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의 어깨 위에서 본 뉴욕

조 은길·2022년 11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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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 생각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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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10년 전쯤에 구입했다. 당시 조승연의 "공부의 기술 "이라는 책에 큰 감명을 받고나서, 그의 다른 저서들을 찾아보다가 이 책을 찾았다. 그러나, 이 책은 나에게 실망 그 자체였다. 책의 요점이 무엇인지도 모르겠고, 어쩌면 내가 기대하던 어떤 가치를 제공하는 책은 아니었다.

그렇다! 이 책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읽는 책은 아니다. 그저 편하게 "무한도전"이나 "런닝맨"을 보듯이, 20대의 조승연이 바라보는 뉴욕을 탐사해가는 책이다.

세월이 흘러, 필자는 미국 유학을 다녀왔고, 뉴욕 역시 다녀왔다. 그리고 다시금 꺼내든 이 책은 필자에게 전혀 다른 의미로 와닿았다. 과거에 지루하기만 했던, 요점없이 구성돼 있던 졸작같던 책이 필자가 그동안 쌓아왔던 경험과 뉴욕을 다녀온 경험들이 합쳐지면서 책에 더욱 몰입할 수 있게되었다.

이번 시간에는 필자가 어떤 부분에서 책을 흥미롭게 읽었고 그로 인해, 어떤 생각을 하게되었는지에 대해 정리해보도록 하겠다.

그리고 필자의 뉴욕 탐방기 역시 덧붙여볼 것이다.


나에게 뉴욕이란??

10년 전, 나에게 뉴욕은 동경의 상징이었다. NYU Stern School of Business을 지망한 학생이었고, 브로드웨이, 월스트리트 등 뉴욕은 그 자체로 세계 자본주의 중심에 서있는 도시처럼 보였다.
월가의 사인 하나에 거대한 기업들의 생사가 달라지고, 그 야생 속에서 처절하게 살아남으려는 사람들의 전쟁터, 그 곳은 뉴욕이다. 그리고 유학 시절 뉴욕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나의 추억을 도시에 담았고, 이제는 조승연 작가의 저서 "나는 맹수의 눈을 갖게 되었다 "를 통해 뉴욕의 더 깊은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제 나에게 뉴욕은 다양한 감정과 기억 그리고 지식이 섞어있는 복잡한 감정의 도시이다.


Caffe Reggio

뉴욕에서는 Caffe Reggio라는 곳이 있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다양한 영화에서 등장하는 장소로도 유명하다. 내가 기억하는 영화 중에는 "대부2"에서 이 카페가 등장한다. 1927년에 문을 연 이 카페는 미국에서 최초로 에스프레소와 카푸치노를 팔던 카페임을 자랑한다. 이 카페는 그 옛날 부동산업자들이 돈 없는 이민자들에게 팔기 위해 가설(=임시로 지은 건축물)로 지은 4층짜리 건물의 1층을 차지하고 있다.

카페 천장은 세월이 흐르면서 여기저기 기이한 곡선으로 휘어져 있다. 벽에는 긁히고 모서리가 나간 거울이 걸려 있고 색 바랜 목재 가구 위에는 누리끼리하게 변한 오래된 석고상들이 진열되어 있다.

나는 뉴욕에 머무는 동안 이 곳에서 자주 카푸치노나 비엔나 커피 그리고 이탈리아 디저트 카놀리를 주문해서 먹었다. 아직도 1902년에 만들어진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뽑아내는 커피은 마치 오래된 역사와 입맞춤을 하는 듯한 기분을 선사한다.

하지만, 이 곳의 놀라운 점은 그게 다가 아니다. 이 곳에 걸려있는 그림들은 약 80여 개 정도가 된다. 그리고 중에는 놀랍게도 바로크 시대의 미켈란젤로로 불리는 카라바지오 원화가 걸려있다. 미술관도 아니고, 그런 엄청난 대작이 이런 누추한 카페에 아무렇지 않게 걸려 있는 것을 알고,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리고 이 곳의 단골들은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그저 그림과 일상을 즐겼고, 관광객들은 그 그림의 가치를 모른채 그저 카페 사진을 찍고 SNS에 올리기만 바빠보였다.

