 묻고 또 물었고

개발자의 삶이 성장, 도전, 가치있는 있는 일의 창조 등 내가 추구하는 삶의 방향과 현실과 학문의 접점이 되는 일이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9년만의 HELLO WORLD

그렇게 홀로 코딩을 시작하며 9년 만의 HELLO WORLD가 뜬 화면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나와 세상에 대한 이해 없이 수동적으로 시작한 개발은 한없이 좁은 세상이었지만 세상을 돌고 돌아 나의 가치관을 적립후 시작한 개발은 정말 멋진 세상이었다.

개발자는 일 할수록 개인적 성장을 이루며 그 성장이 개인에 그치지 않고 타인과 사회에 유의미한 변화를 만들어 내는 멋진 직업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돌고 돌아 개발자의 길로 다시(?) 들어서게 됐다.

전혀 연관없는 국제학과를 졸업했지만 국제학과를 나온 덕에 세상에 대한 고민, 사람과의 관계, 나의 미래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을 정리하여 개발자에 대한 확신이 들었다 생각한다.

내가 되고 싶은 개발자

컴퓨터공학은 그 어떤 학문보다 사람을 향한다. 개발자가 만들 어플리케이션은 그 어떤 것보다 직접적으로 사람의 삶에 영향을 끼친다.

그렇기에 아직까지 컴퓨터공학에 대한 깊이는 부족할지 언정 그것이 가고자 하는 방향을 명확히 아는 개발자가 되고 싶다.

내가 만든 어플리케이션으로 사람들의 삶의 양식이 긍정적으로 바뀌는 것을 느끼며 코드 한 줄 한 줄에 자부심을 느끼는 개발자가 되고 싶다.

내가 가진 백그라운드가 실(失)이 아닌 득(得)이 되기 위해 그 깊이와 본질에 더 충실하면서 더 나아가 그것이 어떤 목적을 갖고 방향성을 갖는 지 생각하는 넓은 시야를 가진 개발자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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