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량한 차별주의자]- 김지혜

Hailey Park·2021년 11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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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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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트캠프에서 내준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테크 블로그를 시작했지만, 이것저것 한번에 기록해두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상반기 학교 동문회 독서모임에서 읽고 토론했던 책들도 한번 정리해보려고 한다.

이 책의 연장선 상에서, 또 meritocracy에 대해 생각해보기 위해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 원제'The Tyranny of Merit']을 번역서와 원서로 각각 두권 사두었는데 아직 읽지 못했다. 책을 몇십권씩 쌓아두고 읽을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아주 천천히 한 권씩 편식해서 독서하는 나란 닝겐 게으른 닝겐...ha...

하지만 김영하 작가님인가? 누구인지 잘 생각이 나지 않지만 누군가가 책은 읽을 책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산 책 중에서 읽는 것이라고 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딱히 guilty같은 것은 느끼지 않고 있음ㅋㅋㅋ

<2021/6/15 독서모임 발제 도서 : 선량한 차별주의자 - 김지혜>

나는 평소 '결정장애'라는 말을 애용하는 사람이었다. 딱히 당장 생각나는 예시가 식사 메뉴 고르기 뿐이지만, 그러한 결정의 상황들에서 '결정장애'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상대방의 취향과 의견을 반영하고자 하는 일종의 배려이기도, 어떤 책임을 회피하고자하는 무의식의 반영이기도 했던 것 같다.
이 책의 프롤로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결정장애라는 말이 왜 문제인지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장애인 인권운동을 하는 활동가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았다. 그는 우리가 일상에서 얼마나 습관적으로 장애라는 말을 비하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지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무언가에 '장애'를 붙이는 건 '부족함' '열등함'을 의미하고, 그런 관념 속에서 '장애인'은 늘 부족하고 열등한 존재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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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차별은 거의 언제나 그렇다. 차별을 당하는 사람은 있는데 차별을 한다는 사람은 잘 보이지 않는다. 차별은 차별로 인해 불이익을 입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차별 덕분에 이익을 보는 사람들이 나서서 차별을 이야기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차별은 분명 양쪽의 불균형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모두에게 부정의함에도, 희한하게 차별을 당하는 사람들만의 일처럼 이야기된다. 이게 어떻게 된 걸까? 산술적으로 생각해도 내가 차별을 당할 때가 있다면, 할 때도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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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는 겁이 나기 시작했다. 차별은 더이상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강의실에서, 회의장에서, 토론회장에서, 어디에서건 나도 모르는 내 안의 차별적인 관념이 언제 어떤 형태의 말과 행동으로 불쑥 나올지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워낙 말수가 적지 않은 편인터라, 이 책을 읽기 전에도 스스로 간혹 말과 행동을 검열하며 올바르지 못한 표현은 없는지 경솔했던 발언은 없었는지 체크하곤 했다. 친구들과의 대화에서도 신체적 장애를 비하하는 '병신'따위의 표현을 지양하자는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런데 '결정장애'라는 말은 왜 거르지 못했을까.
나에게 장애가 있었다면 내가 저런 표현을 쓸 수 있었을까? 가까운 가족에게 장애가 있었다면 저런 표현을 들으면서 내 마음이 괜찮았을까?

옛 성리학 문화가 여전히 문화 저변에 깔려있는, 임금 성 격차가 OECD 국가 중 가장 큰 한국에서 여자로 살면서, 또 캐나다와 미국에서 동양인 여성이자 외국인으로 살면서 크고 작은 차별들을 경험해왔기 때문에 나름 소수자의 입장과 차별을 받는 쪽의 입장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내가 늘 해오던 말이 "차별은 원래 하는 사람은 그게 차별인지 몰라" 였는데, 이번에는 내가 모르고 있었다. 아니 사실 어렴풋이 알고있었지만 '그렇게까지 해야해?' 라는 생각에 모른 척 했다는 편이 더 정확하겠다.
내가 사회에서 겪는 여러가지 차별들에는 모두가 의식적으로 노력해서 그 결과로 변화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정작 내가 겪지 않는 차별에 대해서는 무심했다. 반성한다.