아래 사진의 벤치는 르네상스 시대를 이끈 피렌체의 권력자 메디치 가문 소유의 벤치였다. 다시 말해서, 약 500살은 거뜬히 넘는 벤치이다. 하지만, 이 곳에서는 사진 속의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게 앉아서 자신의 일을 하고 커피를 즐긴다.

나는 이러한 상황이 너무 놀라워서 사장님께 "왜 이런 귀한 유물들을 잘 보존하지 않고 방치하나요?"라고 물었다.

하지만, 사장님은 별 일 아니라는 듯이,
"우리 가게에 온 손님들은 역사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고 싶어 해요. 하지만, 때로는 귀한 것의 가치를 알게 되면 그 가치를 온전히 즐길 수 없게 돼요."
라고 하셨다.

그렇다. 이 곳은 단순한 카페가 아니라, 다양한 미술품들과 유물들 그리고 이 장소 자체가 가지는 역사... 이 곳이 바로 또다른 형태의 박물관이다.

사람들은 설령 작품들의 진정한 가치를 인지하지는 못하더라도, 오브제들이 주는 고유한 에너지와 바이브만으로도 충분히 특별한 경험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가치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오래된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추출한 커피를 마시며, 과거의 유산들과 소통한다.

이제는 뉴욕 역사의 상징이자, 전설이 된 장소!!

모든게 빠르게 바뀌어 가는 시대 속에서, 감히 스타벅스가 도전할 수 없는 역사와 전설을 간직한 장소!!


마케팅의 탄생

뉴욕에 금융업자들이 전부 월 가(Wall Street)에 있다면, 마케팅업자들은 메디슨 가(Madison Avenue)있다.

아마 미드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드라마 "Mad Men"으로 메디슨 가를 접했을 것이다.

1900년대의 뉴욕은 희망에 부푼 땅이었다. 하층민들의 무지한 용기와 힘을 원동력으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을 올리고 바다 위에 세계에서 가장 긴 다리를 만들었다. 모든 뉴요커가 다음 세기는 뉴욕의 세기라고 확신했다. 메디슨 가에서 광고업을 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메디슨 가의 광고업자들은 새로운 세기를 맞아 광고가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새로운 모토를 내걸었다.

“우리는 더 이상 사람들에게 물건을 팔지 않을 것이다. 꿈과 인생을 팔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제부터 물건을 찾아 우리에게 올 것이다.”

이 모토를 내걸며 새로 만들어낸 광고 방식을 그들은 “라이프 스타일 마케팅”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무엇을 공고한다는 뜻을 지닌 advertising보다는 시장을 만들어낸다는 뜻의 marketing이라는 단어를 선호하기 시작했다.

"라이프 스타일 마케팅"이란 사람들에게 인생의 목표를 만들어 주고, 마케터가 소개하는 물건을 사는 것이 인생의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라고 인식하게 만들어 주는 것을 말한다.

폴로 랄프로렌은 영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귀족 자제들이 모이는 클럽의 시골 신사로 사는 삶을 성공적인 인생의 좌표로 내걸어 성공했다.

옛날 스코틀랜드 목사들이 트위드 양복을 입고 양떼 옆에서 소녀들을 지도하는 모습이나, 마호가니 판넬로 뒤덮인 벽이 허물어져 가는 돌 성체 위에 앉아 한가하게 사냥견을 쓰다듬고 있는 모습을 담은 광고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영국 신사의 옷과 가구야말로 정말 기품 있고 여유만만한 삶의 상징이라고 생각하도록 해주었다.

그런가 하면, DKNY의 마케터들은 눈코뜰새 없이 바쁘고 누구보다도 냉정하게 일을 잘 처리하는 전문직의 삶을 동경하도록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헬무트 랭의 마케터들은 밤을 활보하는 도시의 보헤미안을 멋진 이미지로 만들어낸다.

디젤은 땀을 흘리고 결실을 맛보는 육체 노동자의 모습을 한 예술가의 이미지로 만들어 예술 감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그런 삶을 동경하도록 유도하는 작전을 폈다.

