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자라는 이름의 감옥

원형석·2025년 11월 27일
  1. 소는 가축이 아니다.

나는 소가 가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판단은 내가 소고기를 먹는 것을 좋아하는 것과는 무관하게 성립하는 명제다. 내게 '소'는 어떠한 집단적 범주이기 이전에 하나의 개별자로서 생명을 의미한다. 소가 가축이 된 이야기는 인류의 문명적 서사와 함께할 뿐, 소를 인식하는 나의 인식 체계의 근본 명제가 되지는 못하는 셈이다. 가축 이외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이 소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라고 생각한다.

  1. 개발자는 개발하는 사람이 아니다.

이 명제는 소에 대한 나의 사유와 동일한 궤적을 그린다. 개발자라는 단어는 이미 기술 문명 사회의 거대한 서사 속에서 굳어진 기표가 되었다. 이 기표는 문제를 효율적으로 해결하는 사람, 코드를 짜는 기계, 특정 기술 스택의 전문가, 높은 연봉을 받는 직업인 같은 일련의 기의를 불러일으킨다. 사회는 이 기표가 함축하는 기의를 확대 재생산하며 소비한다. 이 집단적 기의의 압박 속에서 개별자는 가축화의 위험에 놓인다.

  1. 커리어는 여정이 아니다.

커리어가 하나의 여정이라는 관념은 새로운 신화다. 이 관념에는 개인의 파편화된 밥벌이 경험을 유기적이고 통합적인 계획의 대상으로 만드는 힘이 있다. 현대 사회의 불안한 노동 환경 위에 휩쓸려가지 않도록 부표를 세우는 정박성이 있는 셈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부작용이 있다. 바로 오늘의 체험을 약화시킨다는 점이다. 체험을 약화시키는 질문은 바로 이런 것이다. '다음 직급으로 승진하기 위해 오늘 하루 나는 충분히 발전했던가?' 이같은 질문이 독극물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발견의 즐거움, 배움에 감탄하는 존재로서의 자신을 질식시키기 때문이다. 잘못된 질문은 매일의 하루를 이력서의 재료로 축소시키고 만다.

  1. 개발자는 개발을 체험하는 존재다.

개발자는 매번 새로운 코드를 작성할 때마다 단순한 기능 구현 이상의 무언가를 투영한다. 그가 투영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와 생명이다. 밤샘 작업 끝에 찾아온 깨달음, 디버깅 속에서 얻은 고독한 기쁨, 또는 자신의 서비스가 누군가의 삶을 개선할 때 느끼는 미묘한 성취감 등이야말로 '개발자'라는 기표가 포착하지 못하는 살아있는 기의이다. 소를 가축이라는 범주로 가두지 않고 생명으로 인식하듯, 개발자 역시 직업이라는 프레임 너머의 주체로 호명되어야 까닭은 이러한 창조성을 부흥시키기 위함이다.

  1. 개발자는 가축이 아니다.

소가 가축이 아니듯, 개발자도 개발하는 사람이 아니다. 이 선언은 개발자의 직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직무가 존재의 전부가 아님을 강조한다. '개발자'라는 기표를 잠시 내려놓을 때, 우리는 그 자리에 서 있는 한 명의 복잡하고 입체적인 인간을 발견하게 된다. 이 인간은 가축이 아니다. 그는 개발자라는 기표의 울타리를 넘어설 수 있는 생명력을 지닌 존재다. 나는 이같은 새로운 언어적 코드의 발명과 매핑이야말로 개발자가 추구할 수 있는 궁극의 개발 활동이라 생각한다. 개발자는 결국, 자신을 설명하는 언어를 발명하는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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