한국은 특히 단일민족 국가라는 특성상 차별에 관한 교육이 촘촘하게 설계되어있지 않은 편이다. 생활 전반에 있어 다른 인종, 다른 민족,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 다르게 생긴 사람들을 가까이에서 보고 경험할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어 이에 대한 이해도가 높지 않다. 또한 내 개인적인 견해로는, 한국은 집단주의적인 성향이 짙다. 최근 젊은 세대들에 의해 나아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일반적'이고 '평범'하지 않은 것들 / 삶의 방식> 에 대한 거부감이 존재한다. 일례로, 나는 환경을 위해 최근 약 1년 6개월간 페스코 베지테리언으로 제한적인 채식을 해왔는데, 곱지 않은 시선을 받은 적도 있고 이해받지 못한 적도 있었다.
다양성에 대한 이해의 부족은 곧 차별에 대한 의식의 부족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한다. 어린 아이들부터 성인들에게까지 '나와 다름'에 대해 이해하고 수용하는 교육이 더 촘촘하게 설계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더 쓰고 싶지만 기말고사 공부를 위해..(ha..) 책의 1부에 밑줄 그어둔 부분만 정리해두고 다음에 추가를 해야겠다!

소수자 때문에 다수자가 차별받는다는 '다수자 차별론'은 어떻게 가능할까? 다수자 차별론을 들여다보면, '소수자가 차별받지 않는다'는 전제에서 시작한다. 과거에 차별이 있었더라도 현재는 해결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소수자에게 도움을 주는 정책은 특혜일 뿐이며, 상대적으로 다수자에게 부당한 차별이 된다. 1910년대 여성 참정권 운동을 다룬 영화 [서프러제트(2016)]를 보고 한 학생은 이렇게 반응했다. "당시에는 정말 여성들의 권리가 없었고, 그렇게 과격하게 싸울 만했어요. 하지만 요즘 여성들은 투표도 하고 옛날처럼 그렇게 차별받지 않잖아요."

한국사회에 성차별이 (더이상) 없다는 생각은 여성이 고위직에 진출한 사례들로 뒷받침되곤 한다. 여성이 대통령이 된 사실, 국가고시의 여성 합격자가 상당히 많다는 사실 등이 예시로 언급된다. 실제로 정부 수립 이후 70년 동안 여자 대통령은 단 한명뿐이었고 그나마도 그 아버지 대통령의 후광이 있었다는 사실, 아직까지 5급 이상 국가 공무원 중 여성의 비율은 20퍼센트에 못 미치고, 고위 공무원은 5.2퍼센트에 불과하다는 점은 잘 보이지 않는다. (행정부 소속, 2017년 기준)

객관적인 지표가 명확함에도 불구하고 차별을 부정하는 마음이 생긴다. 갸우뚱한 현상이지만, 개인의 시각을 따라가보면 그럴 법도 하다. 여성이 대통령이나 고위공무원과 같은 권력자의 지위를 갖거나, 과거에 주로 남성이 많던 직업군에 여성이 있으면 쉽게 가시화된다. 사람들의 눈에는 이런 여성들이 잘 보이고, 그래서 그 수가 많은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누군가는 이런 여성과 자신의 처지를 비교하며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수도 있다. 여성이 '평균적으로' 불리하다는 사실은 추상적이라 잘 와닿지 않는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어떤 여성이 자신보다 더 좋은 조건에 있다는 사실은 구체적인 감각으로 경험된다.

여성이 소수만 있어도 차별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 희한한 현상은 실험을 통해서도 관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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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의 관점에서 가장 이상적인 조건은 남녀의 비율이 동등한 첫번째 조건이다. 하지만 실험에 참가한 남성과 여성이 서로 동의하는 공정한 상황은 10퍼센트로 구색을 맞추는 토큰(token)을 제공하는 정도였다. 토크니즘(tokenism)이란 이렇게 역사적으로 배제된 집단 구성원 가운데 소수만을 받아들이는 명목상의 차별시정정책을 말한다. 토크니즘은 차별받는 집단의 극소수만 받아들이고서도 차별에 대한 분노를 누그러뜨리는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있다. 기회가 열려있는 것처럼 보이고, 노력하여 능력을 갖추면 누구나 성취할 수 있다는 기대를 주기 때문이다. 결국 현실은 이상적인 평등의 상황과는 꽤 먼 상태임에도 평등이 달성되었다고 여기는 착시를 일으킨다.

