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람은 경계선 위에서

재연302·2022년 2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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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워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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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2월 군대에서

우리가 사는 이 공동체,
그러니까 나와 너, 이웃과 가족을 좀 더 따뜻하게 만들기 위해서 해결해야할 문제들은 공동체와 그 밖 황무지 사이의 경계선에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보람은 그 문제들을 마주하는데 있지 않을까

2016년

16년, 학교에서 창의제품설계 수업이라는 것을 수강한 적이 있었다. 어떤 문제를 찾고,(사회적으로든, 공학적으로든, 이를 해결하면 시장이 될 법한 ‘문제’) 이를 공학적으로 해결하는 제품을 디자인하고 직접 제작해보는 수업이었다. 1학기 동안 교수님들께 대차게 까였던 기억들이 많이 난다. ‘그래서 저 제품이 해결하려는 바가 무엇인가.’

제품을 설계하기에도 앞서, 어떤 문제를 해결할 지 팀에서 결론이 잘 나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나는 특히 문제의 핵심을 잘 짚어내지 못했다. 가끔 가다 떠오르는 문제들은 이미 선행 서비스와 제품들이 있었고 그 품질도 굉장히 뛰어났다. 팀 회의에서도 종종 ‘세상은 생각보다도 완벽하다’, ‘이미 나올 수 있는 것들은 모두 나와있다’ 라는 말을 우스갯소리로 하곤 했다.

공대에 있으면서 이때의 어려움은 여러 번 나를 힘들게 했다. ‘문제를 해결하는 첫 단추는 문제를 인식하는 것이다’라는 문장을 읽은 적이 있는데, 문제를 해결하기에 앞서 인식할 문제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고, ‘문제가 없다’라고 생각하던 내가 문제였다.

2019년

19년 2월 2일, 그러니까 얼추 2주 전, 이국종 교수의 골든아워라는 책을 읽었다. 하루 종일 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읽었다. 글을 읽으면서 울기도, 분노하기도 하였지만, 부끄럽다는 감정을 지울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있는 여기, 가게와 집, 사회는 많은 사람들의 손길이 묻어 있는 곳임을 책에서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문제가 없다’라고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이 사회의 꽤나 안전한 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던지라, 책을 읽으며 나는 부끄러울 수 밖에 없었다. 많은 사람들의 손길이 모이고 모여서 쏟아지는 문제와 고통들로부터 이 사회를 실낱같이 지켜내고 있었다.

‘골든아워’라는 책은 이런 실날같은 손길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쏟아지는 환자들 속에서 몇 안되는 그의 팀원들과 그가 침식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였다. 이야기를 읽다보면, 공사장 인부와 군인이 자주 나온다. 몸을 발판 삼아 살아가는 이들은 더욱 다치기 쉽상이었고, 이국종 교수와 그의 팀원들은 스스로를 깎아내어 짓이겨지고 뭉개진 타인의 몸을 죽음의 나락으로 빠지지 않게 붙잡는 사람들이었다.

쏟아지는 문제와 고통들의 최전선에서 버티고 침식되어가는 저자와 그의 팀원들을 보며, 이 사회에 존재하는 문제들은 공동체와 그 밖 황무지 경계선 사이에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와 이웃, 가족 등 우리 각자에게 소중한 사람들을 춥고 매서운 황무지로부터 안전하게 품고 있는 어느 커다란 원이 있다 해보자. 원의 바깥은 춥고 매서운 황무지일지언정, 원의 내부는 품고 있는 사람들의 온기로 따뜻할 것이다. 원의 중심으로 갈수록 그 온기는 따뜻하고 편안하겠지만 원의 경계에 가까울수록 원 바깥의 냉소로부터 오는 한기와 황무지의 매서움이 가깝게 느껴질 것이다. 이국종 교수와 그의 팀원들은 그런 경계선 위에서 실낱같은 손길로 원의 경계를 지켜내는 사람들 같았다.

각자 나름의 방법으로 그 원의 경계를 지켜내는 사람들이 반드시 대단한 사명감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닐 수도 있겠다. 물론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그저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혹은 본인이 살아남기 위해서 주어진 일을 견뎌내고 해내고 있는 중일 수도 있겠다.

처음 이국종 교수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을 때에는 많은 매체에서 본 영웅들과 같이 사회에 대한 굉장한 책임감, 가령 ‘내가 세상을 좋게 만든다.’ 같은 사명감과 강한 의지가 그 사람의 행동을 이끄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묵묵히 주어진 일을 해내는 중이었고, 지독하게 힘든 일을 견뎌내고 있는 중이었다. 책에서 의대 학업에 관하여 이런 문장이 나오는데, 좌절과 실망을 기본값으로 삼는다는 말이 인상깊었다. 그는 좌절과 실망을 기본값으로 일을 견뎌내는 듯 했다.

“의사가 방대한 의학 지식을 갖춰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그것이 남의 생사에 깊숙이 관여하는 자로서 갖춰야할 최소한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그 기본을 다지기 위한 의과대학 시절의 교육과정은 살인적이다. 학업의 양 마저 주어진 시간 안에 마칠 수 있는 것이 아닌 탓에 의과대학 시절은 한계에 부딪히고 깨질 수 밖에 없다. 좌절과 실망을 기본값으로 삼아 겸손해져야 하는 때다”
골든아워2 152p

자신감과 기대는 무슨 일이든 기분 좋게 시작하는 마중물이 되곤 하지만, 딱 작심삼일의 대표적인 예시처럼 내게는 시작만 만들어낼 때가 많았다. 그것이 꺾일 때면, 오히려 무거운 족쇄가 되기도 했다. 좌절과 실망을 기본값으로 삼는다면 다소 무거울지라도 힘들 때 좀 더 견뎌내고 지금보다 꾸준해질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의미에서 보람에 행복이 반드시 수반되는 것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대학에 있다보니, 주변에서 석사,박사 같이 공부에 공부를 더하는 사람들이 많다. 언젠가 공부에 공부를 더하는 것은 ‘인류의 지식’이라는 커다란 원에 ‘점’ 하나를 찍는 것과 같다라는 내용의 영상을 본 적이 있는데, 학부 과정조차 마치지 못한 내게 아래의 영상은 공부라는 것의 관점을 흔든 영상이었다.

황무지를 향하여 점을 찍는 것. 한 걸음 내딛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골든아워라는 책을 읽으며 공부에 공부를 더하는 것도 위에서 말한 원의 경계를 지키고 티끌만큼 넓히는 여러 방법들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참 좁게 바라보고 있었구나 싶다. 여전히 바라만 보고 있지만 말이다.

다시 한번 보람은 어쩌면 원과 그 바깥 황무지 사이의 경계선에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보람에 행복이 반드시 따라오는 것은 아닐 수 있겠지만, 그래도 나와 친구들, 가족들을 따뜻하게 만들 수 있는 기회는 그 경계에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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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을 지키는 사람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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