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일지

te-ing·2024년 10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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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속 2년 차 회고를 작성하던 중에 구조조정 통보를 받아 어떻게 회고를 완성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퇴사 과정에서 느낀 많은 것들을 기억하기 위해 해고 회고를 별도로 작성했다. 조금은 아이러니한 상황이지만 나름의 해프닝으로 재밌게 받아들이려 한다.

최근 스타트업 뿐만 아니라 대기업에서도 심심치 않게 구조조정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럼에도 나는 자사 서비스의 대부분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와는 거리가 먼 얘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3일 전, 회사에서 모든 사람들을 모아 불가피하게 구조조정을 실시한다고 할 때까지만 해도 나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장 매출을 낼 수 없는 자사 서비스는 중단하고 새로운 수익모델과 과제에 집중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제서야 내가 구조조정 대상자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대부분의 직원들은 그날 출근까지만 해도 생각지 못한 퇴사를 해야만 했다. 모두가 입모아 했던 말은 '그동안 너무 안일했다'. 사실 모두가 알고 있었던 듯하다. 회사의 수익모델은 흐릿해져 가고 있었고, 준비중이었던 과제는 명확한 진행사항을 아는 주니어가 없을 정도로 쉬쉬하는 분위기였다. 당장 사인을 하고 퇴사를 해야 한다는 말에 나는 어떻게든 다른 방법을 찾으려 했지만, 이내 단념하고 권고사직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해고 통보를 받은 날, 커피 타임만 연거푸 4번을 가졌다. 함께 회사를 떠나는 사람들과 커피를 마시며 불만과 걱정을 이야기하고, 회사에 남는 사람들과는 그동안 고생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를 마치고 자리에 돌아오면 또다른 사람들이 커피를 마시러 가자고 했다. 그리고 나는 퇴사를 조율하려는 과정에서 당일이 아닌 다음날 권고사직서에 서명을 해야 했는데, 그 다음 날 역시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커피를 마셨다.

사실 이 회고에서 적고 싶은 것은 앞으로의 걱정이나 회사에 대한 비난이 아니다. 이틀간 수없이 이뤄진 커피 타임과 식사자리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기억하고 싶었다. 퇴사를 명분으로 그동안 낯간지러워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 이것이 나의 퇴사에 대한 기억을 꽤나 아름답게 꾸며주었다.


입사 초기에 뺀질거리던 녀석이, 이제는 제 몫을 하는 사람이 되었다.
어디 가든 잘할 사람이니 걱정하지 않는다.
친해지고 싶은 일잘러였는데, 앞으로 못 보게 되어 아쉽다.
함께 일하는 동안 즐거웠다. 그동안 많은 도움을 주셔서 감사하다.
...

울컥할 정도로 너무나 좋은 말들을 많이 들을 수 있었는데, 무엇보다 내가 회사생활을 꽤 나쁘지 않게 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사람들의 아쉬움이 가득 담긴 눈빛이었다.


그리고 이번 퇴사과정에서 들었던 좋은 말들로 인해 새로운 발견을 하기도 했다. 나는 사실 남들의 언행과 행실을 관찰하는 다소 관음적인 취미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능력 있는 사람들을 관찰하며 그 능력의 원천을 탐구하려는 버릇이 있다. 그리고 나는 어떤 능력을 갖고 있을까를 항상 궁금해하며, 나 스스로의 능력을 정의하곤 했었다. 하지만 이번 퇴사 덕분에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는 평가를 한꺼번에 들을 수 있었는데, 수많은 평가가 모이는 한 지점에서 이것이 내가 가진 특별한 능력이구나 싶었다.

차분하면서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는 사람, 부드러운 리더십을 가진 사람, 항상 이해하기 쉽게 알려주는 사람, 텍스트에도 따뜻함이 묻어나는 사람.

나는 목소리가 엄청 낮은 편이라, 어렸을 적부터 무엇을 말하든 진중해 보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가벼운 말을 해도 모두가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터라, 어쩔 수 없이 가벼운 언사를 삼가는 사람이 되었다. 또, 나는 누군가를 돕는 것을 좋아했다. 무리지어서 어딘가로 향할 때에는 항상 맨 뒤에 서서 소외된 사람의 옆으로 향했다. 그리고 아무도 소외된 사람이 없을 때에는 하늘이나 거리를 보며 여유를 즐기곤 했다.

내심 기대했던 나의 능력은 개발과 관련된 것이었으면 했다. 남들보다 더 잘하기 위해 꾸준히 개발을 공부하고 노력했는데, 결국 더 도드라지는 능력은 내 성향과 태생에 관한 것이라니. 이 역시 아이러니하지만 동시에 나답기도 하다.


퇴사를 당장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회사생활을 잘했는가? 라고 자문할 시간이 없었다. 그럼에도 과분한 평가를 내려주신 동료분들 덕에 기분 좋게 새 시작을 준비할 수 있을 것 같다. 나 역시 이처럼 훌륭한 동료들을 앞으로 만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내게는 과분한 사람들이라 생각한다. 언제 있을지 모를 앞으로의 마무리를 위해서라도, 계속해서 따뜻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려 한다. 물론 나의 이상향을 향한 개발도 놓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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