아르마니는 서로 전혀 관계가 없는 수많은 제품을 판다. 양복은 원래 양복점에서 만들던 것이고 지갑이나 벨트는 가죽 공장에서 만들던 것이다. 시계는 시계점에서 만들던 것이고 반지나 목걸이는 금속공예인이 만들던 것이다. 아르마니 카사에서는 목수들이 팔던 가구, 유리공예인이 만드는 칵테일 잔, 심지어 체스판, 장난감까지 다 판다. 이처럼 서로 관련이 없는 물건들을 한 곳에 모아 놓은 이유는 무엇인가??
➡️ 아르마니의 마케터들이 구상해 놓은 멋진 삶을 사는 데 필요한 물건을 모두 한 군데에 모아 놓은 것이다.

패션(fashion)은 원래 “방식”이라는 뜻이다. 패션은 자기가 선택한 삶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이처럼 뉴욕의 마케터들은 삶의 목표와 이상이라는 새로운 상품을 내놓았다. 비록 자기가 그런 삶을 살 수 없더라도, 그 브랜드의 옷을 입거나 물건을 사용함으로써 그들이 표방하는 인생을 사는 듯한 기분이 들도록 해주는 것이다.

이 새로운 사업을 만들어낸 뉴요커들은 상업과 문화를 뗄래야 뗄 수 없는 하나의 이상으로 묶어 버렸다. 다른 나라의 패션 마케터들은 자신들이 고귀하고 멋진 직업을 가졌다고 거들먹거리면서 마케팅의 진짜 의미를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지금도 새로운 삶의 이상을 만들어내고 이를 통해 물건을 파는 뉴욕의 마케터들은 자신들을 장사꾼 이상으로 이하로도 생각하지 않는다.
패션과 마케팅의 진실은 삶의 방식과 삶의 이상이 돈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졌다는 이해, 장사는 예술이라는 믿음, 즉 상업의 상을 인생의 도로 만들어낸 뉴욕의 철학이다.

패셔너블한 뉴요커의 이미지는 1920년대쯤 정착돼 세계로 번져나가기 시작한다. 메디슨 가의 마케터들은 바로 옆 거리인 5번가를 패션의 천국으로 만든다. 삭스 피프스 애비뉴, 노르드 스트롬, 버르그도르프 굿만 등 수많은 백화점이 라이프 스타일 마케팅, 즉 패션 산업의 첫 실험실이 되었다.

세계로 뻗어 나간 뉴욕의 이미지는 실제 뉴욕의 모습이 아니라 메디슨 가의 마케터들이 만들어 놓은 하나의 상업적 이상이다. 물건을 파는 것이 문화, 예술, 철학, 모든 것의 기본이 뉴욕에서는 날마다 사람의 욕구와 본능, 특히 욕심이 아름다움의 기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물 건너온 물건

  • 이 책에 나오는 작가의 일화 하나를 먼저 소개하고 싶다.

조승연 작가가 자신의 집에 친구들을 초대해서 잡담을 하며 노는 동안, 한국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그 친구는 아르바이트로 귀고리를 만들어서 동대문에 팔았다. 그리고 동대문에서는 그것을 개당 2천원씩에 팔았다. 놀라운 것은 동대문에서 팔다가 남은 재고들은 뉴욕으로 수출해서 개당 10만원씩에 진열해놓는다고 한다. 그리고 뉴욕에서도 남은 재고들은 다시 한국으로 역수출에서 20만원에 팔린다고 한다.
"뉴욕 핸드 메이드 비드 귀고리"라는 꼬리표만 달면, 백화점에서 불티나게 팔린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2천원짜리가 20만원에 한국 사람들에게 팔리는 것이다.
작가는 "뉴욕 패션업 사기꾼들의 포장"에 당했다고 친구들과 입을 모아 말했다고 한다.

  • 나는 맹수의 눈을 갖게 되었다 p39 中
  • 이제 나의 일화를 소개하고 싶다.

