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게 된 이유

Modn·2020년 12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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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게 된 이유

글쓰기가 좋았다.

얼마 전, 점심시간에 회사 동료와 산책을 하다가 그분이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저도 그런 편인데, 준혁님은 자기표현 욕구가 강한 것 같아요!' 이 말을 듣고 나에 대해 몰랐던 사실을 깨달았다는 듯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의 취미는 춤을 추거나 그림을 그리는 일이었다. 무엇인가 좋아하는 이유야 다양할 수 있지만 두 취미 사이의 공통점을 뽑자면 나를 표현하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도 이와 같다. 세상에 나의 세계관을 드러낸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했는지 신중하게 말을 골라 사람들에게 보여준다. 사람들은 이를 가지고 나와, 혹은 타인과 소통한다. '좋아요'나 '댓글'로 자신의 감정이나 의견을 드러내 주기도 하고, '무관심'처럼 소극적이나 파괴적인 반응을 보여주기도 한다. 글을 쓰는 동안에도 누군가와 얘기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가상의 상대방은 내가 쓰는 글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이건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갑자기 이 말은 왜 하는 거야?'와 같이 그 자리에서든 다음 날 아침이든 피드백을 준다. 가끔은 내가 표현한 방식을 몰라주어 마치 회심의 드립이 철저히 무시당한 것 같은 무안함을 받기도 하지만 사람들과의 관계라는 측면과 나라는 존재의 증명이라는 측면에서 나는 나를 표현하기를 좋아하고 글쓰기를 좋아한다.

글쓰기가 익숙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공부엔 흥미를 붙였고 성취욕이 높았으나 그에 반해 기억력이 좋진 않았다.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놀기만 하는 것 같은데 성적이 좋은 사람. 그 사람이 나는 아니었다. 좋은 성적을 받으려면, 장학금을 받으려면 그들과의 간극을 메꿀 수 있는 장치가 필요했고 그게 나에게는 메모였다. 메모광까지는 아니었으나 메모의 장점을 많이 알고 있었다. 메모는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적는 행위가 아니다. 메모라는 행위를 통해 어떤 형태로든 Input 된 요소에 대한 재가공이 들어간다. 한 번 더 대화의 문맥을 파악하거나 나에게 맞게 분류를 하는 과정에서 나만의 맥락이 형성되고 기억에 잘 남는다. 다양한 개념들을 정리하다 보면 추상화가 익숙해지기 때문에 새로운 개념을 익히더라도 기존에 만들어 놓은 추상화된 관념(모델)을 적용하여 더 친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메모의 장점을 이해하고 계속 연습해나가면서 점점 더 글쓰기가 익숙해졌다. 커리어를 시작하고서는 이를 연습할 환경이 더 잘 갖추어졌다. 오히려 대학교때보다 메모를 습관으로 만들기가 수월했는데, 한 자리에서 한 가지 직무를 한다는 점과 컴퓨터를 계속 켜놓고 좋은 메모 앱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게 그 이유였다. 글을 써야 할 일도 많았는데 팀 내에 공유하기 위한 기술의 문서화 작업, 회의에 대한 내용 정리, 사람들에게 업무와 관련된 메시지를 보낸다든지, 앞으로 남은 일을 정리하고 우선순위를 정하는 일들까지 더하면 코딩을 하는 시간만큼이나 글을 쓰는 시간이 많았다. 많이 쓴다는 것이 잘 쓴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지만, 영어의 예를 들자면 연설은 못 하지만 Small talk를 할 수 있는 정도의 익숙함은 되는 것 같다.

글쓰기가 필요했다.

