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커톤부터 취직까지, 기획·프로토타이핑·조율·거절·합격이 한 달에 다 들어있다. 이걸 어떻게 하나의 이야기로 압축해야 잘 전달될지 아직 잘 모르겠다.
블로그에 글이 끊긴 지 좀 됐다.죽지 않았슴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한 달 사이에 명함도 받아보고, 조율도 해보고, 불발도 나보고, 결국 취직까지 했다.
6월 말, AI 자동화 주제의 해커톤에 참여했다. 사전 교육은 온라인으로 사흘, 매일 오후 2시부터 밤 10시까지. 강의를 보고 과제를 하고 튜터 세션을 듣는 흐름이었다. 그리고 7월 초, 오프라인에 모여 하루는 자율 해커톤, 다음 날은 발표회 겸 채용 연계.
내 발표 주제는 "의사결정까지 30초, 독자 맞춤형 MVP PRD"였다. 하나의 기획 산출물을 경영진용, 실무팀용, 고객사용으로 각각 다르게 뽑아내는 스킬. 발표를 준비하면서 스스로도 "이거 진짜 되네?" 싶었던 구간이 있었다. AI를 도구로만 보다가, 이해관계자별로 맥락을 갈아끼우는 설계를 직접 해보니 결이 완전히 달랐다.
원래도 깨달음이 좀 늦는 편이라, 이게 얼마나 재밌는 주제였는지는 발표 중에 알았다.
무엇보다 해당 기업 문제의 문제 정의를 다시 하고 접근하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워도 재미이었다. 매트리스 설계도!
발표가 끝나고, 한 회사 대표님이 명함을 주면서 제안을 건넸다.
솔직히 그 순간엔 얼떨떨했다. 이해관계자별 맞춤형 산출물을 뽑아낸 부분을 좋게 봐줬고, 글로벌 고객사를 위한 맥락 확장이라든지 기업 핏에 맞춘 LLM 최적화 같은, 지금 생각해도 묵직한 조언들을 줬다.
그날 발표가 끝난 직후, 매니저님들께서 해산 공지를 하든 말든 감사와 함께 메일로 이력서·포트폴리오·산출물 링크를 정리해 넘겼다. 다음 날 회사 소개서와 함께 답이 왔는데, 여기서부터 조율이 시작됐다. 소규모 정예 조직이라 채용 중인 포지션이 전부 개발 중심 세 개뿐이었다.
신입 PM인 나랑은 결이 달랐다. 그건 나도 알고 대표님도 알았다.
그래서 며칠간 고민했다. "엔지니어 직무가 아니더라도 시너지 날 부분이 있는지 고민해보라"는 말을 붙잡고, 회사 소개서를 정독하면서 내가 낄 수 있는 틈을 찾으려 했다. 소개서에 있던 "확정 스펙과 초기 구현의 불일치를 착수 전에 발견해 재작업을 막았다"는 문장이 계속 눈에 밟혔다. 고객사의 거친 요구사항을 엔지니어가 바로 일할 수 있게 정리해두는 사람, 그 자리라면 내가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주말 동안 협업 대시보드 프로토타입을 직접 만들었다. 문서를 올리면 AI가 읽고 분석해서 실무자 진행도·경영진용 Blocker·고객사별 케이스를 자동 정리해주는 흐름까지. 코드 구현이야 AI가 짰지만 기획 의도와 화면 흐름은 내 손으로 만졌다. 그걸 링크로 보내면서, "한 달이라도 프로젝트 하나에 붙어서 실제로 도움이 되는지 같이 판단해보자"고 제안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는 느낌이었다.
며칠 뒤, 답장이 왔다.
결론은 정중한 거절이었다. 프로토타입은 잘 봤고 솔직한 의견도 고맙다고 하면서, 다만 프로젝트들이 초기 고객 요구사항 수집 단계부터 시니어 개발 경력이 없으면 어려운 구조라, 나를 인턴으로 데려와도 마땅한 역할을 주기 어렵다는 결론이었다. 커리어 방향에 더 잘 맞는 곳을 찾아보길 권한다는, 무척 예의 있는 마무리.
아쉬웠냐고 하면, 당연히 아쉬웠다. 명함을 받은 순간부터 며칠을 이 조율에 쏟았으니까. 그래도 이상하게 후회는 없었다. 거절 메일을 읽으면서도 "결과물보다 커리어 방향과 직무의 접점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 오히려 배움으로 남았다. 반짝이는 프로토타입 하나로 없던 자리를 만들 수는 없다는 것. 이건 실패라기보다 정보였다.
그리고 웃긴 건, 이 조율이 불발되기도 전에 이미 다른 문이 열려 있었다는 거다.
인턴 연계로 지원했던 다른 곳에서 면접도 없이 최종 합격 통보가 왔다. 조율에 온 신경을 쓰느라 정작 이 소식은 좀 담담하게 받았는데, 지나고 보니 타이밍이 절묘했다. 한쪽 문이 정중하게 닫아두는 순간에, 다른 문은 나도 모르게 조용히 열려 있었던 셈이다.
그렇게 시작한 인턴 생활. 그런데 여기엔 예상 못 한 조건이 하나 있었다. PM 팀장이 없다.
부트캠프에서 나는 팀장을 두 번 했고, 두 번 다 뼈저리게 배웠다. 역기획 때는 리서치→문제정의→솔루션 순으로 역할을 딱딱 나눴다가, 다음 흐름을 맡은 팀원이 이전 판단의 맥락을 모르는 구조적 구멍을 만들었다. "구조는 의도만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말을 그때 처음 몸으로 알았다. 최종 프로젝트에서는 반대로, 논점마다 전원이 참여하게 만들어서 팀장의 역할이 결정을 대신하는 게 아니라 판단 근거를 함께 만드는 일이라는 걸 배웠다.
그런데 지금은, 위에서 방향을 잡아주거나 내 기획을 리뷰해줄 시니어 PM이 없다. 처음엔 막막했다. 근데 곧 알았다. 이게 오히려 부트캠프에서 배운 걸 실전에서 써먹을 자리라는 걸.
지금 하나의 아이디어를 기획하고 있는데, 팀장이 없으니 "이게 맞는 방향이에요?"라고 물어볼 사람이 없다. 대신 스스로 원칙을 먼저 세웠다. 기존 데이터를 조회·요약하되 중복은 빼고, 개발 공수를 최대한 낮추기 위해 CTO와 외주 개발자분과 조율을 앞두고 다듬어가는 중이다.
그리고 대표님이 현장 언어를 선호하고 범위 침범에 민감하다는 걸 관찰한 뒤로는, IT 용어를 싹 빼고 현장 선생님들이 쓰는 말로만 기획서를 쓰고 있다. 부트캠프 기술 튜터님한테 "이거 안 돼요ㅠㅠ"만 반복하던 내가, 이제는 레퍼런스를 먼저 찾아 보여주고 의도를 설명한 뒤 해결책을 묻는다. 소통할 수 있는 언어가 생겼다는 게, 팀장 없는 지금 제일 크게 도움이 되고 있다.
팀장이 없다는 건 기댈 곳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내가 세운 원칙이 곧 차후 이곳에 오실 다른 인턴분들의 기준이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직은 고통스러운 와중에 도파민이 찾아와서 재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