장애인이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도록 예산을 늘리라고 요구하며 시위를 했더니, 지나가는 사람이 "나라에 고마워하며 살아야 해요."라고 충고한다. 고마워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베풀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며 시위 방식을 문제삼는다. 나는 호의를 베풀 수 있지만 당신에게는 그것을 요구할 권리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호의와 권리에 대한 이 이른바 '명언'은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무언가 베풀 수 있는 자원을 가진 사람은 호의로서 일을 하고 싶다. 자신이 우위에 있는 권력관계를 흔들지 않으면서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런 호의성(시혜성) 자선사업이나 정책은 그저 선한 행동이 아니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따라 주고 말고를 결정할 수 있는, 통제권이 온전히 나에게 있는 일종의 권력행위이다. 만일 당신이 권리로서 무언가 요구한다면 선을 넘었다고 비난할 수 있는 권력까지 포함한다.

대니얼 카너먼과 아모스 트버스키는 2002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전망이론(prospect theory)를 통해, 사람들이 손실의 가능성과 이익의 가능성 가운데 손실의 가능성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는 손실회피편향(loss aversion bias)이 있다고 설명한다. 이 이론을 반영하듯, 미국사회의 인종차별 개선은 특권을 잃는 백인의 입장에서 흑인보다 더욱 크게 체감한다.

호모 카테고리쿠스(Homo categoricus), 인간은 범주화하는 경향이 있다는 말이다. 인간은 사람이든 동물이든 사물이든, 범주로 구분하는 습관이 있다. 같은 것과 다른 것을 분류하는 사고의 과정을 통해 범주를 만들고 그 범주를 바탕으로 세상을 이해한다. 고든 올포트는 저서 '편견의 본질(The Nature of Prejudice)'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마음은 범주의 도움을 받아야 사고할 수 있다. (....) 그래야 질서 있는 생활이 가능하다."

리프먼은 사람들이 머릿속에 각인된 그림을 가지고 경험하지 않은 세상을 그린다고 생각했다. 바깥세상을 직접 경험할 수 있는 폭은 좁다. 그런데 스테레오타입은 효율적으로 무언가 안다는 느낌을 준다. 사람들은 이런 방식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여론을 형성한다.
문제는 이렇게 단순화하는 과정에서 오류가 생긴다는 것이다. 일부 특징을 과잉 일반화한 결과, 즉 편견(prejudice)이다.

고정관념은 일종의 착각이지만 그 영향은 꽤 강력하다. 일단 마음 속에 들어오면 일종의 버그처럼 정보처리를 교란시킨다. 사람들은 자신의 고정관념에 부합하는 사실에 더 집중하고 그것을 더 잘 기억한다. 결과적으로 그 고정관념을 점점 더 확신하는 사이클이 만들어진다. 반면 고정관념에 부합하지 않는 사실에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고정관념과 충돌하는 사례를 보더라도 고정관념을 바꾸지 않는다. 대신 전형적이지 않은 특이한 경우라고 여기며 예외로 치부한다. 고정관념이 활발하게 작동하는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반증 사례를 아무리 제시해도 별 효과가 없는 이유이다.

차별을 단일 차원으로 바라보면 왜곡 현상이 일어난다. 차별을 일차원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은 다른 차원에서는 특권을 가지고 있고 딱 한가지 문제만 해결되면 되는 사람에게는 의미가 있다. 예컨대 흑인이면서 이성애자 남성인 사람은 인종차별의 문제만 없다면 주류가 된다. 마찬가지로 여성이면서 백인 이성애자인 사람은 성차별의 문제만 없다면 주류가 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여성이고 흑인이면서 동성애자라면 어떨까? 앞에서 말한 흑인 여성들의 사례처럼 차별을 단면적으로 접근하면 어디에서도 구제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흑인 내에서 주변화되고 여성 내에서도 주변화되면서 흑인 여성에 대한 차별이 은폐되는 것이다.

다른 축이 더해지면 차별의 정도는 더 가려내기 어려워진다.
어렵고 복잡하다. 하지만 이 다중성을 생각해야 비로소 내가 차별을 받기도 하지만 차별을 할 수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여성으로서 차별을 받는다고 해서 모든 측면에서 약자인 것은 아니다. 사회경제적인 불평등으로 생활이 어렵다고 해서 항상 약자의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여러가지 이유로 중첩된 차별을 겪고 있고, 그래서 차별받는 집단 속에서 더 차별을 받기도 한다. 차별은 두 집단을 비교하는 이분법으로 보이지만, 그 이분법을 여러 차원에서 중첩시켜 입체적으로 보아야 차별의 현실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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