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읽을 때와 두번째 읽을 때 차이가 꽤 있던 것 같다. 독후감이라는 것이 나에게 사실 즐거운 행위는 아니다. 글을 쓰는 것보단 읽으면서 생각하는 것이 좋기에도 있고 글이란게 두서 없이 적어놨다간 다시 보면서 나에게 부끄러움이 들어서도 있겠다. 그래서 모든 책에 대해 독후감을 작성하지는 않는다. 특히 이 책은 결말 부분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지점도 있었다. 두 번 읽고 재밌는 지점도 있고 별다른 이유 없이 글 쓸 욕구가 생겨서 적는 것.
와타나베를 중심으로 여러 인간관계가 등장한다. 기즈키, 나오코, 레이코, 나가사와, 미도리, 하쓰미. 역시 소설이다 싶었던 것은 이 중에서 자살자만 3명이다. 주변 사람이 저렇게 자살하는 데 상실감을 안겪는 것도 이상할 것이고 방황하지 않는 것도 이상할 것이다. 중2병이라도 걸린 듯한 주인공의 행동과 말버릇, 자신이 힘들어질 때마다 평상시와 달리 지극히 평범해지는 외로운 주인공. 딱히 처음에는 연민의 감정도 들지 않았다. 쿨한 척하며 여자나 사냥하고 다니는 행태에 이미 기분이 나빴을지도. 구체적인 성묘사가 정말 많이 나오는 책이다 조금 당황스러울 정도로. 구체적인 경험의 방식으로는 다르지만 와타나베의 생각의 방황 과정에 굉장히 동질감을 느껴 짜증이 났을지도 모른다. 변화가 잦고 이리저리 휘둘리는 경험같은 거 말이다. 뭐 누구나 그럴 때가 있다고도 생각한다.
이 책의 다른 이름이 <상실의 시대>인 것도 나름 이해가 되었다. 여러 곳에 발을 걸치다가 상황은 끝내 더 악화되어서 자신이 어디에 이르렀는지도 모른 채 미도리의 "너 어디야"라는 말로 끝나는 이 책의 결말에서 상실이라는 것을 잘 표현한 듯 하다. 사실 발을 걸친 정도가 아닌 것 같긴 하지만. 그럼에도 와타나베를 이해하게 된다. 책에서 표현했듯 인간은 결국 다 어느 부분에서는 뒤틀려있기 때문이겠다.
자신이 가진 인간관계에 대한 깊은 고뇌라는 것은 사실 사치 생활일지도 모른다. 뭐 인간이란게 상대적인 상황의 반복에 놓여 이것에 지배받는다. 즉 당연한 말이지만. 뇌졸중에 고통과 싸우기도 바쁜 미도리의 아버지는 와타나베와 같은 고민이 사치일지도 모른다. 생각의 우선순위 설정은 그 사람의 환경에 있다고 생각한다. 주인공이 많은 책을 읽으면서 자신만의 말투를 만들고, 고상한 듯 생각하는 것도 결국 상처와 상실이 반복되었을 때 저차원적인 인간으로 돌아온다. 이 부분에서 굉장히 현실적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일관성을 잘 유지하고 있는 나가사와같은 인물이 참 신기하긴 했다. 기본적으로 인물들은 모두 솔직해지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 정말로 노골적으로 솔직하다. 그런 솔직함에서 여러 인물들의 매력이 잘 표현되는 것 같고 독자에게 많은 생각을 유도하게 하는 것 같다. 특히 미도리의 표현력은 무서울정도. 결말이 씁쓸해서 더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서사의 마지막에 이르러 나타나는 방황감과 상실감은 읽는 독자들에게 동질감을 주기도 하는 것 같다. 어떤 상실이든 그냥 그냥 살아가는 것, 인정하는 것에 익숙해져 가는 것이다. 와타나베는 또한 실존주의적 성격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태어난 것 자체가 의미가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와타나베의 편견 없는 성격과 그것에 끌리는 주변 사람들에게서 이것을 볼 수 있다. 뒤틀린 부분때문에 자신을 부정하고, 일반적으론 인간은 최소한의 무엇을 지켜야 한다같은 본질적인 것에 대해 거부한다. 결말은 결국 씁쓸하지만 해피엔딩은 극적인 요소를 주나 현실적이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오히려 더 생각을 유도하는 것 같다. 처음 읽으면서 나가사와와 미도리의 노골적인 솔직함에 진저리를 쳤는데 다 읽고보니 멋있는 것 같기도 하고. 이 소설에서 어떤 감상에 대한 결론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그냥 계속 생각하게 되는 그런 소설, 마치 빠져나가기 힘든 숲속같은 느낌, 빠져나왔다고 생각되면 다시 시작되는 숲(와타나베가 나오코를 만나러 가는 장면, 근데 일본에 정말 그런 곳이 있다면 가보고 싶다)처럼 말이다. 개인적으로 제목은 <상실의 시대>가 더 맞다고 생각한다. 역시 소설책에서 항상 배우는 것은 여러 감정에 대한 관대함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