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책의 저자 요한하리의 시점에서부터이다. 저자는 외부요소에 대한 방해를 인식하고, 극단적인 사전약속으로 3개월간 "프로빈스 타운"이라는 곳을 설정하고 그곳으로 떠났다. 그가 가지고 간, 외부와 연결될 수 있는 것은 긴급상황에서만 사용가능한 핸드폰 하나뿐이었다. 그곳에서 많은 이들을 인터뷰하고 자신을 성찰했다. 수네 레만과의 인터뷰에서는 집중력과 SNS에 관한 집단실험을 알 수 있었다. 트위터는 2006년 서비스를 시작, 14년에 실험을 시작했기에 8년간의 자료를 이용가능했다. 2013년에는 상위 50개 주제에 한 주제가 평균적으로 17.5시간 머물렀으나, 2016년에는 11.9시간으로 짧아졌다는 것이다. 그는 객관성을 찾기 위해 구글의 검색 전환율, 영화표 판매량, 레딧을 연구했다. 트위터에서의 패턴이 동일하게 일어났음을 파악한 그는 이것이 단지 인터넷의 문제가 아님도 알게 되었다. 이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보량의 증가와 속도였다. 말이 정보의 이동수단일 때부터, 산업혁명, 인터넷 정보의 속도와 팽창은 계속되어왔다. 우리는 항상 옛날이었으면 알지 못할 정보들을 빠르게 효율적으로 얻어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시점을 넘어 우리는 모든 차원에서 깊이를 희생하고 있는 것이었다. 실제로 유투버들은 더욱 짧지만 강렬한 영상을 공급하고 있으며, 쇼츠(1분 이하의 짧은 영상)시장은 과거에 비해 더 커졌다.
속독이라는 기술은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 속독의 진정한 의미가 이해하는 정도는 고정한 채 읽는 속도만 빨라지는 것이라면, 속독은 불가능하다. 인간은 정보를 흡수하는 속도에 최대한도가 존재하고 그 벽을 부수려고 하면 그저 이해하는 정도가 떨어질 뿐이었던 것이다. 멀티태스킹에 대한 내가 아는 하나의 정보는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뇌구조상 멀티태스킹에 유리하다"라는 것이었다. 이 책에서 말하는 중요한 한 가지는 인간의 멀티태스킹은 집중력을 좀먹는다는 것이다. 인간의 뇌가 컴퓨터의 프로세서처럼 두 가지 이상의 일을 한 가지 일만큼 할 수 없다는 것은 물론 집중도 현저히 떨어진다는 것이다. 어떠한 일을 할 때 방해받는 모든 것은 멀티태스킹에 해당된다. 업무도중 오는 이메일을 열람하는 것, 산책중에 음악을 듣는 것. 멀티태스킹은 풀어서 일의 전환이다. 실제로 우리의 뇌는 한 가지만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당연한 것에 오랫동안 절여졌고 어쩌면 이 과학적 사실에 반감을 가질지도 모른다.
휴랫팩커드가 의뢰한 한 연구에서 충격적인 사실이 나타난다. 연구팀은 직원들이 업무도중 방해를 받을 때, 온전히 업무에 임했을 때 두 가지 변수로 하여금 직후 IQ검사를 했다. 연구결과 단순히 이메일이나 전화를 받는 행위 같은 "기술의 방해"가 직원들의 IQ를 평균 10점 떨어뜨렸다. 이것이 얼마나 큰 차이냐면 대마초를 피웠을 때 IQ에 가해지는 타격에 두 배이다.
저자는 프로빈스 타운에서 자신의 내부를 비우고만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버드대의 B.F 스키너 교수는 이상한 사실을 발견하며 이 사실은 한 때 미국을 지배했고, 현재에도 유효하다. 비둘기를 새장에 넣고 배고플 때까지 내버려둔다. 그리고 미리 선택해둔 행동(고개를 들거나, 왼쪽 날개를 펼치는 것)을 비둘기가 할 때까지 기다리다가, 행동을 취한 바로 그 순간 씨앗을 주고, 또 다시 그 행동을 하면 더 많은 씨앗을 준다. 이 과정을 몇 번 거치면 비둘기는 이 로직을 습득하고 그 행동을 여러번한다. 이 실험은 현재 우리가 강아지들에게 시키는 훈련법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우리는 비둘기가 탁구를 치게 만들 수 있고 토끼가 동전을 집어서 돼지 저금통에 넣게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스키너는 이 원칙으로 인간의 행동을 거의 설명할 수 있다고 믿었다. 우리는 자신이 자유로운 존재라고 믿지만 그것은 환상이라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사용자에게 "하트"와 "좋아요"를 줘서 셀카 찍는 행동을 강화한다면, 이용자는 강박적으로 사진을 찍는다는 것이다. 이 이론이 얼마나 영향력 있었는지는, 1981년 대학 교육을 받은 미국인의 82%가 그를 알고 있음에서 나타난다.
