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이 공중제비를 했던 이유

구름미각·2024년 12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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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여긴 개발 관련 블로그인데?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라는 책을 보고 그냥 느끼고 사실검증을 하기 위한 글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너무 개발 얘기만 하면 사람들이 안오거든요.

화성이 공중제비 하는 이유

요즘 세상에 밤하늘을 보고 사는 사람들이 어디있겠냐 하지만 100년 전까지만 해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곳이 많아 하루 일과를 끝내고 밤하늘을 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사람들은 밤하늘에 붙어 있는 달과 작고 수많은 별들을 바라보며 저 너머의 세상이 궁금한 적이 존재했다. 우리가 흔히 듣는 달토끼 설화도 이에 바탕하여 사람들이 상상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 때 상상한 것들이 진짜인지 아님 그저 상상에만 미치는 것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우린 땅에 붙어 있고 별들은 아득히 멀리 있어 그저 앉은 채로 별들을 바라보면서 추측하는 것 밖에 할 수 없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밤하늘에는 어느 정도의 규칙이 있었는 데, 특정 주기로 달이 모양이 바뀐다라든지, 별들의 위치가 특정 위치로 반복해서 이동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는 지구와 가까운 태양계 행성에는 이상한 특징이 있었는 데 잘 돌아가다가 갑자기 역행하여 마치 공중제비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것을 겉보기 역행이라고 한다.
이러한 역행을 보이는 것은 지구에서 바라보았을 때 태양계의 모든 행성들이 포함된다.
겉보기 역행은 고대인들에게 수수께끼였으며, 그러한 천체들이 "행성들(planets)"이라고 이름 지어진 한가지 이유가 되었다.("플래닛'(Planet)"은 그리스어로 "방랑자"를 뜻하는 단어에서 파생되었다.)


출처 -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Apparent_retrograde_motion.gif

이러한 역행은 당시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로 기록하고 계산할 수는 있으나 굉장히 복잡하고 당시 태양과 달을 제외하고 발견된 이러한 방랑자들이 다섯(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이나 더 있었기 때문에 이 때에 기록된 행성들의 경로는 한눈에 보기에 어려웠다.

출처 - https://namu.wiki/w/%EC%B2%9C%EB%8F%99%EC%84%A4

이 때 폴란드에서 코페르니쿠스가 등장해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거 그냥 태양 중심으로 기록하면 더 계산하기 쉬워지는 거 아님?)

1514년에 그는 지구를 그냥 하나의 행성으로 두고 세 번째 자리에서 완전한 원 궤도를 도는 모형을 제작해보고 Commentariolus(짧은 해설)라는 논문을 발표해 당시 사람들에게 선보였다.

당시에는 1533년에 오히려 교황 클레멘스 7세측에서 의견을 지지하여 오히려 출판을 장려했다고 한다.

그래도 그가 사망할 년도인 1543년 에는 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정식으로 출판할 정도로 점점 지동설에 가까워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사람들이 여호수와가 10장 13절을 예시로 들며 "성경에서 하나님이 여호수아보고 멈추라 명한 건 태양이지 지구가 아니다."라는 소리를 하긴 했다고 들려오지만. 슬프게도 이 책은 400부도 팔리지도 못했다고 한다.

이 의지는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이어 받아 1610년 목성의 4개의 위성을 발견하였고, 지구도 이 목성과 마찬가지로 태양을 돈다고 Sidereus Nuncius(별이 전하는 소식)에서 밝혔다.

그러나 이 소식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을 믿는 사람들이랑 마찰을 만들게 되었다. 이 중에서 특히 도미니코회 수도사인 토마소 카치니가 심하게 갈릴레오를 공격하고 카치니는 갈릴레오를 종교재판소에 이단으로 고발하기까지 했다.

이런 분위기에서도 갈릴레오는 물러서지 않았다. 《크리스티나 대공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글에서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설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성경은 과학책이 아니고, 우리가 제대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성경이 진리를 말하지만 과학적 세부사항을 가르치려는 건 아니라고 하며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을 대놓고 비판하기도 했고다.

근데, 1615년에 다시 로마로 갔을 때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종교개혁 이후로 교황청이 새로운 사상에 굉장히 예민해져 갈릴레이가 코페르니쿠스주의를 설파하려는 게 마치 교회의 권위를 침해하려는 시도로 보였다.
그래서 로베르토 벨라르미노 추기경이 갈릴레오한테 "코페르니쿠스 얘기 그만해"라고 충고할 정도 였다.

갈릴레이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흑점에 관한 편지들》 같은 책도 썼다.
근데 이 책 때문에 또 문제가 생겼다. 지동설이 성경에 반한다고 피사 대학에서도 태클이 들어왔다. 이에 갈릴레오는 "성경은 진리지만, 과학을 가르치려는 건 아니야"라고 해명했지만, 성직자들 사이에서 점점 적으로 여겨졌다.

결국 1616년에 종교재판소에서 코페르니쿠스주의는 1835년에 풀리기 전까지 금서로 지정되었다.

결국 화성이 다시 공중제비를 돌 수 밖에 없는 이론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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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인맥을 만들어 나가는)학생 개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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