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스포 있음] 미키17 리뷰

KBC·2025년 3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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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만큼 느낄 수 있는 영화

영화계의 역사도 깊어지며 그 다양성과 깊이 또한 함께 넓고, 깊어져갔다. 그에 따라, 킬링 타임용 영화처럼 감독이 그닥 의도를 숨기지 않고 그대로 내비치어 표현하는 영화도 있는 반면, 숨겨진 의도로 말미암아 관객으로서 그 의도를 음미해보도록 하는 영화 또한 많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이를 구분짓기는 매우 주관적인 요소로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감독이 "이 영화엔 숨겨져 있는 저의가 많으니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라고 말해주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필자는 위 영화에 대한 혹평을 많이 듣고 간 상태에서 오히려 더 재미있는 관람을 약간이나마 비판적인, 비관적인 입장에서 보았기 때문에 할 수 있었지 않나라고 느꼈다. 즉, 많은 노력을 들여 영화의 어느 부분이 까내릴만한가? 이런 부분에 집중해서 많은 노력을 들였지만, 그 숨겨진 재미와 감독의 의도를 찾아내 정말 만족할 만한 영화였음을 밝힌다.


필멸의 존재에게 죽음이란?

영화에서 계속 주인공에게 던져지는 질문이 있다.

"죽는 기분은 어때?"

주인공은 휴먼프린터라는 고도의 기술로 인해 죽지만 다시 생성되어 다른 몸으로 옮겨져 그 삶을 계속 영위해간다. 아니 타의에 의해 이어져 간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죽음을 경험한 주인공은 쉽게 그 소감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영화 초반, 그의 인격을 데이터화하고 신체를 다시 프린트할 수 있는 그는 시스템을 믿는다는 것의 증빙으로 자살을 강요받는다. 하지만, 그는 끝끝내 자살하지 못한다. 아마 죽음 뒤에 다시 삶이 돌아온다는 것을 믿지 못한게 아닐까 싶다. 이는 영화 후반부에 가서도 변하지 않는다. 계속되는 죽음 뒤에 그의 이름 뒤에는 17, 18의 번호들이 붙지만, 여전히 그는 물음에 대해 명확하게 답하지 못하고 그저 무섭다고 할 뿐이다.
필멸의 존재인 인간에게 죽음은 필수불가결하며 피할 수 없는 존재이며 두려움의 표상이다


죽음 앞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영화의 배경인 미래의 지구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아니, 인생에서의 패배자들이 인생을 세탁하기 위해 식민지 개척 함선에 자원해 지구를 떠나게 된다. 지구에는 돈을 빌려주고 이를 갚지 못한 사람들을 그저 본인의 유희를 위해 죽이고 그 장면을 즐기는 자산가를 비롯한 정상적이지 않은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주인공 또한, 햄버거보다 마카롱을 더 선호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 친구의 꾀임에 넘어가 사채를 써 결국은 본인도 죽을 운명에 마주친 찰나였다. 그런 잔인한 운명 앞에서 주인공은 도망치듯 떠나갔지만, 익스팬더블이라는 복제 가능한 사람으로 함선에 탑승하게 된다.
그런 함선 안에도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 합리적이지 않은 , 정치에서 패배해 도망치듯 쫒겨나는 정치인, 엘리트 군인, 채무로부터 도망온 빚쟁이들... 그들 중 투표에서 패배하여 도망쳐온 정치인은 그의 아내, 주변인으로부터의 아첨과 조언으로 움직이며 진중하지 못하고 합리적이지 못한 모습을 보인다. 그는 타인의 뜻으로 움직이며 다른 사람들을 그저 도구 또는 부품 등으로 여길 뿐이며 이를 신의 뜻으로 포장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엘리트 군인 겸 경찰 겸 소방관과 같은 인물 또한 등장한다. 그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사회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는 모습을 보인다. 또, 아무 능력이 없으면서도 아첨 하나만으로 독재자 옆을 지키는 사람도, 그저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도 볼 수 있다.
각자 삶의 이유를 찾아가며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살기 위해서


인간은 그 존재 자체로 고귀한가?

이 영화에는 세 가지 존재들이 등장한다. 다른 존재들을 그저 자신의 수족, 하수인, 부품 등으로 생각하며 자신들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존재들, 사회를 위해 자신의 자리를 묵묵히 지켜 살아가는 존재들, 자신들의 터전을 위해 살아가며 이를 지키려는 존재들. 영화가 진행되며 식민화를 위해 도착한 행성에 크리퍼라는 외형이 끔찍한 생명체를 발견한다. 이들은 징그러운 외형으로 인해, 오해를 받고 인간의 공격을 받으며, 한낱 해충에 불과한 존재로 인식된다. 이들을 박멸해야할 존재인가?
한 인물의 대답으로 이에 대한 감독의 답을 찾을 수 있었다. 그들은 그들의 보금자리를 지키려 할 뿐이다. 인간은 무슨 권리로 그들의 보금자리를 빼앗으려 하는가? 진정으로 악한 것은 인간이 아닌가? 하는 부분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인간 사이에서 조차 다른 존재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 외형은 같으나, 타인을 존중하지 않는 존재들과, 타인을 자신과 같이 존중하는 존재들. 주인공은 죽어도 다시 새로운 몸에 옮겨갈 수 있기에 어느 존재들은 온갖 모진 실험과 어려운 임무들을 부여하여 주인공을 소모시킨다. 하지만, 고통스러워 하는 그의 모습에 함께 고통스러워하며 이를 비난하는 존재들 또한 함께 살아간다.

