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 산업기능요원 후기

streetcat·2022년 2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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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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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나는 빠른년생이다. 주변 지인들을 보면 2학년때 공익 2스택을 쌓고 3학년 끝나자마자 괜찮은 복무지에 가서 공익을 뛰고 오는데, 나는 스택 쌓는 게 한 해 늦어서 졸업할 때 공익 끌려갈까 무서웠다. 그 때 우연히 대학 친구가 산업기능요원으로 갔다는 소리를 들었다. 돈도 넉넉히 벌고 무엇보다 바로 갈 수 있다는 사실이 신이 났다. 그렇게 2학년 수료 후, 나는 무턱대고 산업기능요원 준비를 시작했다.

그런데 큰 문제가 있었다. 나는 2학년 때까지 학과에서 시키는 코딩만 해본, 말하자면 코딩의 발걸음만 간신히 뗀 수준의 코더였던 것이다. 살면서 한 번도 들어본 적도 없는 회사들에서도 번번히 서류 불합격이 났다. 울며불며 프론트엔드 공부를 뒤늦게 시작했지만, 겨우 1,2주 한다고 뭐가 바뀔 리가 있나. 그러던 중 내가 게임개발동아리에서 기획직군으로 일한 걸 눈여겨본 한 교육 게임 회사가 연락을 해왔다.

게임 회사에서

면접에서 "병특이면 노예처럼 일해야겠네요?" 하는 농담을 들었다. 사실 농담인지 진담인지도 잘 모르겠다. 그리고 들어오게 되면 개발 외에도 기획과 마케팅까지 담당하게 될 거라고 들었다. 나와 함께 합격한 사람이 한 명 있었는데, 불길한 기운을 느끼고 도망친 것인지 첫 출근 날 출근하는 건 나 혼자였다.

더 문제는 따로 있었다. 입사한 게 1월인데, 2월 말까지 산업기능요원 편입이 되지 않으면 꼼짝없이 제때 복학을 못하고 1년을 흘려보내야 한다. 그런데 면접 때 바로 편입해주겠단 약속은 어디로 가고, 자꾸만 수습기간을 늘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핑계로 월급도 최저시급의 절반 정도밖에 안 주고, 출근 첫 주부터 야근을 시켰다. 더 다니면 내 커리어든 인생이든 망가질 것 같아서 결국 한달만 다니고 퇴사하게 되었다.

그래도 얻은 것은 있었다. 그때까지 내가 기술을 익히는 방식은 네이버 블로그의 설명을 읽는 것이었는데, 회사에서 다루는 툴이 일반적으론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보니까 한국어 블로그가 따로 없었다. 울며 겨자먹기로 공식 도큐먼트와 개발커뮤니티 글을 보고, 남들 깃허브를 분석하며 배웠는데, 그러면서 나의 코딩 역량이 크게 향상된 것 같다. 내가 만든 게임이 성공적으로 출시되어서 이력서에 넣을 한 줄이 추가된 것도 나름 성과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인공지능 회사로

인턴 경험 한 줄, 출시 게임 하나 생겼다고 이력서를 넣으면 면접 보러 오라는 회사는 꽤 많았다. 하지만 대다수는 면접 가보면 빼박 블랙기업이었고, 무엇보다 내가 가고 싶은 진로가 게임이 아니었다. 결국 난 제때 복학할 욕심을 버리고 코딩 공부를 시작했다. 그 때 내 눈에 우연히 들어온 게 한 인공지능회사다. 무려 구글과 자연어처리로 경쟁해서 세계대회 공동1위를 먹은 적이 있고, 서울 한복판 초역세권에 몇층을 통으로 쓰는 스타트업이었다.

이 정도면 갈 만하다고 판단한 나는 곧바로 지원서를 넣었다. 하지만 인공지능을 제대로 공부해본 적은 한번도 없었기에 될거란 기대는 1도 없었다. 그리고 다음날, 면접을 보러 오라는 전화가 왔다. 나는 급하게 포트폴리오를 점검하고 코딩테스트를 준비하고, 연락온 다음날 면접을 보러 갔다.

분위기는 이전 회사와 완전히 달랐다. 면접시간을 기다리며 로비에 앉아있으니 음료수가 제공되었고, 몇십분간의 기술면접이 이어졌다. 면접은 내내 부드러운 분위기로 진행되었다. 또, 단지 나를 평가하는 자리가 아니라 나도 회사를 평가할 수 있도록 회사 사업 아이템과 비전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해주었고, 연봉도 세진 않지만 최저는 확실히 넘기는 금액이었다. 수습기간도 없댄다. 설명할 때 대표님 말씀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만약 입사한 뒤에 역량이 기대에 못 미쳐도 그건 면접자님을 제대로 가려내지 못한 저희 잘못이지 면접자님 잘못이 아니잖아요."

얼마 뒤, 합격 메일이 왔다. 그리고 입사한 지 몇 주일만에 산업기능요원 편입이 완료되었다. 칼복학이 가능해졌다.