몇 년전, 필자는 캄보디아로 여행을 간 적이 있다. 유명한 관광지에는 10살도 안 된 아이들이 "원 달러!"를 외치면서 자신들이 만든 수제 팔찌를 10개에 천원 혹은 1달러에 팔았다. 너무나도 끈질기게 쫒아와서 나는 한 명의 아이에게 천원을 주고 팔찌들을 사줬다. 귀국 후에는 악성 재고로 남은 팔찌들은 여행 선물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에서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선물했다.
며칠 뒤, 놀라운 연락을 받았다. 엄마가 백화점에서 똑같은 팔찌를 "외국산 핸드 메이드 팔찌"라는 꼬리표로 개당 10만원씩에 판다는 것이다. 나는 너무 황당해서 해당 백화점 가서 함께 확인했다. 똑같았다...

그리고 이제는 없어서 웨이팅을 걸어놔야 된다는 직원의 황당한 말을 듣자 어이가 없었다.

그렇다.

제품에 어떤 이미지를 입히는가는 이렇게 중요한 것이다.

필자 대학 시절, 마케팅 수업 시간에 뉴욕의 유명한 마케터가 초청 강의를 했던 적이 있다.
그는 강의 도중에 " 뉴욕에서 물건이 안 팔리고 재고가 나면, 무조건 아시아로 보낸다. 중국,일본 그리고 한국에서는 악성 재고도 더 높은 가격으로 팔 수 있다. 악성 재고가 명품 브랜드일수록, 훨씬 더 비싸게 팔 수있다. 이런 것을 시장 다양화 전략이라고 한다. "라고 언급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에도 비슷한 말이 적혀있다.

뉴욕 마케터들이 아시아 시장을 얼마나 봉으로 보는지 그리고 아시아인들이 얼마나 미국과 유럽 물건에 대한 환상으로 가득차 있는지에 대해서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 뉴욕의 사례
    하지만, 일반적인 뉴욕의 중산층들은 튼튼하지도 않고 비싸기만 한 이 허세가득한 물건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유니클로(UNIQLO)같은 가성비 브랜드가 임대료만 연간 200억이 넘는 뉴욕 알짜배기 쇼핑 디스트릭트인 Fifth Avenue 한 가운데를 차지하는 진풍경을 볼 수 있다.
    ➡️ 유니클로, 맨해튼 5번가에 상륙..임대료만 연 224억원

낮의 모습 VS 밤의 모습

  • 가수 PSY의 " 강남스타일 " 가사 중에 일부이다.

    " 낮에는 따사로운 인간적인 여자
    커피 한잔의 여유를 아는 품격 있는 여자
    밤이 오면 심장이 뜨거워지는 여자
    그런 반전 있는 여자 "

한 사람의 낮의 모습과 밤의 모습은 종종 다를 때가 많다. 필자 역시 그와 같은 경험을 많이 했지만, 이 책의 작가 역시도 필자와 유사한 경험을 한 것같다.

미국에선 아주 후진 옛날식 가게를 '조그마한 벽 속의 구멍'이라고 부른다. 세인트 마크 광장에 모여든 반항아들이 밤마다 모여 술을 마시는 바의 이름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피빛 허리케인'이라는 독특한 폭탄주를 마시러 그 바에 간다. 큰 피처에 박카스를 잔뜩 담고 그 안에 야거마이스터라는 쓰도록 단 핏빛 술을 부어 휘저은 다음, 테이블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돌려가며 마신다.
나를 포함해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바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본 적이 없는 낯선 사람들이었다. 그건 아무 상관이 없었다. 사람들은 당시 대통령이었던 클린턴을 욕하고, 맥도널드와 마이크로소프트가 전 세계를 지배하려 한다며 저주했다. 칸트나 토머스 제퍼슨과 한판 붙을 수 있다면 어떤 방법으로 잔인하게 죽일 것인지 이야기하면서 흥분했고, 흥분한 상태에서 또 한 잔 들이켰다. ...(중략) 가끔씩 나는 낮의 세계에서 그들의 놀라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낮에 그들은 콜롬비아 대학 학장, 월스트리트 투자가, 뉴욕대 철학교수, 팜 음악 프로듀서, 유명한 미술비평가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 나는 맹수의 눈을 갖게 되었다 p8 中

