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같은 UX

negu63·3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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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상에서 가장 바보 같은 UI

레딧의 서브레딧 r/BadUIBattles에는 일부러 이상한 UI를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볼륨을 0.001씩 올리는 버튼, 휴대폰을 기울여야 움직이는 볼륨 조절기, 생년월일 하나 입력하려고 달력을 수십 년 치 넘겨야 하는 화면. 사용자를 얼마나 황당하게 만들 수 있는지 겨루는 일종의 장난이다.

이런 것들을 보고 있으면 웃음이 난다. 대체 이런 생각은 어떻게 하는 걸까. 어처구니없는 발상들이 계속 나오고, 사람들은 더 끔찍한 인터페이스를 만들어 서로에게 보여 준다.

그런 UI들을 보다가 문득 생각이 다른 곳으로 튀었다.

우리가 매일 쓰는 앱에도 참 불편한 점이 많지 않았던가?

가입은 버튼 한 번이면 끝나는데 탈퇴하려면 메뉴를 몇 개씩 찾아 들어가야 한다. 동의 버튼은 큼지막한데 거절은 어딘가에 작게 숨어 있다. 원하지 않는 것을 끄려고 하면 몇 번이고 다시 묻는다. 사용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려는 순간 갑자기 길이 복잡해진다.

처음에는 같은 종류의 불편함인 줄 알았다. 쓰기 불편하고 귀찮고, 도대체 왜 이렇게 만들어 놨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둘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장난으로 만든 UI는 누가 봐도 엉망이다. 만드는 사람도 그것이 엉망이라는 걸 안다. 그 불편함 자체가 농담이고, 사용자가 황당해하는 모습이 웃음의 목적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마주치는 어떤 인터페이스들은 웃기려고 만든 게 아니다. 사용자에게 필요한 일을 더 쉽게 해 줄 능력이 없어서 그렇게 만든 것도 아니다.

오히려 사용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와 반대되는 선택을 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불편함을 설계한다.

이런 것들을 다크패턴이라고 부른다.

볼륨을 0.001씩 올리는 버튼은 차라리 정직하다. 누가 봐도 쓰기 불편하다는 걸 숨기지 않으니까.

반면 다크패턴들은 미려한 디자인과 친절한 문구 뒤에 숨어 있다. 사용자가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는 줄 알았는데, 지나고 보면 기업이 원하는 일을 하도록 등 떠밀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평소 앱을 쓰다가 짜증이 치밀었던 순간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탈퇴 버튼을 찾아 헤매던 일, 분명 거절했는데도 다시 나타나던 팝업, 무심코 누를 뻔했던 동의 버튼. 그때마다 왜 이렇게까지 불편하게 만들어 놨을까 싶었는데, 장난스러운 UI를 보다가 오히려 그 이유를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이다.

방금 전까지는 볼륨을 0.001씩 올리는 버튼을 보며 웃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실제로 겪었던 일들을 떠올리니 마냥 웃을 수 만은 없었다.

다크패턴. 진짜 X같은 UX는 따로 있었다.

※ 이 글에서 '당신'은 독자가 아닌, 사용자를 기만하여 사익을 추구하는 개인과 기업을 가리킨다.

2️⃣ 버튼 하나 숨기려고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는가?

테크 기업들은 사용자를 사랑한다. 적어도 그들이 무대에 올라 발표할 때는 그렇다.

사용자 중심. 직관적인 인터페이스. 접근성. 포용성. 인간 중심의 기술. 듣기 좋은 말이 넘쳐난다. 그들의 제품은 삶을 더 편리하게 만들고, 복잡한 절차를 덜어 주고, 누구나 쉽게 기술을 이용하도록 돕는다고 한다.

물론 실제로 그렇게 하는 좋은 제품과 좋은 디자이너는 존재한다. 문제는 그 대단한 구호를 외치는 업계의 일부가 동시에 정반대의 일을 한다는 데 있다.

사용자들이 어떤 버튼을 먼저 보는지, 어느 문장에서 망설이는지, 무엇을 기본값으로 두면 그대로 받아들이는지 연구한다. 실험을 설계하고, 데이터를 수집하고, 작은 문구와 버튼 색상을 바꿔 가며 결과를 비교한다. 그 과정에 막대한 시간과 인력과 돈을 들인다.

그렇게 쌓아 올린 전문성을 어디에 사용하는가.

