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품 개발 방법론 - 고객편] 미용실에서 배운 고객 중심 사고

eaasurmind·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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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석 디자이너의 진짜 실력은 가위질이 아니었습니다.

"이전 고객님 기록에 컬에 대한 정보가 남아 있지 않아서, 원하시는 컬 정도와 다를 수도 있어요. 다음에 오시면 피드백 주시면 같이 맞춰 나가요. 앞·뒤·옆·위 컬에 쓰인 롯드 번호 전부 기록해뒀으니까, 어떤 부분이 컬이 덜했는지 더 많았는지 알려주세요!"

머리를 다 자르고 수석 디자이너 선생님이 건넨 이 한 마디에, 저는 처음으로 "아, 이 사람은 다르다"는 신뢰를 느꼈습니다.

가위질이 특별히 더 좋았던 것도, 결과물이 단번에 마음에 쏙 들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결과는 평범했고, "이거 또 몇 번 와서 조정해야겠네"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그런데 왜 신뢰가 생겼을까요? 이 한 마디가 왜 그렇게 인상적이었는지를 풀어보려고 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디자이너 선생님은 고객 중심 사고의 본질을 알고 있었습니다.

헤어 디자이너와 개발자

저는 미용실에 갈 때마다 항상 같은 디자이너 선생님을 찾았습니다. 한 사람에게 줄곧 머리를 자르는 가장 큰 이유는 단순합니다. 나에 대한 컨텍스트가 가장 많이 쌓여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펌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미묘한 정도를 여러 번 교정해 가며, 결국 내가 딱 원하는 컬에 도달하게 됩니다.

문득 예전에 친한 개발자분이 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개발자는 헤어 디자이너와 비슷해."

그땐 그냥 흘려들었는데, 지금 와서 보니 정말 그렇습니다. 둘 다 결국 1대1로 고객의 needs에 맞춰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일이거든요.

"머리를 잘 자른다"는 무엇일까?

대회에서 입상하고 트렌드를 선도하는 사람? 디자이너 사이에서는 인정받을 수 있을지 몰라도, 적어도 저에게는 다릅니다.

저에게 "머리를 잘 자른다"는 건 크게 두 가지입니다.

  • 내 마음을 나도 모를 때, 알잘딱하게 의중을 캐치해서 결과적으로 마음에 쏙 드는 머리로 잘라주는 능력
  • 정확히 원하는 머리가 있을 때, 구두로는 추상적일 수밖에 없는 표현을 정확히 구체화시켜 주는 능력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건 고객 중심으로 제품을 만드는 일과 정확히 닮아 있습니다.

고객 중심 사고란 무엇인가
검색해 보니 아래와 같았습니다.

고객 중심 사고(Customer-Centric Thinking)는 공급자(기업) 관점이 아닌 고객의 눈과 입장에서 문제와 해결책을 정의하는 전략적 태도입니다. 단순한 고객 만족을 넘어, 고객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페인 포인트(Pain Point)를 찾아내어 가치를 제공하고, 신뢰를 바탕으로 한 지속적인 긍정적 경험(MOT, Moment of Truth)을 설계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헤어샵 고객의 needs도 마찬가지로 아주 구체적일 수도, 모호할 수도 있습니다.

인스타에서 멋진 연예인 사진을 들이밀며 "이거랑 똑같이 해주세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쌤, 저 무슨 머리하면 좋을까요…?"라며 컨설팅을 원하는 경우도 있죠.

사례 1. 모호한 요구사항 — 고객 중심 사고의 정석

내 마음을 나도 모를 때, 알잘딱하게 의중을 캐치해 마음에 쏙 드는 머리로 잘라주는 능력.

이건 고객 중심적 사고의 완벽한 예시처럼 느껴집니다. 고객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페인 포인트를 찾아내어 가치를 제공하는 일과 동일하니까요. 디자이너는 질의를 이어가며 솔루션을 구체화시키고, 트렌드와 어울림을 고려해 최적의 스타일을 제안합니다. SaaS를 만드는 과정과도 비슷하죠.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사례 2. 구체적인 요구사항 — 함정은 여기에 있다

역설적이게도 고객의 요구사항이 매우 명확하고 구체적일 때 문제가 생깁니다.

