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문유석
출판사: 문학동네
기록이 많은 건 그만큼 좋았다는 이야기.
여러 번 볼 수 있는 글과 생각이라, 사소한 글 조각도 내게는 무척 감명 깊다.
우연히 만나서 빌려서 보고, Ebook 으로 사고, 명절 맞아서 선물도 했다.
책이 흥미롭게 느껴진다면 부디 여기서는 흐린 눈으로 읽고
책으로, 완전한 글로 읽었으면 좋겠다.
생각해 보니 드라마는 하나도 보지 않았다 싶어서 미스함무라비를 보기 시작했다. 😄
불현듯 떠오른 제목이 '나로 살 결심'이다. 남들의 기대, 시선, 평가가 어떻든 내가 느끼는 솔직한 감정, 욕망, 행복을 좇아 살자고 마음먹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결심'에는 마음을 먹는다는 뜻의 '결심(決心)' 외에도 재판을 마무리한다는 뜻의 '결심(結審)'도 있다. 재판을 종결하면 더이상의 주장도, 증거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오직 판결만 있을 뿐이다.'
(중략)
꿈이란 일단 이루어지면 또다른 현실이 되어버린다. 당장 매일매일 부딪히는 새로운 현실에 쫓기다보면 이 삶이 과거에 가슴을 설레게 했던 꿈이었다는 것조차 금세 잊어버리게 된다. 반대로 현실이 새로운 꿈이 되기도 한다. 그저 안정적이고 좋은 직업을 갖겠다는 현실적인 계산으로 힘겹게 고시 공부를 했지만, 판사로 일하면서 느낀 보람 때문에 어느새 좋은 판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내가 꾸었던 것처럼. 꿈도 현실이 되고, 현실도 꿈이 된다. 결국 이 모두가 그저 살면서 거쳐가는 과정일 뿐인 것은 아닐까. 김민기가 <봉우리>에서 노래했듯이 말이다. 내가 오른 곳은 그저 고갯마루였을 뿐, 길은 다른 봉우리로 다시 이어진다고.
초임 판사로 이 건물에 발을 디딘 게 엊그제 같은데 어어 하다보니 23년이 지났네요.
여러분, 시간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오늘 놀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마십시오.
시간의 흐름 속에 크고 작은 일들은 다 흘러가고 남는 건 사람들과 함께한 기억뿐인 것 같습니다.
저는 전생에 법원을 구한 건지 어느 한 해도 예외 없이 좋으신 부장님, 배석판사님, 참여관님,
실무관님, 부속실 행정관님, 경위님, 속기사님들과 함께 일하는 행복을 누렸습니다.
확률의 법칙상 말이 안 된다 싶어 미운 얼굴을 한 명쯤 떠올리려 애써보아도 없네요.
여러분 덕분에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이고 공명심도 많은,
부족하고 흠 많은 제가 23년이나 일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부디 건강하십시오.
문유석 올림
나의 첫번째 삶은 시스템에 대한 신뢰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시스템의 일부로서 내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보람 있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유감스럽게도 그 신뢰가 무너져내리면서 첫번째 삶을 마무리하고 말았다.
나는 첫 책 『판사유감』을 "냉소적으로 구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어. 대담하게 낙관주의자가 되라고"라는 문구로 마무리했었다. 그런데 그후 10년 동안 나는 낙관주의를 잃고 말았다. 얻은 것은 슬프게도 냉소와 자기혐오였다. 세상을 탓하기에는 나 자신의 어리석음과 무능력이 컸다. 중요한 시기에 나는 의욕만 앞섰을 뿐 유의미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사람의 선의를 너무 쉽게 믿다가 이용당하기 일쑤였다. 그런 사람이 무슨 자격으로 남을 판단하는 자리에 남아 있겠나.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처맞기 전까지는"
인생은 실전이었다.
결국 '대중의 취향'은 어차피 아무도 맞출 수 없으니 우선 작가 본인이 스스로 재미있다고 느끼는 이야기를 쓰는 게 맞다. 그렇게 이렇게 온갖 부담감과 불안감에 짓눌린 상태에서 스스로 재미있다고 느끼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슬프게도 창작의 순수한 기쁨을 조금씩 잃어가는 것이다. 남들이 이걸 좋아할지 말지 먼저 걱정하게 되는 상황에서 글쓰기를 즐기기란 어렵다.