사용자가 원하는 작업을 더 쉽게 끝내도록 도울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조직은 사용자가 원하지 않는 가입을 하게 만들고, 거절할 선택지를 놓치게 하고, 해지를 포기하게 만드는 데 그 능력을 쓴다. 방해물을 없애는 기술을 발전시켜 놓고, 기업에 불리한 행동 앞에만 방해물을 심는다.

사용자가 무슨 일을 하고 싶어 하는지 이해했다면, 그 일이 기업에 불리하더라도 수행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사용자 경험 아닌가? 그런데 기업이 원하는 일만 매끄럽게 진행되고 사용자가 원하는 일은 갑자기 어려워진다면, 누구의 경험을 개선했다는 것인가.

전환율이 올랐다고 한다. 구독 유지율이 좋아졌다고 한다. 대시보드의 그래프가 초록색으로 빛난다고 한다. 수익과 지표는 비즈니스에 필요하다. 하지만 그 수치가 올라간 이유가 사용자가 서비스를 더 좋아해서인지, 떠나는 길이 너무 귀찮아 포기해서인지는 완전히 다른 문제다.

다크패턴은 절대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기업의 이익을 위해 사용자와 사회에 비용을 전가하는 기만적 상술이다. OECD는 2024년 20개국 3만 5천 명 이상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약 90%가 다크 커머셜 패턴의 영향을 받은 경험이 있다고 발표했다. 이것이 모든 앱의 90%라는 뜻은 아니지만, 이런 경험이 얼마나 넓게 퍼져 있는지 보여 주는 수치다.
OECD, 2024, 「Stronger consumer protections needed to address current and emerging harms consumers face online」.

기술을 몰라서 일어난 실수는 개선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의 행동을 잘 이해한다는 사실 자체를, 사람을 기만할 수 있는 능력으로 바꾸는 조직에는 다른 질문을 해야 한다.

그렇게까지 잘 알고 있으면서, 왜 사용자의 편에 서지 않는가?

버튼 하나 숨기려고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는가?

3️⃣ 사람들은 당신이 만든 앱 하나 쓰자고 사는 게 아니다

사람들은 바쁘다. 출근하고, 일하고, 공부하고, 가족을 돌보고, 장을 보고, 청소하고, 마침내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온다.

그런 사람들이 일상 속에서 잠깐 앱을 켠다. 필요한 물건을 사거나, 예약을 하거나, 구독을 해지하려고 한다. 화면에는 버튼이 몇 개 있고, 어느 쪽은 눈에 잘 띄고 어느 쪽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 작은 차이가 누군가에게는 오랜 연구 끝에 나온 설계의 결과일 수 있다. 그러나 사용자는 그 화면 앞에 몇 초쯤 머물 뿐이다.

그 짧은 순간에도 항상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고?

모든 문구를 꼼꼼하게 읽고, 버튼의 위치와 색상을 의심하고, 무료 체험의 조건을 추적하고, 동의의 범위를 분석하고, 설정 메뉴 어딘가에 숨어 있는 거절의 가능성까지 찾아내야 한다고?

사람들은 당신들 앱 하나 쓰려고 사는 게 아니다.

피곤하면 주의력이 떨어지고, 바쁘면 문장을 건너뛰고, 익숙한 위치의 버튼을 무심코 누르기도 한다. 이것은 특별히 어리석은 사람들의 결함이 아니다. 그냥 인간이 그렇다.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고, 인간의 행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보다 잘 아는 사실이다.

그래서 더 악질적이다.

상대방이 어느 순간에 실수할지 예측할 수 있는 전문성이 있다면, 그 실수를 막는 데 쓸 수도 있다. 그런데 일부러 실수하기 쉬운 상황을 만들어 놓고 그 결과를 사업 성과로 삼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여기에는 정보의 비대칭성도 있다. 기업은 인터페이스를 설계한 목적을 알고, 여러 버전을 비교할 수 있고, 수많은 사람의 반응을 집계할 수 있다. 반면 이용자는 자신이 보는 화면이 어떤 실험과 판단 끝에 등장했는지 알기 어렵다.

이를 생각하고 있자면, 어른이 어린아이의 무지를 이용해 속이는 장면이 떠오른다. 핵심은 사용자가 아이처럼 무능하다는 뜻이 아니다. 한쪽이 상대의 한계에 관한 지식을 압도적으로 많이 갖고 있고, 그 차이를 상대에게 불리하게 이용한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 피해는 한 번의 잘못된 클릭에서 끝나지 않는다. 금전적 손실로 이어지고, 그래서 다음 앱에서는 더 경계해야 하고, 그다음 앱에서는 더 많은 것을 의심해야 한다. 결제 버튼을 누르기 전에 함정을 찾아야 한다는 습관이 쌓인다.