사실 개발자로 커리어를 시작하면서 블로그를 써야 한다라는 생각은 많이 했다. 글을 쓸 생각도 있고 재료도 있고 동기도 있었다. 이름(아이디)만 얘기하면 모두가 아는 기술 블로거들의 인지도가 부러웠고 잘 정돈된 블로그를 만들어간다면 저들과 같아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사회 초년의 욕심이 있었다. 매일 익히는 것이 많고 그에 따라오는 생각도 많았다. 보고 익히고 생각한 것을 정리하고 있었으니 글을 쓸 재료도 적진 않았다. 이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개념이 정립되면서 내 경험을 공유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인을 좀 후하게 평가하자면 정리도 곧 잘하고 설명도 곧 잘하는 편이었다. 그 당시에도 동기는 충분했다.
그런데도 글을 쓰지 않은 이유는 그 시점에 블로그를 운영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들이 많아서였다. Product를 만들어야 했다. 사업을 성장시켜야 했다. 돈을 벌고 빚을 갚기위해 글을 쓰기보단 코드를 작성하는 것이 수지에 맞았다. 어느 정도의 게으름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글을 써야 하는 이유가 글을 쓰지 않던 이유보다 커짐을 느꼈다.

삶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경력이 쌓임에 따라오는 커리어와 경제적인 안정감이 있었고 이에 따라 정말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지금 해야 하는 일과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구분할 수 있게 됐고, 이에 맞게 시간을 분배할 수 있게 됐다. 그 과정에서 블로그를 운영하는 것이 "지금 해야 하는 일"의 카테고리에 올라왔다.

글을 쓸 재료가 더 풍부해졌다. 효과적이라고는 못하겠지만 일을 시작하고 그간 정말 다양한 경험을 했다. 개발자로서 새벽에 깡패가 찾아와 협박을 하고, 그 상황에서 개발을 하는 경험을 한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경험을 포함하여 일한 지는 4년차에 중간중간 외주나 창업까지 기간을 더하면 6년차는 되는 것 같다. 현재 일하고 있는 눔에 오기까지 3개의 회사에서 정규직으로 있었고 사이드로 접한 기업의 수가 그 배가 되어간다. 그 와중에 프런트 엔드 개발과 리드, 백 엔드 개발, 그로스 엔지니어와 같이 엔지니어로서 성장하면서 대표, PM, COO 역할을 수행했고 간접적으로 데이터 분석가 역할도 수행하고 있다. 일한 기업의 도메인도 다양한데 AI, 블록체인, 코인거래소, 읽는 매체를 거쳐왔으며 지금은 IT/헬스케어에서 일하고 있다. 대부분의 기업은 스타트업이었으며 모두 다른 투자 스테이지에 있었다. 굵직하게 글을 쓸 키워드를 뽑아도 '스타트업', '엔지니어', '그로스' 가 있고, 이 주제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필요로하는 정보나 경험, 내한 생각을 전할 수 있다.

브랜딩 욕구가 더 커졌다. 개인이 타인의 도움 없이 학습과 경험만으로 성장하는 것엔 한계가 있음을 느꼈다. 사회에는 같은 종류의 일이라도 더 임팩트가 있는 일이 있다. 내가 쓰는 코드 한 줄이 웹 사이트에 있는 버튼 하나의 크기를 키울 수 있는가 하면, 100만명이 겪고있는 버그를 고치고 매출을 끌어올려 줄 수도 있다. 다양한 기업을 접하면서 그 안에서 내가 했을 때, 더 임팩트가 있을 법한 일이 보였다. 더 임팩트 있는 일을 찾아 할 수 있으려면 현재의 내 네트워크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보여주고 알려야한다. 나를 보는 사람들이 나의 지식과 세계관을 이해하고자 하고 이를 통해 더 임팩트 있는 일을 같이 하자고 제안할 수 있는 상태가 되거나 내가 그러한 제안을 했을 때 나를 신뢰할 수 있을만한 장치를 만들어야 했다. 다양한 방법이 있겠지만 글을 쓰고 공유하는 것 만큼 나를 빠르고 잘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이유들도 많겠지만 위와 같은 굵직한 이유로 나는 글을 쓰기로 했다. 앞으로 내가 쓸 크고 작은 글들이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거나 신선함을 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나를 잘 표현해 줄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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