칙센트 미하이는 이 이론을 암울하고 제한적인 관점으로 보았으나 거부할 수는 없었다. 미하이는 인간으로 사는 의미를 놓치지 않고 싶었다.(인간이 보상으로만 행동한다는 것에 거부감을 가짐.)자신의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예술가들로 하여금 실험을 했다. 예술가들은 그림을 그렸고 미하이는 관찰했다. 실험을 진행하며 미하이는 이들이 거의 최면에 빠진 사람처럼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깊은 형태의 집중, 그가 말하는 "몰입"을 관찰한 것이다. 결과물에 대해 보상을 원하지도 않았으며 완성된 그림을 치우고 다음 작업에 착수하는 것이었다. 그저 보상을 얻고 처벌을 피하기 위한 스키너의 생각에 배치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른 분야의 사람들을 연구하기 시작한다. 암벽을 등반하는 사람이 말한다. "암벽 등반의 신비는 암벽을 오르는 데 있어요. 정상에 도착하는 것도 기분이 좋지만 사실은 영원히 오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흐르는 것의 목표는 계속 흐르는 거예요. 정상이나 유토피아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흐름에 머무는 거요. 흐름을 지속하기 위해 위로 계속 오르는 거죠." 그가 처음 보았던 예술가들은 단지 그리는 행위, 즉 흐르는 상태에 계속 담겨있고 싶던 것이었다.
저자는 방해를 유발하는 모든 요소를 치우면서 자신을 비웠다. 하지만 정작 그곳을 채우는 무언가가 없었고, 그것이 "몰입"임을 깨달았다. "이곳에 온 이유가 뭐야? 끊임없는 '좋아요'와 리트윗과 공유라는 스키너식 강화와 핸드폰에서 도망치기 위해서만은 아니잖아. 너 글 쓰러 여기 왔잖아." 저자는 프로빈스 타운에서의 2주차부터 자신이 몰입을 경험했던, 하고싶었지만 못했던 것을 하기 시작한다. 하루의 초반에 몰입을 세 시간 하면, 나머지 시간에는 느긋하고 열린 태도로 다른 활동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몰입으로 안을 채우자 그곳에서 갑갑해하고, 짜증내지 않게 되었고 해변을 따라 걷고 사람들과 수다를 떨고 책을 읽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결국 프로빈스 타운 이후 보스턴으로 돌아와 6개월만에, 그리고 코로나를 겪으며 프로빈스 타운에서의 생활양식을 스스로 파괴했고 자책했다. 프롤로그에서 이 집중력 문제는 솔직하게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라고 밝혔다. 프로빈스 타운에서의 그의 생각이 초,중반장을 이룬다면 그 뒤는 실리콘밸리의 메가 코퍼레이션들에 대한 문제를 짚는다. 엄청난 기업들 속에 속한, 그들이 개발하는 것들이 사실상 인간사회에 암적인 작용을 가져온다고 생각한 '트리스탄'이나 '아자' 같은 개발자들이 등장한다. 주로 나오는 것은 Gmail, 페이스북과 같은 것이다. 실리콘밸리의 거대 테크기업들은 이용자들의 머무는 시간 자체가 사업구조였으며, 심지어는 그 곳의 설계자들 또한 자신들이 이용자들의 집중력을 갉아먹고 있다는 것에 동의했고 설계자들 또한 동일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안은 나올 수 없었다.(대안은 매우 쉽다. 예로, 매일 저녁10시에 모든 알림을 모아 전달하는 방법이 있다-이 구조는 그들의 실력이라면 하루면 코딩이 끝난다고 했다.) 결국 근본적인 사업구조 자체가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아 본인들의 프로그램 세계에 더 오랫동안 있게 하는 것이 그들의 이익구조이기 때문에 절충안 자체가 나올 수 없었다. 심지어 마크 주커버그또한 이 문제를 인식하고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부서를 트리스탄에게 맡겼으나, 결국 실패했다. 결국 마크는 이 문제를 외면한다.
니르는 트리스탄이나 아자같은 사람들에 대항해 하나의 주장을 폈다. 집중력에 고통받는 우리는 개인차원에서 가능한 통제수법으로 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했다. "끌 수 있는 알림을 모두 꺼라" 같은 주장이었다. 현재 테크기업에서 제공하는 개인적 선택지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분명 그럴 듯한 말에 저자는 동의를 하면서도(실제로 저자가 프로빈스 타운으로 떠난 행위가 이 이치이다.) 그의 주장을 "잔혹한 낙관주의"라고 말했다. 만약 니르의 주장을 수용하고, 우리가 그 자기통제에 실패한다면 이에 대한 탓은 순전히 개인에게 돌아간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것에 대해 많은 과거 예시를 들며 비판한다. 그중 하나는 비만문제의 예시이다. 몇 세대 전까지만 해도 인류에게 비만이라는 문제는 사회문제가 아니었다. 먹을 것이 넘쳐나고,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먹을 것으로 푸는 경우가 생긴다. 또한 미국에서 하층민들이 가장 싸게 구할 수 있는 것은 탄수화물이었다. 이런 환경은 집단적인 문제를 낳는다. 그들의 공간에 계속 있게 하려는 것이, 그리고 그곳에 점점 시간을 많이 쓰고, 시선을 빼앗겨 집중력이 사라지는 현상을 심각한 사회문제로 인식한 것이다.
실리콘밸리에 대한 비판이 책 중후반에서 계속 나타나면서 조금 진이 빠졌다. 해결하기 힘든 문제에 직면한 기분이었을까. 테크기업들이 무료로 제공하는 공간들을 사람들이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집단적인 저항이 시작될 때 테크기업들의 기본 수익구조를 기반한 현재의 상황들을 돌파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면에서 사실 개인적 차원에서 인식만 가질 뿐, 나 또한 이러한 업계로 진출하는 입장이기에 이것만을 고려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나 이러한 윤리 문제를 생각하면서 내가 하는 일을 지속한다는 것 또한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