대학 시절, 필자 역시 학업과 인간관계에 지칠 때면, 혼자 조용히 생각할 수 있는 바를 자주갔다. 한 번은 룸메이트를 따라서 술집이라는 간판조차 안 보이는 허름한 바에 간 적이 있다. 그 곳에서는 내가 누구였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함께 예거밤을 돌려마시고 물담배를 피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얘기를 멋대로 짓거릴뿐이었다.
당시에는 정치적 올바름을 상징하는 "PC주의(=political correctness)" 때문에, 공공연하게 말하지 못했던 아시안과 외국 이민자에 대한 혐오 그리고 여성에 대한 혐오까지 사회 분위기 속에서 강하게 억눌려있던 불만과 분노를 한껏 표출해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런 억눌려있던 불만들이 그 해에 도널드 트럼프라는 대통령을 만들어낸 것같다.

그들은 내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관심도 없었고, 오직 내가 그들의 얘기를 들어주기만을 바랬다. 나는 이런 인간 군상들을 관찰할 흔치 않은 기회가 생겼다며,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그들의 얘기를 듣고 관찰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얘기를 진지하게 들어주는 나에게 그들은 호의적이었고 나의 술값까지 다 계산해줬다.

며칠이 지나고 LA 지역 일기예보를 보는데, 낮익은 얼굴이 보였다. 그날 나와 얘기를 나누던 사람이었다. 알고보니, LA 지역 방송에서 잘나가는 아나운서였다. 그 뿐만 아니라, 필자가 다니던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하면서 TA를 하는 사람도 그 날 그곳에 있었다. 그 친구가 TA로 있는 수업을 들을 일은 없었지만, 나는 모른 척해주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해서 구지 아는 척을 하지는 않았다.

필자는 싸이의 "강남스타일 "을 들을때마다, 낮에는 화려한 커리어와 점잖은 모습으로 정의를 외치던 사람들이 밤에는 또다른 모습으로 등장하던 그날의 일들이 떠오른다.


예술가들의 잃어버린 고향 "소호"

필자는 대학생 시절, 다양한 맥주를 마시고 맛집 탐방을 가고 예쁜 사진들을 찍기 위해서 시간 될 때마다 친구들과 LA의 아트 디스트릭트(Arts District)를 활보했다. 이 곳을 걷다보면, 종종 한국 연예인들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아트 디스트릭트(Arts District)는 과거에 공장 지대였고, 현재는 예술가들이 영감을 받기 위해 혹은 창착활동을 하기 위해 오는 곳이다. 거리마다 예술혼이 살아있고 다양한 맥주와 쇼핑의 거리로도 유명하다. 일반적인 브랜드는 볼 수 없고, 굉장히 유니크한 샵들이 많아서 개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이 거리에서 쇼핑을 한다. 한국에서는 MBC "무한도전 "에서 뮤직비디오 촬영을 하면서 유명해졌다.

그리고 LA에 아트 디스트릭트(Arts District)가 있다면, 뉴욕에는 소호(Soho)가 있다.

소호의 탄생도 아트 디스트릭트와 비슷하다. 저렴한 부지에 1950년대부터 화가들이 모여 살면서 형성됐으며, 감각적인 갤러리와 편집샵으로도 유명하다. 길거리는 아트 디스트릭트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그래피티가 넘쳐난다. 하지만, 관광객들의 등쌀에 디자이너와 예술가들은 다른 곳으로 이주했고, 이제는 한 때나마 "세계 예술의 중심지"라고 불리던 명성과 그 빛바랜 명성을 찾아서 오는 관광객들뿐이다. 그리고 관광객들을 타겟으로 하는 휘황찬란한 상점들, 고급 술집 그리고 레스토랑들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나는 어쩌면 아트 디스트릭트(Arts District)도 관광객들의 등쌀에 디자이너와 예술가들이 떠나가고 이름만이 남아서 그 이름을 쫒아오는 관광객과 그들을 위한 상점들만이 남지는 않을까하는 불길한 예감을 해본다.


