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HD 진단을 받아버린 개발자

서지·2023년 1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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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러분
마스크로 얼굴의 절반을 가리고 지낸지도 3년쯤 되었네요
가려진 얼굴만큼 마음도 반쯤 가려진 것 같아서 세상이 조금 어두워진 기분이 듭니다
하지만 생각이 모든걸 끌어당기는 법
우리는 긍정적으로 생각해봅시다

얼굴이 반이나 남았네!

나는 이게 성격인 줄 알았지

저는 스스로를 텐션주도 개발자, 아무튼 행복한 사람 이라고 불러왔습니다.
그만큼 기본 텐션이 높았고, 말이 많았고, 대책없이 긍정적이고 행복하게 살아왔습니다.
평소 집중력이 모자라거나 충동적인 소비를 할 때, 대화 중에 실수로 말을 끊어버릴때
그냥 성격탓이겠거니, 모두가 이렇지만 자제하고 사는거겠지,
나는 자제력이 조금 모자란 사람이구나 생각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다 유튜브 동영상을 하나 봤습니다
저랑 비슷한 성격이신 분이 사실은 ADHD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충격적이였냐구요?
아니요 코파면서 봤습니다.

그냥 과학 영상 볼때 처럼 그렇구나 하고 넘어갔어요

하지만 알고리즘은 야속합니다
그 영상을 보고나니까 계속 ADHD 관련 영상이 나옵니다
몇개 보다보니 "혹시 나도..?"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각은 의심이 되고, 의심은 고민이 되고, 고민은 걱정으로 바뀌었습니다
사실 걱정 많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아서 중간에 몇개 끼워넣었습니다
생각이 바로 걱정이 됐어요

나 일 잘 하고 있는데?

보통 사람들은 걱정을 시작하면 부정을 하기 시작합니다.
집중은 잘 못하지만 일은 나름 잘 했고
중학교때까지 친구는 하나도 없었지만 사회 생활은 나름 잘했고
충동적이고 분노를 잘 참지는 못하지만 범죄를 저지르진 않았습니다

어?

집중도 못하고 친구도 없고 충동적이고 분노를 못 참는데 이게 병이 아닌거면
저는 호로새끼가 아닐까요?

호로새끼가 되고 싶진 않았습니다.


저 착합니다 신호등도 손 들고 건넙니다
그래서 검사를 받으러 갔습니다

좀만 더 빨리 오시지

병원을 가서 예약을 하고 검사를 받았습니다
거의 1000개가 넘는 문항과 상담,
머리에 과일싸개를 끼고 진행하는 뇌파검사까지 했습니다
(사과의 마음을 알 수 있는 뜻깊은 날이었습니다. 사과야 고마워 미안해)
대망의 검사 결과
저는 인지능력과 분할집중력이 엄청 낮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설문지에 나이, 직업, 병역, 급여 수준까지 적었습니다

발가벗겨진 기분이었습니다. 등이라도 좀 밀어주시지

ADHD인 것 같다, 6개월간은 약물치료를 하면서 소견을 진단으로 확정짓는 기간이 필요하다
콘서타라는 약물을 처방할거고 최소 용량부터 점점 올려갈 것이다
라는 상담을 끝내고 조금 편해진 분위기에서 의사 선생님이 한마디 해주셨습니다
"조금만 빨리 오시징 ㅎㅎ"
왜요? 하고 물으니 작년까진 ADHD로 신검 4급이 가능했었다고 하십니다

거 좀만 빨리 알려주시지 그랬어요

먹으면 초인이 되는 줄 알았지

사실 결과가 나오기 전 콘서타 후기를 많이 찾아봤습니다
초인이 되는 기분, 머리가 맑고 조용하다, 머리 속에서 더 이상 노래 소리가 안 들린다
라는 엄청난 후기,, 저도 먹으면 슈퍼 개발자가 될 수 있겠구나 조금 기대도 했습니다.
막상 처음 약을 먹어보니 아로나민을 먹은 날과 안 먹은 날 수준의 차이였습니다.

혹시 실수로 비타민을 처방해주신건가 의심했지만

"최소 용량이고 4배는 올려야 적정 용량이니 적응 기간이 필요하다" 고 답해주셨습니다
3달 뒤에 죽는다는 말보다
3달 정도 지나면 만족스러운 생활이 가능할 것이다 라는 말이 더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분은 어떠신가요

점점 효능이 나오고 있는데 머리 속이 조용하니까 세상이 별로 재미가 없습니다
그래도 코딩이 잘 돼서 기분이 좋습니다
저는 아무 걱정도 불안도 없는데
부모님이 생각보다 많이 걱정하셨습니다. 본인 잘못이라고 생각하시기도 하셨습니다
부모님은 제가 길에서 넘어져도 본인의 탓으로 품어주시는 분들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요즘 부모님께 굉장히 잘해드리고 있습니다
무릎냥이, 목욕냥이보다 귀하다는 경상도 애교아들입니다

그 후

사실 일년 전 쯤 이 글을 임시저장해두고 잊었습니다
약을 먹기 시작한 후 식욕이 없어지고 불안 증세가 심해졌습니다
8kg가 빠지고 약효가 떨어지는 밤 시간엔 불안, 공황이 찾아왔어요
적응 기간이 지나고 나니 괜찮긴 한데
정말 힘든 적응기를 보냈네요

혹시 나도?

라는 생각이 드신다면 진심으로 검사 한 번 받아보심을 추천드립니다
본인의 잘못이 아니라 뇌의 문제로 남들보다 못한 삶을 산다는건 너무 억울하니까요
약으로 대부분 치료가 된다고 하십니다
적극적인 치료로 광명 찾읍시다

다들 코로나 조심하시고 행복하세요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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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행복한 사람

7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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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월 30일

저도 ADHD인 개발자입니다! 중학생때 처음 알았었고,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서지님처럼 콘서타를 먹었기도 했습니다.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지금은 다행히 큰 필요는 못 느껴서 약은 중단했네요.

참 부모님들은 걱정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ㅋㅋㅋ 저도 부모님이 엄청 걱정하셨었거든요 전 딱히 아무 생각도 없었는데요. 이런게 바로 부모님이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부작용이 심하신 것 같은데, 잘 이겨내셨다니 다행입니다! 저도 처음에는 예전과 이상한 감각이 있었어서 혼란스러워했어요. 그동안 머리속을 떠도던 잡생각들이 사라지니 고요한 느낌이라고 할까요? 그래도 조금 지나다보면 그럭저럭 괜찮아지더라고요.

뭐가 됬든, 화이팅입니다!

1개의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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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월 30일

자기 피드백 철저한거 부럽네요! 대단하십니다

1개의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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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월 31일

안녕하세요 ! 저도 ADHD 진단을 받았어요!
저는 학창시절에 공부를 꽤 나쁘게 하지 않아서 제가 ADHD일거라고는 정말 생각도 못했는데
진단받아보니 딱 경계에 있더라구요! 저는 콘서타는 맞지 않아서 다른약을 먹고있어요
혹시 부작용이 심하시다면 아토목신 계열로 바꿔보시는 것도 추천드립니다! 행복한 하루되세요!

1개의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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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 31일

진혁님 덕분에 행복합니다
글 잘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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