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랩스에 재작년 10월에 합류해, 어느덧 1년 4개월 정도가 지났다. 언론에 알려진 것처럼, 경영 상의 어려움으로 인해 나는 비상경영체제 및 희망퇴직이라는 단어를 커리어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희망퇴직을 신청했고, 특별한 일이 없다면 퇴사를 할 예정이다.
경영 상의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인지한 것은 11월-12월 쯤이었던 것 같다. '기한이 박혀있는 개발 스케쥴'을 받았을 때, (나름 스타트업 업력이 길다보니) 투자를 위한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는 점을 느꼈는데...시간이 지나고 나서 예상한 결과를 마주하게 되었다.
어쩌다 보니 블로그가 회고로 가득한 회고 전용 블로그(...)가 되어 조금 뻘줌하지만 – 갑작스러운 '희망퇴직'이라는 단어를 듣고 나니 왜 사람들이 퇴사 브이로그 같은 것을 올리는지 이해하게 됐다. '억울하다'는 표현은 조금 감정적으로 느껴질 수 있겠다만, 그런 비슷한 느낌이다.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지 않아도 되는 종류의 불안감을 느낄 수 있기에 나의 상황을 이야기하고 공감받는 게 도움이 된다는 걸 알았다. (회사에는 불안감 때문에 잠을 못 잤다는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아쉬웠던 점들
- 성공적인 프로덕트를 만들지 못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실사용 유저 수도 많지 않았고, 임팩트도 작았다. (적어도 내가 이전에 개발했던 프로덕트들에 비해서는 말이다) 물론, 그런 일은 스타트업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치열하게 더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만한 프로덕트를 만들고, 사람들을 더 끌어모으는 데 노력하지 못했다는 건 크게 아쉽다.
- PoC를 너무 많이 만들었다. 전 경영진들의 지시였다고 하는데,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모른다. 개발자들의 반발이 작지 않았지만, 조직 구조상 그다지 주체적으로 제품 기획에 참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입사 후 반년정도가 지난 시점엔 외주 개발과의 차이점을 크게는 느끼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더 잘 할 수 있었을까? 아직 잘 모르겠다.
- 함수형 언어만을 프로덕션에 사용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해서는 조금 더 생각해 볼 필요는 있는 것 같다. '도입 비용'은 생각보다 작지 않고, 한번만 내면 끝나는 것도 아니다.
좋았던 점들
- 다양한 경험을 하며, 개발자로서 조금 더 성장한 것 같다. React를 사용한 이후로는 개발 방식이 비슷비슷하다보니 사실 개발 실력이 향상되고 있다는 생각을 별로 하지 않았는데, 엔지니어링 매니저 분들이 개발 문화를 개선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기 때문에 (개발 측면에서는) 근무 경험도 좋았고, 좀 더 나은 코드를 작성하는 데 고민할 수 있었다.
- 컨셉으로만 알고 있었던 함수형 언어에도 익숙해졌다. 비록
ts-pattern
같은 접근으로 타입스크립트에서도 할 수 있는 게 많아졌지만, sound한 함수형 언어의 차별되는 장점은 분명히 있다.
- 지금까지 일해온 팀들이 비교적 많이 작은 팀들이었는데, 그린랩스는 개발 조직 자체가 크다보니 다른 개발자분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고민해볼 기회가 많았다. 회사가 품고 있기엔 과분한 동료 개발자분들이 많았는데, 이런 경험을 언제 또 해 볼까 싶기도 하다.
교훈
- 경영진...중요하다.
그들의 이력을 주목하라
- 지나친 변덕과 빠르게 움직이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 좋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좋은 문화를 가진다고 성공하지 않는다.
다음 스텝은?
- 아직 어떻게 할 지 정하지 못했다. 그동안 많은 일을 했다. 성공하는 사람들이 혜성처럼 내 옆을 스쳐지나가기도 하고, 내가 만들었던 프로덕트들이 통째로 사라지는 경험도 몇 번 했다. 커리어의 다음 장을 펼치기 전까지, 지금까지 해온 것들을 정리하고 나만의 시간을 조금 가져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 세상이 점점 개발자에게 이전처럼 우호적이지 않은 환경으로 변해가고 있는 와중, 쉬어도 괜찮나? 하는 생각은 가지고 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는 상태여서 크게 걱정은 하지 않고 있다. 많은 사람들과 커피챗도 하고, 여러가지 새로운 것들을 공부하면서 나름대로 나쁘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 최근에 안드레이 카파시의 강의를 보며 어려운 것을 쉽게 설명하는 실력에 감탄했는데, 더 튼튼해지기 위해 기초적인 것들을 공부하는 데 시간을 많이 쏟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ChatGPT가 뱉어낸 대답에서 오류 정도는 짚어내야, '엔지니어'가 아니겠는가? (웃음)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