뉴욕의 패션

뉴욕에 와보지 않은 사람들은 뉴욕이 예술과 패션의 중심지이기 때문에 뉴요커들이 매우 깔끔하고 세련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 나는 맹수의 눈을 갖게 되었다 p96 中

4대 패션 위크(Fashion Week)는 매년 뉴욕 → 런던 → 밀라노 → 파리 순서로 진행된다.
덕분에 뉴욕은 세계 패션의 중심지 중에 하나이자, 미국에서 패션의 1번가라는 이미지가 굳어졌다. 하지만, 그런 명성과 어울리지 않게 일반적인 뉴요커들의 패션은 맨발로 운동화를 구겨 신고 땀으로 노릿해진 하얀 티셔츠 바람이다.

남들에게 보여지는 모습 때문에, LA에서는 날씬한 구두와 꽉 조이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다니던 할리우드 스타들도 파파라치에게 잡힌 뉴욕 패션은 예외없이 느슨한 슬리퍼와 후질근한 반바지 차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결코 어디서든 사람을 옷차림만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한 때, 뉴욕에서 "지배인에게 뇌물 주는 법 "이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다. 필자는 이 내용을 미국 모 프로그램에서 Fun Facts를 소개하는 시간에 들은 적이 있었는데, 이 책에서도 이 사실을 소개한다.

그렇다면, 왜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것일까??

이유는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 뉴요커들이 유일하게 옷을 차려 입고 가는 곳이 "레스토랑"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트랜디한 레스토랑에 들어가려고 예약 담당 직원에게 아양을 떨거나 뇌물을 찔러 주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예약 받는 레스토랑 직원은 팁의 액수보다 돈을 건네주는 방식으로 그 사람에게 자리를 내줄지 말지를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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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메리칸 사이코 "에서는 페트릭 베이트먼이 뉴욕 최고의 레스토랑 도르시아를 예약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장면이 그려진다. 결국, 예약을 하지 못하고 다녀온 것처럼 속이고 다녔는데, 그 레스토랑을 다녀온 것에 직장동료가 부러워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최근에는 핫한 클럽에 입장하기 위해서도 옷을 차려입는다. 뉴욕에서는 유명한 클럽에 줄을 서지 않고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엄청난 명성이자 이너 서클이라는 상징이다. 뉴욕에 사는 내 친구가 다른 친구를 소개할 때, "저 친구는 어디 클럽을 프리패스로 들어갈 수 있어."라고 자랑처럼 말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는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갔지만, 이런 문화를 알고 나서 왜 그게 엄청난 자랑거리였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글을 마치며

도시의 매력은 화려한 랜드마크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나온다는 것을 많이 느꼈기 때문이다. 뉴욕을 뉴욕답게 만드는 것은 바로 뉴요커 덕분이다.

미국 유학 당시, 필자의 주 활동 무대는 서부였다. LA와 Bay Area쪽에만 거주했기 때문에, 뉴욕도 그와 비슷한 느낌일 것이라 지레 짐작했었다. 그러나, 뉴욕은 완전히 다른 곳이었다. 도시의 느낌 자체가 차갑고 척박하며, 여유가 없어보이는 곳이었다. 하지만, 조승연 작가의 시선으로 본 뉴욕을 통해, 내가 왜 그런 느낌을 받았던 건지 이해할 수 있었다. 뉴욕은 치열한 생존을 위한 도시이며, 콘크리트 정글(The Concrete Jungle)이라고 불리는 "야생"이다.

LA는 엔터테이먼트의 도시이다. 이름 자체도 "천사의 도시"라는 이름답게 적어도 겉으로만 보면, 즐겁고 환상이 가득해보인다. Hollywood, 디즈니랜드, 유니버셜 스튜디오, 식스 플래그 등 지루한 일상을 탈출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환상의 나라를 제공한다.

뉴욕은 허세가 없다. 그 어떤 환상도 제공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날 것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처음 이 도시를 접하는 사람은 도시의 분위기에 당황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솔직함을 더 반기는 사람들도 많다.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자료 출처 및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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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길로만 가는 "조은길"입니다😁

2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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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 10일

그냥 뉴욕의 어디가 좋아 어디를 가봤다 이런 얘기일 줄 알았는데 굉장히 깊고 큰 그림을 보시네요.
글 정말 잘 쓰세요 ㅎㅎ

1개의 답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