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프트업의 스토리텔링[스텔라블레이드]

안건우·2025년 10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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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텔라 블레이드를 플레이한 지는 꽤 시간이 흘렀다. 제일 최근에 플레이한 게임은 앞선 리뷰포스팅에도 적혀있든,크로노 트리거와 파이널 판타지 6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과거 JRPG의 이야기 방식과 요즘 게임들의 스토리텔링 방식의 차이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스텔라 블레이드는 화려한 액션과 매력적인 비주얼로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나는 이 게임의 진정한 가치가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에 있다고 생각한다. 서사 자체는 평이할지언정, 플레이어를 그 서사에 몰입시키는 기술만큼은 근래 어떤 게임보다도 세련되고 완성도가 높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시프트업의 명확한 철학이 있다. 스토리를 절대 게임 플레이와 분리시키지 않되, 그것이 결코 진입장벽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당신은 왜 게임 스토리를 스킵하는가?

'스토리 + 오픈월드' 조합의 명작을 꼽으라면 많은 이들이 <레드 데드 리뎀션 2>를 떠올릴 것이다. 나 역시 엔딩까지 보긴 했지만, 고백하자면 중간부터 스토리는 귀찮아서 스킵해버렸다. 물론 나중에 유튜브를 통해 전체 스토리를 감상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면 참 아쉬운 일이다. <레데리 2>는 단순히 드넓은 서부를 탐험하는 게임이 아니라, '아서 모건'이라는 한 남자의 인생을 온전히 체험하는 게임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경험의 반쪽밖에 즐기지 못한 셈이다.

이런 괴리감은 왜 생기는 걸까? 답은 단순하다. 게임사가 애초부터 게임 플레이와 스토리를 분리해서 설계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고전 JRPG와 요즘 게임들의 가장 큰 차이다. JRPG는 플레이어가 스토리를 '알 수밖에 없게' 만든다. 텍스트를 읽고 상황을 이해하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진행 자체가 안 되니, 알기 싫어도 알게 된다. 하지만 요즘 대부분의 게임들은 게임의 코어 재미(전투, 탐험, 파밍 등)와 스토리라는 두 요소를 거의 완벽하게 분리시켜 놓는다. 스토리를 즐길 것인지, 게임 플레이 자체에만 집중할 것인지를 온전히 플레이어의 선택에 맡기는 것이다.

몰입의 역설, 니케의 기묘한 성공

최근 중국발 서브컬쳐 게임들의 가장 큰 진입장벽으로 꼽히는 것이 있다. 바로 게임 시작부터 플레이어를 향해 쏟아붓는, 자기들만 아는 방대한 설정과 난해한 고유명사들이다. 이 때문에 어떤 게임들은 아예 스토리 스킵 기능 자체를 막아버리기도 한다. 유저들의 원성이 자자하지만,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딜레마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 참 특이한 게임이 하나 있다. 바로 시프트업의 <승리의 여신: 니케>다.

서브컬쳐 게임은 단적으로 '캐릭터'를 팔아 수익을 내는 비즈니스 모델을 가진다. 블루 아카이브, 원신, 명조 등 대부분의 게임은 플레이어가 특정 캐릭터 자체에 깊은 애정을 갖게 만드는 데 총력을 기울인다. 하지만 니케는 조금 다르다. 니케는 플레이어가 개별 캐릭터를 넘어, '세계 그 자체'에 애정을 갖게 만든다.

이 뉘앙스가 조금 애매하게 들릴 수 있다. <엘든 링>을 생각해보자. 물론 라니나 멜리나 같은 캐릭터에 애정을 갖는 유저도 많지만, 많은 플레이어들은 '틈새의 땅'이라는 세계와 '황금률'을 둘러싼 거대한 서사와 세계를 구축하는 시스템 그 자체에 매력을 느끼고 탐구한다. 니케가 주는 느낌이 이와 비슷하다.

물론 니케의 인기가 '갓데스 스쿼드'가 조명된 '오버존' 이벤트 이후 폭발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니케 역시 캐릭터의 매력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다른 게임들에 비해 세계관과 캐릭터의 결합, 그리고 플레이어의 몰입을 유도하는 방식이 확실히 다르다는 건 사실이다.

간단한 질문을 던져보자.

  • "니케에서 신데렐라는 어디서 무엇을 막았나?" -> 니케 유저라면 대부분 망설임 없이 답할 것이다.
  • "명조에서 방랑자는 파수인을 어디서, 왜 구출했나?"
  • "붕괴: 스타레일의 페나코니에서 반디가 맞이한 세 번의 죽음은 무엇인가?"

