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짤렸다 (+퇴사 부검)

정형진·2022년 11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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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개월 간 다니던 내 인생 첫 회사가 망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직 망한 건 아니고, 망하기 직전까지 와서 마지막 버티기에 들어갔다. 그래서 같이 일하던 동료들과 함께 하루 아침에 직장을 잃었다. 지금 당장 큰 돈을 가져다 주기 힘든 사람들은 전부 회사를 떠나야 했다. 다함께 구축했던 시스템은 정말 간신히 유지보수만 할 수 있는 인원들만 남았고, 솔직히 그마저도 오래가기는 힘들어 보였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이 모든게 정말 하루아침에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에, 떠난 사람도 남은 사람도 모두 어안이 벙벙했다. 다들 억울하고 분하고 서운했지만, 그런 마음을 제대로 정리하거나 표출할 시간도 올바르게 주어지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 이게 스타트업이지...

그렇지만 별 수 있나. 회사가 이제 돈이 없다는데.. 그동안 봐왔던 정이 있었으니 얼굴 붉히며 헤어지고 싶지도 않았고 앞날을 응원하면서 그렇게 서로를 떠나보냈다. 갑작스러운 상황 전개에 놀란 가슴이 아직도 진정이 안되기도 했고, 솔직히 상처도 많이 받았다. 그래도 앞으로 나아가야 했고 오히려 그런 생각을 하면 설레기도 했다. 그렇게 반성과 설레임이 뒤섞인 심정으로 약 1년 간의 첫 회사 생활을 되돌아 보기로 했다.

아쉬웠던 점

기술 부채

도입하고 싶었던 새로운 기술, 당장에라도 리팩토링이 필요한 메인 프로젝트 등등.. 내 언젠가는 이걸 팀원들과 다같이 손보리라 싶은 부분이 한둘이 아니었다.

처음 입사했을 때만해도 메인 페이지는 CRA 기반 프로젝트에다가 알 수 없는 제이쿼리 코드들이 뒤섞여 있었고, 모듈도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클래스 이름에만 의존하여 CSS를 작성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미 동명의 클래스가 있는데도 인지하지 못한 채로 다른 코드를 작성하다가 오류가 나면 디버깅 하는 데만 시간을 엄청나게 소모할 수 밖에 없었다. 협업에 전혀 적합하지 않은 환경이었달까.. 또, reset css 같은 것도 사용하지 않아서 스타일링에 정말 애를 먹었다. 이외에도 거의 모든게 갓 시작한 프로젝트였음에도 이전 근무자가 빠짐없이 어설프게 작성해두고 간 레거시들 덕분에 확실하게 고통받았던 기억이 있다. 이럴거면 왜 리액트를 쓰나 싶은 생각도 들었었다.

또 다른 프로젝트는 Tailwind CSS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디자인 시안 없이 작성된 코드인데다가 가독성이 굉장히 좋지 못했다. 팀원들 모두 Tailwind를 잘 몰랐고, 굳이 사용할 이유도 찾지 못해서 결국 전부 다 뜯어내는 과정을 거쳤었다. Tailwind에 대한 안 좋은 인상도 이 회사의 레거시 코드를 봤기 때문에 생겨났었다. (지금은 아님! Tailwind 최고!)

그리고 어느 프로젝트던 폴더 구조가 제멋대로여서, 컴포넌트와 페이지의 구분이 전혀 없었다. 처음에는 그래도 괜찮았지만, 시간이 지나고 규모가 커질수록 원하는 파일을 찾는 데에만 시간을 왕창 버리고 있었다.