인공지능 회사에서

회사는 검색 인공지능을 만드는 유망한 스타트업이었다. 짧은 교육기간 직후 바로 실무에 던져넣은 이전 회사와는 달리 체계적인 교육과정을 가지고 있었고, 동기들과 기술적 교류도 하고 사수에게 도움도 받으며 프로그래밍 역량은 빠르게 올라갔다. 또 회사에서는 다양한 경험을 시켜준다며 딥러닝 프로젝트도 주고, 백엔드 직군에서도 일해보게 해주었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입사 몇 달 뒤 들어가게 된 프로젝트 팀에서였다. 하나의 거대한 프로젝트를 완성해나가는 경험을 하면서 프로젝트 프로세스를 배웠고, 좋은 코드를 짜는 법, TDD를 하는 법, 코드퀄리티를 올리는 법 등을 학습했다. 또 실무를 통해 그때까지 거의 사용 못하던 트리, 그래프 등의 자료구조까지 적용해볼 수 있었다. 그 경험이 아니었으면 아직도 쓰레기 같은 코드를 짜고 있을지도 모른다. 날 도와주신 팀장님들께 아직도 감사드린다.

다음 프로젝트는 연달아 단독 프로젝트 신규개발과 기존 프로젝트 유지보수 업무를 받았다. 배운 걸 적용해볼 기회였고, 경우에 따라선 소규모나마 프로젝트를 이끌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때쯤 거대한 슬럼프가 온다. 업무가 많아지니 자연스레 야근, 주말특근도 늘어나는데, 문제는 포괄임금제라 저녁식비 정도밖엔 안 나온다. 일의 동력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다시 로켓펀치에 들어갔다.

슬럼프 극복

연봉협상 시즌이 왔다. 연봉협상을 끝으로 회사를 퇴사하고 이직하려고 했다. 대표님과 마주앉아 그동안 프로젝트 일정이 너무 빡셌음을 토로하고, 내심 퇴사할 의사를 보였다. 대표님은 공감해주시며, 내년 연봉 계약서를 내미셨다. 연봉 30% 인상. 그 순간 나의 아주 짧은 슬럼프는 사라지고, 회사에 대한 애사심만 가득해졌다. 그렇게 나는 1년을 더 묶이게 된다.

소집해제까지

남은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훈련소를 다녀와서 조금 지나니 급한 프로젝트가 마무리되어 여유로워졌고, 개발역량이 늘어서인지 경험이 쌓여서인지는 몰라도 프로젝트의 중요도나 난이도는 올라가는데도 거의 항상 칼퇴를 할 수 있었다. 아주 가끔 바쁜 것빼고는 그야말로 말년 병장처럼 지낸 것 같다. 이 시간 동안은 나의 미래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었던 것 같다.

마지막 한 달은 회사의 배려로 연차를 몰아쓸 수 있었다. 몇 주가량 쉬면서 회사다닐 때 진행하던 것들을 차례차례 마무리하고 있다. 오히려 회사 다닐 때보다 지금이 집에서는 더 바쁜 것 같다. 이제 겨우 한 세 밤 자면 소집해제됨과 동시에 계약 만료로 퇴사처리된다. 송별회해준다고 동료들이 불러서 얼굴 보고 왔는데, 그렇게 징글징글하던 회사인데 왜 그렇게 떠나기가 아쉬웠던 건지 모르겠다.

후기

IT 산업기능요원 회사의 대다수는 최악의 근무환경을 자랑한다. 하지만 난 운이 좋게도 상위 5% 안에는 무조건 들 만한 괜찮은 회사의 괜찮은 직군으로 갔다. 돈도 꽤 많이 모았으며, 검색 인공지능이라는 유망한 분야에서 데이터/백엔드 엔지니어로서 경력도 쌓았다. 사람들도 괜찮아서 대인관계 스트레스도 없었다. 물론 그 중에서도 조금 마이너한 프로젝트를 담당해서 다른 회사에 가서 활용은 힘들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가장 크게 얻은 건 경험인 것 같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경험, 팀원으로서 공동개발을 하는 경험, 속도 10ms 줄여보겠다고 몇날며칠 밤을 새는 경험, 보고서를 올리고 거래처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경험 등등... 또 소중한 추억도 많이 생겼다. 동료들과 맛집에서 한참 줄을 서서 먹기도 하고, 야근을 하다가 몰래 술잔을 기울여보기도 하였다. 회식에선 대학에서보다도 신나게 놀았고, 함께 프로젝트를 하면서 웃고 울기도 했다. 회사를 떠날 때 동료들이 선물로 챙겨준 술들은 당분간은 아까워서 마시지도 못할 것 같다.

회사가 커가는 것도 재미있었다. 그게 나의 성장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지만, 대학가에 있던 회사는 어느새 강남에 건물 하나를 통째로 쓴다. 인원수도 두배 이상 뛰었고, 신규 프로젝트는 이제 쉬지 않고 밀려들어온다. 그렇게 회사가 성장하는 데에 내 역할도 분명히 있었다는 사실은 내게 큰 보람을 준다.

산업기능요원으로 보낸 2년, 정말 알차고 즐거웠다. 다시 돌아가도, 공익을 하는 선택지는 고를 일이 절대 없을 것 같다. IT 전공자이면서 4급이고 공익을 갈지 병특을 갈지 고민중이라면, 그것이 블랙기업만 아니라면 병특을 가는 것이 무조건 이득이라고 당당하게 권유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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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다니는 백수 개발자입니다.

2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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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 20일

안녕하세요. 인공지능 it 산업기능요원 관심이 있는 학생입니다. 혹시 회사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감사합니다.
직접 알려주시기 어려우시면 메일로 부탁드리겠습니다. (uoa6uoa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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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월 11일

안녕하세요. 윗분과 마찬가지로 저도 it 산업기능요원에 관심이 많은데, 어떤 회사인지 jpld5128@naver.com 주소로 정보 받을 수 있을까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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