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너무 어려운 질문이다. 나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처음으로 내게 게임이라는 매체가 줄 수 있는 감동을 제대로 느꼈던 작품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그건 단연코 크로노 트리거이다.
그리고 나를 '게이머'로 만들었던 작품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나는 자신 있게 이 세 게임을 꼽을 것이다. 크로노 트리거, 파이널 판타지 6, 그리고 천지창조.
이번 추석 연휴, 어떤 게임을 할까 정말 많이 고민하다가 오래전에 핸드폰에 구매만 해두고 묵혀뒀던 FF6와 크로노 트리거가 떠올라 실행시켜봤다.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 이 게임들은 과연 어떤 느낌일까?
리뷰를 쓰기 전 문득 궁금해져 유튜브에 'FF6 vs chrono trigger'를 검색하려 했다. 'FF6 v'까지만 쳤는데, 귀신같이 연관검색어 최상단에 'FF6 vs chrono trigger'가 떴다. 두 작품이 그만큼 게임사에 한 획을 그은 라이벌이자 대표작이라는 증거 아닐까.
지금 들어도 소름 돋는 브금, 12명이나 되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엮어낸 군상극을 완벽하게 풀어낸 명작.
다만 게임 시스템은 지금의 시선으로 보면 아쉬운 점이 많다.
최종 보스 케프카는 빈사기, 침묵, 실명 같은 상태 이상을 무차별 난사하는 정말 괴랄한 놈이다. 첫 트라이는 10분을 부여잡고 싸우다 결국 전멸했지만, 두 번째 트라이에선 매 턴 19998딜을 꽂는 세리스의 알테마 난사에 허무하게 잡혀버렸다. (이 과정에서 2~3분에 달하는 스킵도 안 되는 보스전 인트로 연출을 다시 봐야 하는 건 정말 끔찍한 경험이었다.) 괜히 픽셀 리마스터 판에 인카운터 오프, 경험치 부스트 기능이 들어간 게 아니었다.
캐릭터성 역시 현대의 시선으로 보면 다소 평면적이다. "여자는 내가 지킨다!"를 외치는 로크, 근육과 검술밖에 모르는 바보 메슈와 카이엔, "무서워..."만 되뇌다 갑자기 "이젠 내가 모두를 지킬게!"라며 각성하는 티나까지. 굉장히 전형적인 인물상들이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30년 후의 시선이자, 바로 뒤에 얘기할 크로노 트리거와의 비교에서 오는 아쉬움이다. 사실 이 게임이 30년 전 작품이란 걸 생각하면, 오히려 FF6가 오늘날 우리가 '전형'이라고 부르는 클리셰를 만든 장본인이라고 보는 게 맞지 않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연출은 정말 대단하다. 당시에도 전설이었던 오페라 씬, 세계가 무너지고 2부로 넘어가는 충격적인 전개, 수많은 마법과 환수의 특기 연출 등은 지금 봐도 '맛있다'.
어쩌면 내가 '시간여행'이란 키워드를 이토록 사랑하게 된 건 크로노 트리거의 영향이 아닐까 싶다. 그만큼 이 게임은 30년 전에 시간여행이라는 소재를 스토리와 시스템에 유기적으로, 그리고 너무나도 아름답게 풀어냈다.
필드에 돌아다니는 몬스터와 부딪히면 전투가 시작되는 심볼 인카운터를 도입해 FF6가 넘지 못했던 랜덤 인카운터의 한계를 극복했다.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 2군 동료들을 스토리내에서 자연스럽게 육성이 가능한 점도 FF6보다 훨씬 쾌적했다. 물론 캐릭터가 7명뿐이라 가능했던 구조겠지만, 2군을 위한 노가다를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만으로도 정말 좋았다.
(하지만 그런 완성된 시스템을 30년전에 구축했기때문인지 크로노트리거 모바일이식판에는 FF6같은 편의 시스템은... 없었다...)
물론 마법왕국 질에 도달할 때쯤이면 난이도가 꽤 높아지고, 최종 보스 '라보스 코어'는 말도 안 되는 체력을 자랑하지만… 뭐, 감당 가능한 수준이다.
다만 보스전의 긴장감이나 공략의 다채로움은 FF6에 비해 조금 아쉽다. FF6에서는 '피닉스의 깃털'로 언데드 보스인 마열차를 한 방에 보내거나, '스톱' 마법으로 마신을 바보로 만드는 등 재치있는 공략이 가능했다. 하지만 크로노 트리거는 대부분 약점 속성을 파악해서 패면서 끊임없이 힐과 부활을 하는 정직한 전투가 주를 이룬다. 이런 아쉬움은 직선형, 원형 등 스킬 범위에 따라 시전위치를 잡아야 하는 전략성으로 어느 정도 채워주기는 한다.
캐릭터성과 스토리는 현대에 와서 봐도 전혀 촌스럽지 않다. FF6에 비해 가벼운 활극 느낌이라 그런 것도 있겠지만, 단편적으로 흩어져 있던 각 시대의 이야기들이 '라보스'라는 존재 하나로 완벽하게 셔틀 역할을 하면서 유기적으로 묶이는 구조는 지금 봐도 감탄이 나온다.
특히 질의 절벽에서 마왕의 정체가 밝혀지는 장면이나, 400년 동안 묵묵히 숲을 일구는 로보의 서브 스토리는 지금 다시 봐도 충격적이고 감동적이다. 캐릭터의 감정이나 액션을 FF6보다 훨씬 다채로운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한 디테일도 훌륭했다.
솔직히 FF6나 크로노 트리거급으로 성공한 게임은 아니다. 플랫폼 문제로 이번 연휴에 플레이해보지도 못했다.
하지만 주인공이 직접 대륙을 되살리고 문명의 발전에 기여하는 독특한 시스템, 그리고 '이면세계'를 활용한 심도 깊은 스토리가 주는 임팩트는 내 기억 속에서 위 두 작품보다 오히려 더 강렬하게 남아있다. 어린 마음에 느꼈던 그 충격과 여운은 아직도 생생하다.
(다만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지저엘의 희생으로 살아남고 엔딩후 지상엘에게 간다...?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아크 이새끼....;;;)
그래서 플레이도 못 했지만 꼭 언급하고 싶어서 이렇게 끼워넣었다. 언젠가 제대로 리메이크되어 다시 만나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30년이 지났지만, 이 게임들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낡은 도트 그래픽 덩어리일지 몰라도, 나에게는 '게이머'라는 정체성을 심어준 영원한 명작들이다. 당신에게도 이런 '인생 게임'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