인간은 태어남과 동시에 고귀함을 부여받는가?

아니면

다른 존재를 본인과 같이 존중함으로서 그 고귀함을 찾아가는가? 또 그 고귀함은 절대적인가?

이런 부분을 생각할 수 있는 기회였다.


공동체의 이익 아래 소수의 존엄성은 무시될 수 있는가?

위의 모든 물음에 반해, 주인공이 부품처럼 도구처럼 죽어가면서 공동체는 우주 방사선에 대해 더욱 알게 되었으며, 외계 행성의 바이러스를 정복할 수 있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도, 끝끝내 행성을 알지 못하고, 바이러스를 알지 못하고 절멸했을 수 있다. 주인공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공동체는 효율적으로 생존할 수 있었다.
영화 후반, 휴먼 프린터는 폭파되고 이제 주인공은 더이상 프린팅될 수 없다. 영화에서는 해피 엔딩처럼 외계 생명체와 공존 체제를 갖추고 테라포밍에 성공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새로운 바이러스가 등장한다면, 익스펜더블이 없는 인류는 많은 희생으로서 그 백신을 개발하거나 아예 멸종할 수 있으며, 미지의 위협에 대해 전처럼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없을 것이다.
주인공은 어렸을적 교통사고로 어머니가 돌아가신 사고를 겪었다. 또 그 원인이 본인 때문이라고 생각해 모든 본인의 존엄성을 무시한 죽음을 비롯한 불이익에 대해서 받아들인다. 주인공을 존중하지 않고 부품처럼, 도구처럼 여겨온 과학자들이나 미치광이 지도자는 주인공이 죽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으로 취급하며 그의 존엄성을 짓이겼지만, 이 행위로 인해 공동체의 더 많은 사람들이 효율적으로 살 수 있었다. 또 주인공의 실수였지만 본인이 자원함으로써 익스펜더블이 되었고 수많은 죽음을 겪었다.

우린 그들을 비난할 수 있나? 그들은 할 일을 한 것 뿐이다


결과가 좋으면 그 과정은 아무래도 좋다?

영화 내내 이상하게도 많이 나오는 소재가 있다. 미치광이 정치인의 아내는 소스에 집착하며 나올때마다 본인의 소스가 어떤지 물어본다. 또, 사람들이 먹는 음식에 대해서도 유별나게 잦은 출연이 있었다.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소스들이 있다. 또 다양한 음식들이 있다. 우린 식사를 할 때 만들어진 소스에 만들어진 음식을 별 생각 없이 먹지만, 음식의 식재료를 위해 수 많은 동물들이 죽고, 갖가지 조리법에 의해 조리되고, 소스의 개발을 위해 많은 생명체들이 소모된다. 하지만, 소비자들은 이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미치광이 정치인의 아내는 소스에 너무도 집착한 나머지 외계 생명체의 꼬리를 갈아 소스로 만들어버린다. 이때 소스라고 부르는 무언가는 피인지, 소스인지 분간할 수 없는 무언가였다. 그녀의 눈에 외계 생명체는 그저 소스의 재료일 뿐이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 과정을 보았기에 역겨워 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다른 소스들 또한 그 제조과정, 개발과정은 비슷한 종류들이 있었을 것이다.

인간의 행복이라는 결과를 위해 그 과정이 어떻듯 상관이 없는 것인가?

영화계를 향한 감독의 비판인가?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소스에 대한 비유는 현 영화계를 향한 감독의 비판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 후반 주인공의 악몽에서 정치인의 아내는 주인공에게 바닥에 떨어져 있는 빨간 소스를 어떤지 먹어보라고 하지만, 미심쩍었던 주인공은 그녀에게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물어본다. 그 물음에 대해 그녀는 순서가 잘못되었다고 답한다. 먹어보는것이 먼저, 어떻게 만들었는지는 뭐 아무래도 좋다 이거다.
현재 감독이 몸담고 있는 영화계 또한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관객들은 영화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대다수 관심이 없다. 그저 생각없이 보고 재미있다 또는 없다 판단할 뿐이다. 하지만, 그 영화를 만들기 위한 그 과정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영화 관계자의 많은 희생과 노력이 있었을 것이고, 때로 어떤 영화들은 부정과 부패 혹은 범죄와 연류되었을 수도 있다. 또한, 감독이 영화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메세지에 대해서 그닥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저 누군가 완성된 음식을 떠먹여주기만 기다릴 뿐
이 영화는 어쩌면 현 영화계를 향한 감독의 비판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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