저는 일부러 앞머리를 매우 짧게 잘라달라고 하고, 트렌드와 엇나가게 펌을 세게 말아달라고 주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 대부분의 디자이너 선생님은 이렇게 묻습니다.

"안 이쁠 텐데요?"
"요즘 트렌드는 컬이 조금 덜 들어가야 해요.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제 요구사항은 보편적 솔루션에서 어긋난 케이스일 수 있습니다. SaaS에 비유하자면, 제품을 만드는 사람 관점에서 고객이 비효율적으로 요상하게 제품을 사용하는 것처럼 비춰지는 거죠. 바로잡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겁니다.

여기서 정답은 뭘까요? 엇나간 요구사항을 그대로 들어주는 것? 보편적 솔루션으로 설득하는 것? 정답은 고객마다 다릅니다. 그리고 그 답은 오직 고객 공감으로부터 나옵니다.

위 사례는 디자인 씽킹의 첫 번째 단계인 고객 공감을 건너뛰고 문제 정의와 솔루션 도출로 바로 넘어간 결과입니다.

제 요구사항의 진짜 이유

제 요구사항의 이면에는 이런 것들이 있었습니다.

  • 1달에 한 번 미용실에 가기 귀찮다
  • 매일 머리를 손질하기도 귀찮다
  • 센 컬이 잘 어울린다는 주변 피드백

조금만 더 대화를 나눴다면 손쉽게 파악할 수 있는 needs였습니다.

책상에 앉아 논의하다 보면 해결책이 먼저 입 밖으로 나오기 쉽습니다. 하지만 고객 중심이라는 건 결국 고객 공감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저는 이 사례를 되뇌이며 늘 잊지 않으려 합니다.

다시, 그 수석 디자이너 이야기로

이쯤 되면 글 첫머리의 그 장면이 왜 그렇게 인상적이었는지 짐작이 가실 겁니다.

그날 이전 디자이너의 이직으로 인해 처음 수석 디자이너에게 머리를 맡겼습니다. 수석 디자이너라서 무언가 다를까 싶었지만 선생님의 가위질 자체는 평범했습니다.
이전과 동일한 프로세스로 위에서 언급한 똑같은 질의가 이어졌고, 결과 또한 한 번에 마음에 드는 머리는 아니었어요. 그런데 마지막의 그 한 마디

"롯드 번호 전부 기록해뒀으니까 다음에 오시면 알려주세요"

이 문장 하나가 신뢰의 결을 완전히 바꿨습니다.

제품을 만들 때는 늘 고객 데이터, 피드백 루프, A/B 테스트를 중요한 키워드로 삼아왔는데, 이게 헤어샵에서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특히 루프가 닫힐 수 있도록 명확한 데이터를 남겨두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아마 이 디자이너 선생님과 1~2번만 더 이야기하면, 저는 매번 균일하게 원하는 머리 스타일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 — VOC의 기준과 데이터

여기서 제가 강조하고 싶은 건 VOC를 받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VOC를 어떤 기준으로 받을 것인지, 어떤 지표와 데이터를 수집할 것인지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디자이너 선생님은 펌이라는 추상적인 영역에 대해 "롯드 번호"라는 매우 명확한 데이터를 수집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수석 디자이너"라는 직함은 단순히 트렌디하게 머리를 자르는 능력이 아니라, 고객 생애주기에 대한 피드백 루프를 더 잘 설계하는 능력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진짜 실력은 가위질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제품을 만들 때도 똑같은 문제를 겪고, 똑같은 방식으로 해결해 왔습니다.

고객에게 진심으로 공감하고
최적의 솔루션을 도출하고
그 솔루션이 최선인지 검증할 지표를 세우고
끊임없이 반복한다

이 사이클은 분야를 막론하고 고객이 진심으로 만족하는 서비스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요소들입니다. 머리를 자르는 일에도, 코드를 짜는 일에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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