그렇게 좋은 UX가 약속했던 편리함은 거꾸로 사라진다. 사용자는 앱을 쓰는 게 아니라 앱을 경계하는 법을 배운다.

인간의 약점을 이해하는 것이 언제부터 인간의 약점을 공략할 자격이 되었는가?

4️⃣ 출근길은 미끄럼틀, 퇴근길은 안데스 산맥

그렇게 만들어 놓고도 말한다.

“동의하셨잖아요.”
“결국 선택하신 건 고객님입니다.”
“해지는 언제든 하실 수 있습니다.”

정말 편리한 문장이다. 동의 버튼을 누른 것은 사용자의 손가락이다. 가입을 완료한 것도 사용자다. 구독을 취소하지 못한 채 다음 달 요금을 낸 사람도 사용자다. 사실만 나열하면 책임은 전부 그쪽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 손가락 앞에 놓인 선택지의 구조를 만든 것은 누구인가?

상상해 보자. 당신의 회사가 출근길에는 미끄럼틀을 설치했다. 발을 들이면 금세 사무실로 미끄러져 내려간다. 반대로 퇴근길에는 안데스 산맥을 옮겨다 세워 놓았다. 퇴근하려면 산을 넘고, 길을 헤매고, 몇 번이나 출발 지점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렇게 다들 퇴근하기를 포기해버린다.

그러고는 누군가 밤늦도록 사무실에 남은 사람들을 보며 이렇게 말한다.

“보십시오. 우리 직원들은 자발적으로 야근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애사심이 대단합니다!”

말이 되는 소리인가.

사용자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과, 그 선택이 실질적으로 존중받고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나는 적어도 한쪽에는 미끄럼틀을 놓고 다른 쪽에는 산맥을 세워 놓은 사람에게 선택의 자유를 배울 생각은 없다.

가입 버튼이 필요한 것처럼 해지 버튼도 필요하다. 개인정보 제공을 수락할 수 있다면 거절할 수도 있어야 한다. 그만두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혔는데 계속 혜택을 보여 주고, 사라질 서비스를 경고하고, 마음이 바뀌지 않았는지 되묻는 과정을 끝없이 반복할 필요는 없다.

물론 사고를 막기 위한 확인은 필요하다. 중요한 데이터를 삭제할 때 되돌릴 수 없다고 알려 주는 일, 본인 확인을 요구하는 일은 정당한 이유가 있다. 그런 절차까지 없애라는 소리가 아니다. 문제는 기업에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만 선택의 난이도를 고의로 기울이는 행위다.

그리고 탈퇴 화면을 헤매다 보면 가끔 이런 생각까지 든다.

무슨 야쿠자 조직에서 나가는 것도 아니고, 서비스 하나 탈퇴하는 데, 구독 하나 해지하는 데, 왜 이 지경인가. 나가려면 손가락이나 귀라도 잘라 놓고 가야 하는 건가.

사용자들은, 고객들은, 서비스를 이용하려 한 것일 뿐이지, 영원한 충성 맹세를 한 적이 없다.

사람들을 붙잡고 싶다면 떠나기 싫은 서비스를 만들면 된다.
떠나지 못하는 UX를 만들어 괴롭힐 게 아니라.

5️⃣ 그들은 결국 앱팔이가 되었나?

한국에는 '용팔이', '폰팔이', '차팔이' 같은 멸칭이 있다.

분야도, 파는 물건도 다르지만 이런 말에 담긴 소비자의 불신에는 공통점이 있다.

나보다 많이 아는 사람이 그 지식을 이용해 나를 속일지도 모른다는 불안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참 우스운 일이다.

인간의 심리를 연구하고, 사용자 중심의 설계를 이야기하며, 더 나은 디지털 경험을 만들겠다고 선언하는 '테크' 기업들이 때로는 그토록 비웃고 멸시하던 악덕 판매상과 다를 바 없는 짓을 한다.

차이가 있다면 이쪽은 디자인 전문가가 참여해 포장지가 더 세련됐다는 것이다.

악덕 판매상은 고객 한 명을 속이기 위해 침을 튀어가며 입을 털어야 하지만, 이들은 버튼 하나를 옮기고 문구 하나를 바꾸는 것으로 수많은 사용자를 동시에 자동적으로 속일 수 있다.

그리고 그 결과를 전환율, 구독율 등의 숫자로 확인한다.

