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의 삽질들

sham·2021년 12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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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와 불편한 동거를 시작한 지도 어느덧 2년이다. 코로나가 터질 시점에 군대를 간 친구에게 우스갯소리로 니가 전역할 때 즈음에 딱 맞춰서 코로나 끝날 것 같다 이야기를 나눴었는데, 이제는 그 친구가 전역한 지도 몇 개월이 지났다. 그동안 나는 무엇을 하였고 무엇을 이루었는가, 무엇에 성공하고 무엇에 실패했을까, 한 번 되돌아보려고 한다.

1월, 본인선택이 쏘아올린 작은 공

코딩의 세계를 처음 접한 것은 2020년 12월이었다. 지금도 생생하게 그 순간이 기억난다. 그 때의 나는 대학을 가지 않고 알바를 전전하고 있었고, 그 때의 나는 공장에서 고체 본드를 생산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어렵지는 않지만 마냥 정신줄 놓고 할 수는 없는, 딱 적당한 집중을 요하는 작업이었다. 배우기만 하면 누구나 할 수 있었던 일이었기에 아무런 경력도 이력도 없는 내가 뽑힐 수 있었고, 나를 자르더라도 얼마든지 대체할 사람을 뽑을 수 있었던 직종이었다. 공익 본인선택에서 영화처럼 탈락한 나는 1년이라는 시간을 또 기다려야만 했고, 그 빈 시간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까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지인의 소개로 42 서울을 알게 되었다. 프로그래밍. 코딩이라면 중학교 때 C 좀 만지다가 for while까지만 떼고 때려친 기억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무런 조건 없이 라피신이라는 테스트를 통과하기만 하면 된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생활코딩의 html 강의를 통해 프로그래밍이라는 세계를 정면으로 마주하였다. 감상은 딱 보통이었다. 밥도 안 먹고 코딩만 할 수 있을 정도로 흥미가 생기거나 적성에 맞는다거나 내 천직이라는 생각까지는 들지 않았지만, 어느정도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흥미 절반에 대체되지 않을 기술을 배우고 싶다는 마음 절반을 더해 42 서울 신청 일자를 알아보았다.

천운이었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체크인, 4기 라피신 신청을 성공한 후 모두의 코드의 씹어먹는 C언어에서 C를 독학하면서 2월에 있을 라피신에 대한 준비를 했다.

2월, 무근본 개발자

누구에게나 그랬듯이 라피신은 혼란의 연속이었다. 처음 만지는 맥, 터미널, bash, 낯선 환경과 사람들. 코딩에 가장 몰입했던 시기가 아닐까 싶다. 주변 동료들의 도움 덕분에 겨우겨우 과제를 진행했었던 것 같다. 주변으로부터 좋은 자극을 정말 많이 받았다. 서로 이야기를 하면서 소재로 한 번 쯤은 나오는 것이 전공이 무엇이냐는 것이었는데, 비전공을 넘어서 대학도 안 갔다는 이야기를 입에 꺼내는 것이 왜 그리도 힘겨웠었는지. 그 누구도 배경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는 환경이었음에도 나 혼자서 나의 빈약한 배경에 대해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테스트를 마치고 한 달 뒤, 합격을 알리는 메세지가 날아왔다. 나에게 라피신은 42 서울을 지원하기 위한 과정이기도 했었으나 코딩에 대한 적성을 테스트하는 과정이기도 했었다. 막상 합격을 하고 나니 현실감이 났다. 정말 2년 동안 이 과정을 진행해도 괜찮을까? 국비 지원, 부트 캠프 등 길은 하나가 아니었다. 취업을 원한다면 오히려 돌아가는 길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기초를 익힐 수 있다는 것, 거대한 커뮤니티에 소속된다는 것, 학습 지원금이 나온다는 점이 나에게는 무시 못 할 장점이었다.

결과가 나오고 한 달 뒤인 5월, 나는 42 서울 피시너에서 카뎃이 되었다.

5월, 과제 밀기

역시 42 서울이라고 해야 할까. 첫 과제인 libft부터 만만히 볼 수 없었다. 블랙홀은 하루하루 줄어들고, 마음은 괜시리 급해지고. 기초를 익히겠다고 다짐해놓고서는 무작정 코드만 치고 정리는 뒷전이었다. 테스트 케이스에 맞춰서 통과에만 급급하니 개념은 부실하고, 정리를 하지 않으니 나중에 과거의 과제와 연결되는 과제를 할 때도 다시 자료를 찾아야 하고, 아주 엉망이었다. 조금 느리더라도 자신의 페이스대로 진행해도 되었을 텐데, 뒤쳐지고 싶지 않았던 건지 아니면 앞서간다는 느낌을 받고 싶었던 건지 나는 무작정 과제를 미는 것을 선택했다. 그 결과 같은 기수들 사이에서는 꽤나 진도가 빠른 편이 속할 수 있었지만, 그 뿐이었다.

8월, 생애 첫 프로젝트

과제에만 온 힘을 쏟다가 사이드 프로젝트에도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우연히 기회가 닿아서 한 프로젝트의 프론트로 합류하게 되었다. 자바스크립트, 리액트 강의를 급히 들으며 최대한 빨리 한 사람의 몫을 하고자 했다. 그러나 프로젝트는 여러 이슈들도 인해 진행 속도가 점점 쳐졌고, 나는 그 프로젝트와는 아무 상관 없다는 듯 프로젝트를 정상 궤도로 올리는데 있어 아무런 기여를 하지 않았다. 협업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나는 그저 관망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닫고 만 것이다. 쓰라린 교훈이었다.

12월, 휴학

다시 찾아온 공익 본인 선택의 시기,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번에는 선발되는데 성공했다. 복무 시작일은 내년 4월. 42 서울 생활도 이제 4개월 밖에 남지 않았다. 아예 나가는 건 아니지만 군 복무를 마치고 오면 이제 겨우 안면을 튼 동료분들은 온데간데 없고 다시 또 처음부터 안면을 트는 어색한 상황에 처하겠지.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린다.

1년을 되돌아보며 그동안의 발자취들을 회고하고 정리하는 회고록을 작성하는 시기가 또 이렇게 찾아왔다. 뛰어난 역량을 지니신 개발자 분들의 회고를 보며 감탄과 함께 나도 이런 수준 높은 회고록을 작성하고 싶다는 막연한 희망을 품었었는데, 지금 쓰고 있는 부족한 글이 내가 꿈꾸는 개발자가 되어서 쓰게 되는 수준 높은 회고록의 발판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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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 개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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