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지도 - 글또 신청

최관수·2024년 9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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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또 10기 신청을 위해 작성한 글입니다.

전공자세요?

부트캠프나 컨퍼런스 같이 개발자들이 모이는 공간에서 종종 전공자냐는 질문을 받게 되는데, 비전공자라고 말을 하고 이후에 내적 친밀감이 생기면 히스토리를 이야기하곤 한다. 스무 살의 난 컴퓨터소프트웨어과에 입학했다. 중고등학교 시절엔 항상 작가가 되고 싶어 했지만 되는 방법을 몰랐던 것인지, 내 안의 열망이 그만큼 강하지 않았던 것인지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고 뭔가를 했던 기억은 없다. 남들보다 조금 글을 잘 쓰던 나는 막연히 미래를 그렸던 것이고 사실은 어떤 직업을, 어떤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뚜렷한 무언가 없이 학창 시절을 보냈다. 심지어 학과 선택도 집에서 가까운 전문대 수시를 선택하면서 이뤄졌고, 컴퓨터는 남들보다 조금 더 익숙했다고 생각했기에 선택한 터무니 없는 이유였다.

어쨌든 컴퓨터소프트웨어과 입학

그런 터무니 없는 이유들이 문제였다. 주체적이지 않고 명확하지 않은 이유로 진학을 하게 되니 입학 자체가 부담스럽게 느껴졌고, 입학 전 2월에 엄마한테 재수하면 안 되냐고 물었다가 단호히 거절당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사실 입시를 위한 제대로 된 노력을 하지 않았으니 재수를 하기 위한 명분이 부족했고, 결국 학교에 입학했다.

인문학이 좋은 컴퓨터 학부생

가기 싫었던 학교를 갔으니 당연히 학과 생활에 흥미가 없었다. C++ 같은 프로그래밍 수업은 생각보다 어려워서 매번 정신이 혼미했고, 대부분의 시간을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난 이 학과랑은 맞지 않나 보다 생각했었다. 자연스럽게 입대를 앞두고 휴학했고, 그러다 군 생활이 끝나고 자퇴를 결정했다. 자퇴를 한 이유는 구체적으로 뭔가를 계획했기 때문이었다. 작가에 대한 꿈은 나보다 더 좋은 글을 쓰는 사람들을 보고 내 재능에 통탄하며 접었지만, 그 당시 시사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작가는 아니지만 글을 통해 직업적인 뭔가를 해내는 기자가 되고 싶었다. 편입을 통해 정외과나 신방과를 가고 싶었고, 그 당시 결심이 강하게 서 있어서 자퇴하고 준비하는 편이 이래저래 낫겠다 싶었다. 나름 열심히 했고 나름 고민했고, 또 나름 질질 끌면서 나름 게을렀기에 끝내 편입은 실패했다. 내 삶에서 첫 번째 강렬한 목적이면서 동시에 첫 번째 처절한 실패였다.

음반MD로서의 커리어 시작

다시 뭘 해야 할지 고민했다. 몇 년의 시간을 투자했기에 나이도 꽤나 먹어버렸고, 목표를 잃었기 때문에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몇 달 고민 끝에 좋아하는 걸 해보자,싶은 마음으로 음반 매장에 지원했고 그 지원을 시작으로 음반MD로서의 커리어가 시작되었다. 처음 몇 년은 즐거웠다. 내가 선택하고 매입한 음반이 소비자에게 팔리는 과정을 겪으면서 분명한 즐거움을 느꼈다. 하지만 한계도 명확했다. 음반MD라는 직종 자체가 풀이 너무 작았고 연봉 파이도 적었으며 미래는 불투명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게 스포티파이였다.

개발바닥을 기웃거리게 만든 스포티파이

스포티파이의 추천 기능은 신세계와 같았다. 당시 빅데이터가 IT업계 주요 키워드로 떠오르면서 여러 서비스에서 머신 러닝이나 딥러닝을 통해 큐레이션 서비스를 시작하고 있었고, 스포티파이의 큐레이션 또한 그런 맥락에서의 서비스였다. 오래전부터 음악을 좋아해 왔고 지인들에게 음악을 추천해 왔던 내게 이 분야 자체가 흥미롭게 느껴졌다. 그 무렵 퇴사를 계획하고 있었는데 결국 퇴사 후 국비학원을 등록했고, 덕분에 다시 개발 영역으로 들어온 셈이었다.