그렇게 대단한 기술과 전문성을 동원한 결과가 결국 디지털 용팔이가 되어가는 것인가?

사용자 경험을 설계한다더니, 정작 발전시킨 것은 사람을 등쳐먹는 기술이었던가.

여기서 비판하려는 건 어떤 직업을 가진 사람들 자체가 아니다. 성실하게 물건을 팔고, 정확한 정보를 알려 주며, 고객이 합리적으로 선택할 수 있게 돕는 사람들도 많다. 그들까지 싸잡아 욕하기 위해 이런 말을 꺼낸 게 아니다.

내가 문제 삼는 것은 자신이 더 많이 안다는 사실을 거래 상대방에게 불리하게 쓰는 태도다. 자신이 그 분야의 전문가라는 사실을 상대를 돕는 근거가 아니라 속일 수 있는 기회로 삼는 태도.

디지털에서는 그 태도가 더욱 정교하게 반복될 수 있다. 악덕 판매상 한 명의 말솜씨에는 시간과 장소의 한계가 있고 피드백도 불명확하지만, 인터페이스는 그렇지 않다. 한 번 설계한 선택 구조를 수많은 화면에 배포할 수 있고, 반응을 측정한 다음 더 효과적인 방향으로 고칠 수도 있다.

사용자에게 더 좋은 경험을 제공하려는 목적이었다면 놀랍고 고마운 기술이다. 그러나 사용자의 거절을 무력화하고 실수를 수익으로 바꾸려는 목적이라면?

화려한 디자인과 부드러운 애니메이션을 벗겨 내고 보자.

그 속에 남은 것이 정보의 우위를 이용해 사람을 속이는 장사라면,
그들이야 말로 '앱팔이'가 아닌가?

6️⃣ 우리는 서로의 무지를 착취하려고 사회를 만들었는가?

누구나 모르는 것이 있다.

매일 먹는 쌀이 어떻게 재배되는지 모를 수 있다. 수도꼭지를 열면 나오는 물이 어떤 공정을 거쳐 정수되는지 모를 수 있다.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의 원단이 어디서 만들어졌는지, 집에 들어오는 전기가 어떻게 공급되는지 모를 수 있다.

그런다고 매일 불안에 떨어야 하는가?

우리는 각자 모든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 없어서 서로의 전문성에 의지한다. 누군가는 작물을 재배하고, 누군가는 물을 정수하고, 누군가는 옷을 만들고, 누군가는 소프트웨어를 만든다. 다른 사람이 자신이 모르는 일을 제대로 해 줄 거라는 신뢰가 있기에 일상이 굴러간다.

그런데 어떤 소프트웨어 회사는 사람들의 디지털 지식이 부족하다는 사실에서 도움을 제공할 기회가 아니라 수익을 뽑아낼 틈을 찾는다.

그 사용자 중에는 당신이 먹는 음식을 재배한 사람도, 당신이 마시는 물을 정수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당신은 그들이 자신의 전문성을 정직하게 발휘하리라 믿고 살아간다. 그러면서 정작 그들이 당신의 전문 분야에 서툴다는 이유로 정교한 디지털 함정을 실험하고 설치한다면, 이게 무슨 꼴인가.

무슨 격투게임도 아니고, 제대로 된 일상을 살려면 몇 번씩 얻어맞으면서 상대의 공격 패턴을 외워야 하는가? 구독 한 번 취소하려고 공략법을 찾고, 결제 화면에서 속지 않으려고 매번 경계하고, 몇 번 손해를 본 뒤에야 방어법을 익혀야 하는가?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알려 주고, 서툰 사람이 있다면 도와주는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길을 몰라? 그럼 알아내 봐.” 하면서 절벽 아래로 밀어 버리는 세상에서 누가 안심하고 살 수 있을까.

이런 태도에는 사회적 비용도 따라온다.

해지를 위해 헤매는 시간, 원하지 않은 결제를 돌려받기 위해 상담원과 다투는 시간, 약관을 의심하며 소비한 주의력, 피해를 처리하는 데 드는 비용. 속지 않은 사람조차 다음에는 더 경계해야 한다는 피로를 떠안는다. 한 기업이 이용자에게 떠넘긴 부담은 그 기업의 성공 지표에 제대로 나타나지 않는다.