후자의 질문들에 막힘없이 대답할 유저는 얼마나 될까? 이것이 바로 니케가 만들어낸 몰입도의 차이다. 니케의 스토리가 타게임들보다 우월하다는 뜻이 아니다. 때로는 완성도보다 플레이어의 감성적인 몰입에 더 주력한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플레이어에게 자연스럽게 스토리와 세계관을 '주입'하고, 그 세계에 감정적으로 동화시키는 능력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물론 그만큼 2차창작등 캐릭터 자체의 애정이 필요한 영역에서 신데렐라의 인기는 파수인/반디의 인기를 한참을 못 따라갈것이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나는 그 이유가 스토리 전개의 중심을 캐릭터가 아닌 '세계'에 두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세계관 주입은 거대한 진입장벽이 될 수 있다. 니케는 이 어려운 과제를 아주 자연스럽게 해내는 데 성공했다. 대부분의 게임사들이 진입장벽이라는 페널티가 더 크다고 판단해 스토리와 플레이를 분리하는 선택을 하지만, 시프트업은 그 둘을 통합하면서도 진입장벽을 허무는 방법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스텔라 블레이드, 몰입 설계의 정점

그리고 마침내 <스텔라 블레이드>를 플레이하며, 나는 시프트업의 그 '귀신같은' 스토리 몰입 능력의 실체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앞서 말했듯, 스텔라 블레이드는 스토리 자체의 완성도로 극찬받은 게임은 아니다. 나 역시 세간의 평처럼 서사는 평이한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플레이어에게 그 스토리를 전달하고 주입시키는 방식은, 정말 그 어떤 게임보다 세련되고 완성도가 높다.

게임 초반, 이브가 지상에 강하한 직후 아담과의 대화가 이어진다. 여기서 게임은 세계관에 대해 주절주절 늘어놓지도, 자기들만 아는 이야기를 하지도 않는다. 간혹 그런 뉘앙스의 대화가 나와도, 플레이어가 맥락적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다.

곧이어 게임은 '하이퍼 셀'이라는, 게임 진행에 필수적인 아이템을 회수하는 것을 첫 번째 큰 임무로 제시한다. 그리고 그 목적지를 '기록 보관소'로 설정함으로써, 플레이어는 "내가 왜 저길 가야 하지?"라는 의문 없이 자연스럽게 1챕터의 목적지에 대한 당위성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기록 보관소에 도달했을 때의 연출은 그야말로 별미다.

단순히 불이 켜진 기록 보관소의 긴 복도를 걸어가 하이퍼 셀을 회수하는, 어찌 보면 별것 아닌 장면이다. 그런데 여기서 시프트업은 강제로 이브를 걷게 만들고, 화면에는 오직 아담과 이브의 대화 텍스트만 띄운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 세계관에 대한 핵심적인 정보들을 풀어놓는다.

이게 왜 대단한 설계일까?

컷신이 아니다: 일반적인 컷신으로 정보를 전달하면, 플레이어는 조작에서 손을 뗀 채 수동적으로 영상을 봐야 한다. 지루함을 느끼고 몰입이 깨지기 쉽다.
전투 중이 아니다: 복잡한 전투 중에 중요한 정보를 대사로 풀면, 플레이어는 조작에 집중하느라 대사를 놓치기 십상이다.
'단순한 조작'을 시킨다: 시프트업은 '걷는다'는 단순한 조작을 유지시킴으로써, 플레이어가 게임을 '플레이하고 있다'는 감각을 놓지 않게 한다. 동시에, 이 조작은 어떠한 집중도 요구하지 않으므로 플레이어의 모든 신경은 자연스럽게 화면에 뜨는 대화에 쏠리게 된다.

게임 플레이 구간과 스토리 전달 구간을 분리하지 않으면서도, 조작의 난이도를 극도로 낮춰 정보 전달의 효율을 극대화한 것이다. 플레이어가 세계관에 가장 쉽게 몰입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치밀하게 설계한 이 장면에 나는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럼 그 뒤는? 고민할 필요가 없다.

중국 게임들의 방대한 설정이 진입장벽이 되는 이유는 플레이어가 그 세계를 모르고, 이해하기 힘들고, 결국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포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텔라 블레이드는 이 첫 단추를 너무나도 영리하게 끼웠다. 이미 이 '강제 주입' 구간을 통해 세계관의 핵심을 파악한 플레이어는, 이후에 등장하는 컷신이나 대화를 더 이상 외계어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능동적으로 스토리를 이해하고 따라가려는 의지를 갖게 되는 것이다.

물론 스텔라블레이드라는 게임은 단순히 스토리에 대한 설계뿐만이 아니라 액션과 전투시스템, 비쥬얼, 그리고 시프트업하면 빼놓을수 없는 섹슈얼에 대한 어필까지 분석할게 정말 많은 게임이다. 하지만 나 자신이 스토리 게임을 만들고 싶어 게임 개발을 시작한 만큼, 최대한 스토리적인 부분에 집중을 해보았다. 스텔라 블레이드는 우리에게 보여준다. 훌륭한 스토리텔링이란 반드시 기상천외한 플롯이나 반전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때로는 평범한 이야기를 어떻게, 어떤 타이밍에, 어떤 방식으로 전달하느냐가 플레이어의 경험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액션과 비주얼 너머에서 발견한, 스텔라 블레이드의 진정한 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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