콘텐츠시장에는 학벌도 직업 귀천도 없다. Fun or Nothing. 재미있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재미있으려면 우선 제일 잘 아는 자신의 구체적인 삶, 그리고 진짜 사람들의 감정을 써야 한다. 웹소설작가든 드라마작가든 콘텐츠 창작자의 삶에 관심이 있다면 남들이 쓴 것을 모방하기보다 우선 자기 이야기를 써보기를 권한다. 사람들은 진짜 이야기에 끌리고 누구나 자기만의 이야기는 갖고 있기 때문이다.
판사의 일과 작가의 일은 많이 다르다. 판사의 일은 판단하는 일이다. 판단하려면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법이고 판례다. 판사는 복잡다단한 사건들을 법이라는 기준에 맞추어 판단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세상일은 결코 단순하지 않고 법은 추상적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떻게든 기준에 맞추어 결론을 내야 한다. 판사는 결코 판단을 유보할 수 없다. 자기 맘대로 새로운 기준을 제시해서도 안된다.
반면에 작가의 일은 질문을 던지는 일이다. 함부로 먼저 나서서 판단하는 것은 금물이다. 보는 이들이 스스로 각자의 답을 찾도록 좋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 작가가 할 일이다. 작가의 일에는 기준도 없다. 어떤 글이 좋은 글인지, 무엇이 재미있는지를 어떻게 획일적으로 규정하겠는가. 오히려 사회가 당연하게 여기는 기준들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이 작가가 할 일이다.
판사의 일은 특수성 속에서 보편성을 찾아내는 일이다. 법은 다수결로 정해진 규칙이다. 법은 본질적으로 다수의 가치관, 다수의 이익을 기준으로 정립된다. 모든 이의 특수한 사정을 전부 반영하기란 불가능하다. 법은 항상 그 시대 그 사회의 주류에 속하는 가치관을 기준으로 삼는다.(중략)
반면 작가의 일은 보편성 속에 묻히기 쉬운 개별성을 찾아가는 작업이다. 외면당하기 쉬운 소수의 목소리를 조명하고, 다수의 기준으로 간단히 분류될 수 없는 입체적인 인간성을 탐구하고자 한다. 과연 다수가 옳다고 말하는 것이 꼭 옳은 것일까 의문을 제기하고, 그 통념 때문에 희생당하는 소수는 없는가를 살피는 것이 작가의 일이다.
글은 삶에서 나온다. 좋은 삶을 살지 않으면 좋은 글이 나오지 않는다. 땅에 든든히 발을 딛지 않은 채 머릿속에서만 꾸며내는 글은 생명력이 없다. 작가란 정말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공허와 고독, 사회적 고립감 속에서 오로지 스스로의 노력으로 치열하게 당대의 문제들을 화두로 공부하고, 고민하고, 끝까지 생각한 사람들만이 좋은 글을 쓴다. 내가 읽고 사랑했던 작가들에게 새삼 경외감을 느끼곤 한다.
자기 확신에 찬 첫번째 삶에서의 경험과 고민들이 그동안 쓴 글의 씨앗이 되었듯이 어쩌면 '두번째 삶'에서 경험한 나의 불안, 회의, 어리석은, 나태, 방황 이 모든 것 역시 언젠가 좋은 글의 씨앗이 되지 않을까. 어차피 앞으로 우리가 살아가야 할 시대는 '불안'의 시대니까 말이다. 모든 것이 회색빛인 '불안'의 시대에 우리가 겪어야 할 고민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지켜나가야 할 소중한 가치들. 이런 것들에 대해 쓰고 싶다. 더 공부하고, 고민하면서.
첫번째 삶과 두번째 삶은 단절된 것이 아니었다. 앞으로 내가 몇 번의 새로운 삶에 도전하며 살아간다 하더라도 이전의 생이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성공이었든, 실패였든.
출세에 목맨 속물 판사, 본의 아니게 공익변호사 되다(?)! 초대형 로펌 구석방, 매출 제로 공익팀에 갇힌 전직 판사의 좌충우돌 휴먼 법정물
- 출처: 나무위키
가상의 디스토피아 대한민국, 전 국민이 참여하는 라이브 법정 쇼와 함께 등장한 '악마판사' 강요한. 그는 모두가 원하는 영웅인가, 법관의 가면을 쓴 악마인가?
- 출처: 나무위키
"세상 어디에도 없는 판사들이 온다!"
강한 자에게 강하고 약한 자에게 약한 법원을 꿈꾸는 이상주의 열혈 초임 판사, 섣부른 선의보다 원리원칙이 최우선인 초엘리트 판사, 세상의 무게를 아는 현실주의 부장 판사, 달라도 너무 다른 세 명의 재판부가 펼치는 生리얼 초밀착 법정 드라마- 출처: 나무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