이 문제들은 메인 프로젝트를 제외한 다른 프로젝트에서는 수정하자는 의견을 적극적으로 밀어붙여서 팀원들과 합의 하에 훨씬 보기 좋은 폴더구조로 수정하고 styled-components를 도입하는데 성공했다! 혼자 작업할 때는 어렴풋이 불편하니까 그냥 고쳤겠지만, 함께 하는 프로젝트였기 때문에 동료들에게 이걸 왜 고쳐야하는지를 공감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과정이 필요했기 때문에 결국에는 정말 좋은 경험이었던 것 같다. 내가 당연하게 사용하던 기술들이 왜 필요한지 정리할 수 있었고, 앞으로도 새로운 기술을 도입할 일이 있으면 그 이유나 타당성에 대해서 철저하게 고민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러나 슬프게도 가장 코드 상태가 엉망이었던 메인 프로젝트가 당장에 우리 회사에 돈을 가져다 주기 시작한 프로젝트였다. 그래서 굴러가기 시작한 바퀴를 중간에 멈추고 다듬어서 수정하기 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짐을 싣기에 바빴던 것 같다.

언젠가는 TypeScript와 Next.js, 그리고 TDD를 도입하자는 이야기를 몇 번이나 했지만 이제와서는 결국 지키지 못한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사수 부재

먼저 일하고 계셨던 프론트엔드 엔지니어가 계셨지만 그 분은 사수는 아니었다. 입사 첫 날에 "저 사람은 네 사수가 아니야" 라고 했던 부장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그 분은 프론트엔드 팀이 앞으로 해야할 일들이나 전체적인 진행상황을 파악해주시고, 옆에서 도움을 크게 주시는 분이기는 했지만 기술적인 도움을 주시는 분은 아니었다.

부장님도 훌륭한 선배 프로그래머였지만, 어디까지나 데브옵스 역할을 주로 해주셨다. 아쉽지만 누구도 프론트엔드 엔지니어로서 필요한 기술이나 지식을 전수해주시는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결국에는 기술을 혼자서 배우고 나아가는 것이 최선이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참 어렵지만, 나를 포함해서도 주변에 '잘' 혹은 '깊게' 아는 사람이 없어서 아쉬웠다. 이 곳에서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결국 우물 안 개구리인거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있었기도 하다. 어떤 기술을 사용하려고 해도 '정도'를 알려주는 사람이 없다고 해야하나.. 예를 들면 useEffect 내부에서 cleanup function 없이 열심히 axios 함수를 호출했었는데, 코드 리뷰까지 받았어도 이게 잘못된 건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아서 나중에야 이러면 안된다는 걸 스스로 깨닫고 관련 코드를 전부 고친 적이 있었다.

무산된 프로젝트들

정말 하고 싶었는데 실제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한 프로젝트들이 많다. 회사의 기술 블로그를 만들자는 이야기가 나와서 개인적으로 개츠비를 공부해서 실제로 개인 블로그까지 만들어보기도 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실무에서는 그럴만한 시간이 주어지지 못했다. 또, 사내에서 하는 프로젝트 말고도 아예 다른 사이드 프로젝트를 업무 외 시간에 해보자는 제안도 있었는데 결국 지키지 못하고 나오게 되었다. 그 외에도 실제로 진행했다면 진짜 재밌고 좋은 경험이 될 수 있었을텐데 결국에는 판에 박힌 일만 하다가 나온 것은 아니었을까 싶은 아쉬움이 있다.

좋았던 점

훌륭한 동료들

좋은 사람들을 정말 많이 만났다. 첫 회사였기 때문에 회사 경험 또한 완전 처음이었는데도 '이런 사람들과 일할 수 있는 기회는 내 인생에 다시 찾아오지는 않겠구나' 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다. 누구나 자유롭게 의견을 표출할 수 있었고, 그래서 아이디어 교류도 풍부했다. 기술 부채는 있었어도 우리가 가진 카드 안에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골라서 일을 진행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동료들이랑 함께 있는게 너무 좋았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는게 느껴져서 더 좋았다. 보고 싶다 우리 동료들..😭

체계적인 업무 프로세스

기획 - 디자인 - 개발의 프로세스가 명확했기 때문에 문제를 발견했을 때 누구와 이야기해야 하는지가 비교적 뚜렷한 편이었다. 오류나 요구사항이 발생하면 항상 노션에 이슈를 생성하면서 일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뭘 해야할지 헤맬 일도 적었고 작업 중인 이슈를 설명하느라 쓸데없는 시간 낭비를 하지 않을 수 있었다.