멋모르고 접근한 빅데이터

가끔 그때를 돌이켜보면 참 겁도 없고 계획적이지 못했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개발을 1도 모르는 놈이 Python, Java 몇 줄 배우고 딥러닝과 머신 러닝을 학습한다는 게 미련한 일이었다. 그렇게 커리큘럼을 짠 학원도 현명하진 못하고. 학원은 성실하게 나갔지만 스무 살의 나처럼 수업 내내 정신이 혼미했다. 객체지향이니 이런 개념이 대충은 머리에 들어오는데 이걸 어디에 쓰는지도, 어떻게 확장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는 기분의 연속이었다. 그 이후 유데미나 다른 교육 플랫폼의 강의를 듣기도 하고, 캐나다 영주권을 준비하기도 하면서 데이터 분석 학과 등록을 통해 학생비자를 준비하기도 했는데, 개인적인 사정과 코로나 이슈로 한국에 남게 되었다. 그게 불과 3년 전의 일이다.

프론트엔드의 영역으로

한국에 남게 된 나는 다시 진지하게 고민했다. 꽤 오래 공부했음에도 데이터 분석을 제대로 이해하고 못했고, 무엇을 해야 할지, 뭘 준비해서 어떤 분야로 취업해야 할지도 막막한 기분이었다. 그때 개발자 친구의 조언으로 프론트엔드 영역을 찾아보게 되었다. 평소에 UI/UX에 관심이 있기도 하고 상대적으로 진입 장벽이 낮게 느껴졌다. 주변의 국비 학원을 체크했고 그렇게 두 번째 국비교육을 받게 되었다. 시작은 HTML이었다. Java나 Python에서 print 로 출력하듯 document.write()로 “Hello, World”. 몇 주 뒤 CSS를 배워서 스타일링을 하고, jQuery를 배워서 상호작용을 넣으면서 흥미가 붙었다. 포트폴리오 겸 내 첫 번째 웹사이트를 만들고 수료 후 웹 퍼블리셔로 개발 커리어를 시작하게 되었다.

웹 퍼블리셔에서 웹 프론트엔드로

웹 퍼블리셔로서의 일은 잘 맞았다. 큰 회사는 아니다 보니 기획자, 디자이너와 논의하며 UI/UX에 대한 고민도 하고, 다행히 프레임워크를 쓰는 회사여서 Vue를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었다. 입사 후 몇 달 뒤에는 간단한 CRUD와 컴포넌트 단위로 작업하면서 프론트엔드 영역의 초석을 다진 셈이었다. 2년 정도 머물렀을 때 회사와 논의 후 퇴사를 결정했는데, 정적인 페이지를 만드는 퍼블리셔의 일을 하면서 개발 공부를 이어가는 데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퇴사 후 개인 공부와 부트캠프를 병행했고, 지난해 새롭게 프론트엔드 개발자로서 커리어를 시작하게 되었다.

다시 만난 프로그래밍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참 멀리 돌아왔다. 처음 프로그래밍과 만났을 때 난 어쩌면 흥미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다만 진심이 없었다. 프론트엔드 영역뿐만 아니라 프로그래밍이라는 것이 꾸준히 습득하고 갱신해 나가는 과정의 연속인데, 이 과정은 이 영역에 대한 존중이나 진심이 없어서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현재 회사에 입사해서 스스로 개발 환경을 구축해야 하는 경험 속에서 느낀 건 ‘개발적 외로움’과 맞닥뜨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스스로 리서치하고, 리서치 결과를 검증하고, 필연적으로 무언가 결정해야 하고, 그 결정을 내린 나에 대한 의심과 싸워야 하고, 끝내 의심의 터널을 거쳐 최종 결정에 도달해야 한다. 사실 인생과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고, 개발자로 일하면서 인간적으로 좀 더 단단해지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명확한 진심

이제는 비교적 명확한 것 같다. 내가 뭘 하고 싶은지도, 그걸 위해 뭘 해야 하는지도 꽤나 구체적으로 그려진다. 그렇기 때문에 부족한 CS 지식을 채우기 위해 방송대를 다니고, 부족한 발표 경험을 채우고자 FEconf에서 기술 발표를 하고, 새로운 생각과 기술 경험을 위해 사이드 프로젝트를 한다. 이제 글쓰기의 꾸준함과 스펙트럼의 확장을 위해 글또를 지원하려 한다. 비교적 늦은 나이지만 어차피 늦었다 생각하고 있다고 한들 더 나아지는 것은 없다. 더 좋은 상황을 만드는 건 항상 한발 나아가는 것이고, 그 한발 내딛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려 하고 있다. 미력하지만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나의 작은 성공을 독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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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엔 책과 영화와 음악을 좋아합니다. 보편적이고 보통사람들을 위한 서비스 개발을 꿈꾸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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