OECD 역시 다크패턴이 금전적·개인정보 관련·심리적 피해와 시간 손실을 일으킬 수 있다고 정리한다. 사회 전체의 손실을 하나의 금액으로 환산할 수는 없더라도, 불필요한 비용이 사용자와 사회에 전가된다는 구조는 볼 수 있다. 기업의 추가 매출을 전부 사회적 순손실로 계산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돈을 얻기 위해 사람들에게 강요한 탐색, 경계, 분쟁, 피로와 불신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OECD, 2022, Dark Commercial Patterns, OECD Digital Economy Papers.

기업은 돈을 벌었다. 사용자는 시간을 잃었다. 많은 사람은 자신이 겪은 일을 다른 사람에게 경고하고, 상담하고, 신고하고, 방어하는 데 다시 시간을 쓴다.

전문성이란 타인의 무지를 착취할 수 있는 특권이 아니라, 그 무지를 보완할 수 있는 능력이어야 한다.

당신들에게는 실적이지만, 사회 전체에는 낭비일 수 있다.

7️⃣ 당신은 당신이 하는 일이 자랑스러운가?

이쯤 되면 묻고 싶다.

당신은 당신이 하는 일이 자랑스러운가?

사용자의 행동을 연구하고, 그들이 어디서 혼란을 겪는지 파악하고, 더 나은 경험을 설계한다는 당신들의 일 말이다.

아니면 돈을 주니까 시키는 대로 하는 것뿐인가?

경영진이 시켰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지표를 맞춰야 했다고, 시장에서 경쟁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 디자이너는 기획자의 요구를 들었다고 하고, 기획자는 사업부의 목표를 따랐다고 하고, 사업부는 회사의 생존을 위해서였다고 할지 모른다.

조직에서 모든 사람이 같은 권한을 가진 것은 아니다. 문제에 반대하다 묵살된 사람과 기만적인 설계를 직접 요구한 사람의 책임이 같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조직 자체가 책임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목표를 정했고, 누군가는 실험을 승인했고, 누군가는 결과를 성공이라고 평가했고, 누군가는 그 방식을 반복하기로 결정했다.

모두가 자기 일만 했을 뿐이라면, 도대체 누가 이 일을 한 것인가?

또 다른 기가 막힌 변명도 있다.

“적법한 절차를 따랐습니다.”

법은 지켰을지 모른다. 약관에 적어 놨을 수도 있고, 해지 메뉴를 삭제하지는 않았을 수도 있고, 동의를 얻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을 수 있다. 물론 기만적인 설계가 실제로 법을 위반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 판단과 별개로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법에만 걸리지 않으면 부끄럽지도 않은가?

고객이 잘못 눌렀다는 사실만큼, 왜 그렇게 누르도록 유도되는 화면을 만들었는지도 설명해 보라. 구독을 해지하기 어렵게 만들었다면, 그 절차가 정말 이용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인지 말해 보라.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내부 회의가 아니라 사용자 앞에서 설명해 보라.

당신들이 잘하는 것은 사용자의 마음을 읽는 일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자신이 한 일을 사용자에게 당당하게 설명할 용기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당신은 당신이 하는 일을 저녁 시간, 가족과 친구에게 자랑스럽게 설명할 수 있는가?

X같은 UX

다시 그 우스꽝스러운 볼륨 조절기로 돌아가 보자.

볼륨을 조금 올리려면 버튼을 수백 번 눌러야 한다. 누가 봐도 형편없는 인터페이스다. 만든 사람도, 구경하는 사람도, 그 사실을 안다. 그래서 웃을 수 있다.

하지만 사용자가 모르는 사이 특정 선택을 더 어렵게 만들고, 인간의 피로와 부주의를 수익으로 바꾸는 인터페이스는 다르다. 외형이 아름답고 조작이 부드럽다는 사실은 그 목적을 씻어 주지 못한다. 똥 무더기를 얇고 고운 비단 보자기로 덮어 놓는 격이다. 여전히 더럽고 악취가 난다.

나는 UX가 필요 없다고, 모든 UX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적은 노력으로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게 돕는 디자인이 얼마나 소중하고 고마운지도 안다. 좋은 UX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 전문성을 거꾸로 사용하는 일이 더욱 역겹다.

사람은 모를 수 있다. 피곤할 수 있다. 실수할 수 있다. 좋은 기술이라면 그런 사람을 도와야 한다. 사람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면, 그만큼 더 잘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

사용자를 이해하는 기술이 발전했다는 사실은 자랑스러울 수 있다.

그 기술을 무엇에 사용했는지도 자랑스러운가?

사용하기 X같은 UX는 불편하다.
하지만 사용자를 X같이 취급하는 UX는 비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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