또, 매일 스크럼을 통해서 각자가 어떤 일을 하고 있고, 앞으로 어떤 일을 할 건지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던 점도 아주 좋았다. 이게 어쩌면 너무 당연한 것일수도 있고 아니면 발전의 여지가 한참 많은 부족한 방식이었을 수도 있지만, 이마저도 전혀 하지 않는 회사들이 많다고 들어서 남겨본다.. 애자일하지 않은 부분도 많았지만 아무런 경험도 없던 나에게는 이런 프로세스가 갖춰진 환경에 놓인 것만으로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현업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었던 것

이 회사에 들어오기 전의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니꼴라스 선생님만 믿고 열심히 바닐라 자바스크립트부터 리액트 공부까지 달려왔지만 코드를 작성하는 표면적인 기술들만 알고 있었지, 현업에서 실제로 필요한 지식들은 많이 부족했다. 심지어 JWT가 뭔지도 몰랐다.. 🤫

그리고 배포에 대한 지식도 전혀 없었다. nginx가 뭔지, 정적 사이트 생성기가 뭔지, SSR을 왜 해야하는지.. 그런 '필요성'에 대한 갈증은 직접 느껴보기 전까지는 알기 힘든 것들이었다. 나 혼자 공부할 때는 스스로 멋있을 것 같은 것만 만들었기 때문에 대부분 그런 필요성을 피해갔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클라이언트가 요구하는 것을 만들다보니 자연스레 필요성에 대한 고민과 지식 습득이 늘어나게 되었던 것 같다.

가장 좋은 것은 터미널 환경이 많이 편해졌다는 사실인 것 같다. 원래도 단축키 매니아였는데 vim에 빠지게 되면서 터미널에서만 코딩을 해보기도 했다. 회사와는 상관없이 개인적으로 공부한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회사가 계기를 마련해준 것 같다!

결과물에 대한 생생한 피드백

개인적으로는 사내 전산 시스템을 만드는데 많은 업무 시간을 투자했었다. 기존에는 외부 프로그램으로 사용하던걸 아예 자체 제작 프로그램으로 대체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완전히 바닥부터 새롭게 만들어야 했다. 또한, 사내에서 바로 사용하는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업데이트 때마다 직접 사용하는 실무 직원들 앞에서 설명하고, 요구 사항을 들으면서 바로바로 피드백을 받을 수 있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내가 만든 코드로 짜여진 프로그램을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사용한다는 것도 신기했고,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금전적인 이익을 올리고 있다는 것도 정말 신기했다. 긍정적인 피드백들을 받으면 자신감도 정말 많이 생겼다.

그리고 개발자 방식으로 말하기보다는 사용자 눈높이에 맞춰서 이야기하는 법을 정말 많이 배운 것 같다. 사용자들에게서 들어오는 요구사항에 대한 내용들이 개발자가 상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일들이 많았는데, 그런 경우에 직접 이야기하면서 조율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하는게 효율적인지를 많이 체감하였다.

앞으로의 계획

최근에 건강 상태가 좀 안 좋아졌다고 느끼기도 해서 당분간은 운동도 하면서 휴식 기간을 가지게 될 것 같다. 지금은 "오히려 다행이다!" 라는 생각도 든다. 이제 마음 놓고 내가 하고 싶은 공부도 잔뜩 할 수 있을테고, 못 가서 안달난 일본 여행도 다녀오고 싶다. 그러면 이 먹먹한 마음도 조금 해소될 것 같다.

그러고 나면 다시 이력서 업데이트와 동시에 새로운 사이드 프로젝트를 시작해보려고 한다! 어떤 프로젝트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열심히 달려봐야지. 인생,,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너무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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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도 잘 모름

4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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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1일

갑자기 짤리신거면 실업급여 한 번 알아보세요! 지인이 실업급여 받아서 힘든맘도 잘 치유하고 6개월간 놀면서 잘 생활하다가 기간 다 되서 재취업했는데 부럽더라구여...ㅎㅎ

1개의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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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5일

배운 게 많아 보이시네요 👍
pyk0844님 말씀대로 고용보험 가입일 180일이 넘으면 월급의 70% 정도 받을 수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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