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추억... 선착순 달리기.
"지각한 녀석들 나와. 축구 골대 찍고 선착순 세명"
"사격자세 불량. 훈련장 기둥찍고 선착순 한명."
고등학교와 군대를 거치면서 가장 싫었던 얼차려(?)가 선착순 달리기였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 벌써 숨부터 차오른다.
체력이 그다지 좋지 못했던 나는 항상 그 선착순 달리기가 제시하는 선착순 3명이나, 1명안에 들질 못했다. 그래서 난 선착순 달리기 얼차려가 끝날 때 까지 중간 등수만 죽으라 뛰다가 끝나거나, 그냥 포기하고 뒤에서 걷기 일수였다. 그러다 악랄한 상대를 만나면 뒤에서 꼴등을 끊어서 새로운 얼차려를 시키곤 했다.
군대에서의 얼차려는 더 기준도 없었던걸로 기억한다. 사격 훈련장에서 선착순 달리기를 몇 바퀴 돌고 있는데, 다시 새로운 얼차려 상대를 집어넣고 선착순 달리기를 계속 돌렸었다.
난 포기하고 그냥 드러누워 버렸던 걸로 기억한다...(ㅅㅂ)
사회 생활을 시작한지도 벌써 15년이 넘어간다.
아무리 노력해도 제자리를 걷고 있다는 생각이 들거나, 불공정한 사회 이슈들을 접할 때, 불평등에 대한 단편적인 생각들을 접할 때 마다 문득문득 그 시절의 선착순 달리기가 떠오르곤 한다.
가난이 형벌이 되는 세상.
몇 년 전, 회사 정문앞의 비정규직 복직과 관련한 상설 집회 텐트를 보고, 회사 후임이 지나가듯 했던 말들이 기억난다. 교실에서 공부도 않하고 나태하게 지낸 사람들이, 비정규직으로 입사 해서는 정규직처럼 고용을 보장 받으려고 회사 앞에서 때를 쓰는 바람에 회사 이미지만 나빠지고 있다는 푸념이었다.
등록금을 벌기위해 과외를 하고, 학과 시험은 F를 받아야 했던 선배.
학과 수업을 제외하면, 얼굴 보기가 참 힘든 선배가 있었다. 대학 입학 즈음에 그 선배의 가정은 IMF의 영향을 정면으로 맞아야 했고, 여동생 대학 입학을 위해 본인은 1년을 마치고 바로 군대를 가야 했다. 전역 후에도 가정 형편은 나아지지 않아, 본인의 등록금을 과외수업을 통해 벌어야 했던 선배였다. 그렇게 정신없이 과외 활동을 하는데, 학과 성적이 좋을 수가 없었다. 학사경고를 받거나 학고를 겨우 면하면서 졸업 학점을 겨우 채우고 졸업을 했고, 취업도 낮은 성적 때문에 힘들게 힘들게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정말 그들이 나태하고 노력이 부족해서 일까?
위의 두 이야기는 나도 모르게 습관처럼 갈무리 하게 되는 일화들이다. "정말 그 들이 나태하고 노력이 부족해서 비정규직이 되고, 학과 성적으로 'F'를 받아야 했을까?" 생각 끝에 따라붙는 물음들이다...
나도 한 때는 이 일화들을 개인의 문제로 접근하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마음은 아픈 일이지만, 사회의 불의를 이야기 하기 전에 다른 일들을 잡아서 살길을 찾는 것이 본인과 가족을 위해 논리적인 결정이 아닐까?" "과외를 미친듯이 했던 선배의 경우는, 전략적으로 수업을 듣고 더 열심히 공부를 했더라면 성적관리가 정말로 힘들었을까?" 이렇듯 '개인의 문제'라는 필터를 가지고 현상을 바라보면 모든 것이 개인의 노력 부족으로 보이는 마법같은 질문들이 만들어 졌다.
하지만, 나와 그들은 이미 수없이 달리고 또 달려야 하는 선착순달리기같은 이 사회에서, 변변찮은 사회적 체력으로 지칠대로 지쳐서 현재에 이른 사람들이라는 것을 고단한 사회생활을 한참을 하고서야 알게 되었다. 그 후에야 내가 살아온 사회의 모습이 어렴풋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모두가 공정한 출발선이라고 생각하는 교실이라는 공간을 다시 돌아보자. 우리는 전혀 같은 출발선에 서있지 않았었다. 수업시간은 누군가에게는 과외활동을 통해 선행학습을 이미 열심히 하고 휴식을 취하거나 복습을 하는 시간이 었을 것이며, 누군가는 공부방이 따로 없는 집에서 전날 배운 것 조차 되짚어 볼 겨를없이, 새벽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졸린 눈을 비비며 힘겹게 앉아있어야 하는 교실이기도 했을테니 말이다. 물론 그 속에서 정말로 본인의 꿈을 위해 노력하고 끝내 꿈을 이루어 내는 사람도 분명 있다는 것은 부정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선행 학습을 하든 학원을 몇 개 씩 다니든, 본인의 노력으로 이루어 낸 그 성과들도 부정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하지만, 우리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부분은, 우리 사회가 기계적으로 그어놓은 출발선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는 것이다. 운동장을 이미 몇 바퀴씩 돌고 돌아 지친 사람을 한 출발선에 세우는 것이 공정한 사회는 아니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운동장을 몇 바퀴를 돌았으면, 적어도 좀 쉬었다 뛸 수 있게 하거나, 물은 한모금 마시고 다시 뛸 수 있도록 해주는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상적인 기회의 균등이 실현되기 힘들다는 것도 알고 있다.하지만, 본인이 선택할 수도 없는 환경으로 인해, 가난을 형벌처럼 이고 고단한 삶을 이어가야 하는 세상은 만들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이다. 다시 교실을 생각해보면, 학생이 적어도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아도 학업에 집중할 수 있는 경제적인 지원을 한시적으로 해주거나, 고액의 과외는 아니어도 양질의 교육 콘텐츠를 제공하여 마음만 먹으면 학과 공부를 따라갈 수 있는 환경 정도는 지금의 우리 사회가 의지만 있으면 실현할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한다. 가난의 악순환이 계속되지 않는 사회가 그래도 좀 더 건강하고, 발전해가는 사회가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내 블로그의 첫 글을 마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