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학부생 시절. 꾸준히 글을 쓰며 괴로워하던 시절이 있었다. 뛰어난 글을 쓰는 여러 작가들의 글을 읽으면서. 내가 얼마나 모자란지를 새삼 확인할 때마다, 그들과 비슷하게조차 쓰지 못하는 나를 미워했다. 아래의 글은 그 당시의 내가 그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 썼던 글이다.
글을 쓰는 건 참 쉽다. 하지만 글을 ‘잘’ 쓰는 건 말이 다르다. ‘잘’ 쓰기에는 어떠한 왕도나 규칙이 없기 때문이다. 중고등학생 때는 항상 '쓸만 하다'라는 마음으로 쉽게 글을 썼다. 이유없는 자신이 차있었던 모양이다. 무엇이 좋은 글인지 모르던 그 때는 남들이 칭찬만 조금 해주면 잘 쓴 글인줄 알았다. 철학을 전공한 덕분에 또래의 친구들보다 글을 많이 써보았음에도 어떻게 해야 ‘잘’ 쓸 수 있는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잘 쓰는 방법을 모르니, 매번 글을 쓸 때마다 방향을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한다. 이런 상황은 금방 나를 지치게 만들곤 한다.
적어도 지금은 ‘쓸만 하겠다’는 마음으로 글을 쓰지 않는다. 머리가 크고 다양한 글들을 읽다 보니, 세상에 좋은 글과 유려한 문장이 정말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라도 범접할 수 없는 자신만의 깊이와 디테일로 그것을 풀어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사소한 문장에서 오묘한 차이를 찾아내고, 너무나 적확해서 다른 문장으로 대체되지 않는 바로 ‘그’ 문장을 위해 고군분투한다. 명문가로 대표되는 작가 김훈은 소설 <칼의 노래>를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이 네 마디의 문장을 쓰기 위해서, 아니 ‘꽃’ 뒤에 붙는 ‘은’과 ‘에’중 어떤 조사를 쓸지 결정하기 위해서 그가 며칠 동안 담배를 태우며 고민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나는 글을 쓸 때 그 정도로 고민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고민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 할 정도로 글에 무지하다고 보는게 맞겠다.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나는 내가 쓴 글을 다시 읽어보기가 정말로 괴롭다.
나는 내 글이 얼마나 그럴싸하고 교묘하게 위장되어 있는지 알고 있다. 나만의 색을 가진 탄탄한 문장을 쓰고 싶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그들의 문장을 따라갈 수가 없다. 어설프게라도 따라하여 그럴싸한 문장을 쓰더라도 결국 그 문장에서 떠올릴 수 있는 인물은 최영재가 아닌 김영하나 샐린져, 하루키의 아류일 뿐이었다. 누군가가 내 글을 좋다고 말해줄 때면 오히려 더 불안했다. ‘내 글이 좋았다고? 수많은 선배들의 문장 하나 흉내내지 못하는 내 글이?’ 글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아 최근에는 글쓰는걸 그만두어야하나 진지하게 고민했다. 이 지경이 되자, 글을 쓰는 과정이 고통스러워졌다. 아무리 발버둥쳐봐도 어떻게 해야 더 나은 글을 쓸 수 있는지 감이 오질 않았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긴 러닝머신 위를 느리게 걷는 기분이었다. 힘겹게 발을 내딛으며 전진한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나는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다.
운동을 좋아하는 친구가 한 명 있다. 이 핑계 저 핑계로 운동을 피해온 나와 달리, 그 친구는 시험기간에도 짬을 내서 헬스장을 들렀다. 나는 살짝만 무리해서 운동을 해도 다음날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다. 다부진 몸을 가진 그 친구는 나보다 훨씬 높은 강도로 매일을 운동하는데도 언제나 운동기구를 가뿐하게 다루었다. 근육이 많이 붙어있으니 하나도 아프지 않은 모양이었다. 한번은 친구가 운동하는 모습을 넋을 놓고 구경하다 물어본적이 있다. “운동을 처음할 때, 어떻게 근육통을 참고 운동을 지속할 수 있었어?” 나는 아프지 않게 운동을 지속할 수 있는 팁을 기대했지만 대답은 예상 외였다. “나는 지금도 아픈데? 나는 맨날 근육통을 안고 살아. 매일 아파” 그리고 말을 덧붙였다. 운동을 하는건 매일 조금씩 다치는 것이라고. 한계를 넘을만큼의 강도로 꾸준하게 근육을 혹사시켜야 비로소 근육이 자란다고.
생각해보면 운동도, 관계도, 생각도, 철학도, 심지어는 ‘나’ 자신도 다 근육과 같아서. 꾸준하게 부딪히고 흔들리고 상처가 생길수록 더 강해지는 것 같다. 물론 꼭 상처가 있어야 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성장한 사람은 모두 상처를 갖고 있다. 글이라고 다를까? 꾸준히 고민하고 흔들려야 비로소 내 글근육이 성장할테다. 어쩌면 잘 써지지 않는 글을 붙잡고 고통스러워 하는 지금의 나는 그만큼의 글근육을 얻게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필립 로스는 그의 소설 <에브리맨>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영감을 찾는 사람은 아마추어고, 우린 그냥 일어나서 일을 하러 간다.” 영감은 찾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는 것이다. 내가 감탄하는 문장을 써내는 작가들은 한순간의 반짝이는 영감에 그 문장을 탄생시킨 것이 아니라, 그 영감을 받아들일 만한 글근육을 가지고 있어서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알고있음에도, 우선 써볼까 한다. 글을 쓰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반복해야만 내 글근육이 단단해지리라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을지는 나의 글근육이 더 자리를 잡으면 알게 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다만 나의 글 쓰는 과정이 나의 글근육이 되길 바랄뿐이다.
지금의 나는 개발자를 하고 있고, 그 때 처럼 글을 많이 쓰지 않는다. 그렇기에 글을 쓰면서 글을 쓰던 당시처럼 괴로워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뛰어난 개발 실력을 갖지 못하는 것에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다.
위 글의 '글'을 내가 지금 열심히 갈고 닦는 '무언가'로 바꾸어도 여전히 말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뛰어난 개발 실력을 가지는 것이든,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것이든, 화려하게 기타를 연주하는 것이든. 무언가를 잘 하게 되는 것은 단숨에 빠르게 되지 않는다.
저렇게 글까지 써놓았으면서, 나는 아직도 그 사실을 종종 잊어버리고 만다.
제목을 보고 들어온 분들께는 죄송하지만, 쉽고 빠르게 뭐든 잘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생각한다 (ㅎ...)
하지만 이런 제목을 보고 클릭했다는 건, 글을 쓰던 당시의 나와, 개발을 하고 있는 지금의 나처럼. 무언가를 잘 하기위해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일테다.
그런 분이라면 충분히 잘하는 사람이 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우리 모두 지금의 고통을 기꺼이 즐길 수 있는 지혜를 가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