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학]#2 라캉과 욕망

Clay Ryu's sound lab·2022년 11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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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sophical Id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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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

라캉은 프로이트를 언어적 구조주의를 통해 계승했기에 결핍과 욕망에 대해서 고찰했다.
욕망이 인간의 본성이다("인간은 욕망하는 존재다. 욕망하지 않는 삶은 곧 죽음이다")라는 라캉의 말에서 욕망은 타인과의 관계, 타인에 의해서 주입된 욕망을 의미한다. 독수리를 흉내내다 새끼 양의 털에 발톱이 얽혀버린 까마귀의 우화를 보면 물건을 소비를 하는 과정에서 타자의 욕망을 실현하려는 우리들의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자유의지라는 건 정말 존재하는 걸까? 우리의 구조가 타인과의 관계속에서 형성되어 어느순간 스스로의 욕망조차 이 구조에 놀아나는 것 같다. 우리의 욕망이 무의식의 영역이라 하더라도 그것조차 기표와 현실에 의해 각색된 무언가가 되어버린다면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것이라고 말할만한 것은 어떤 것이 남는걸까? 이 대답은 글의 마지막에 정리를 하겠지만 쉽사리 납득이 가는 부분은 아니다.

상상계

욕망의 무한한 순환(꼬리에 꼬리를 무는 욕망)과 맹목과 집착은 왜 일어나는 걸까?
우리는 절대로 우리의 자아를 직접적으로 볼 수가 없다. 자아는 우선 무엇이라고 규정하기도 어려우며, 그것을 본다한들 그것은 기호로 치환된 무언가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지않음의 관조로 스스로를 본다는 것이나, 거울상(거울에 비친 자아로 그 모습의 성숙함의 정도에는 차이가 있다)에 담근 자신을 본다는 것이나 상상력을 동원해야하는 것은 매한가지이다. 전자는 욕망에서 손을 떼려는 시도로 욕망으로 해석하기에는 애매한 감이 있다. 하지만 동시에 둘 모두는 닿을 수가 없는 무언가에 손을 뻗는 시도 한다는 점에서 맹목과 착각에 빠지기 쉽다는 공통점이 있다. 우리는 항상 어딘가에서 허우적대야 하지만 강력한 통찰력은 어느정도 스스로의 수호자가 되어줄 것이다. 항상 의심해야한다는 것은 옳은 말이다.
거울 단계에서 아이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와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자아를 형성하는 과정인 상상계는 칸트적인 범주를 통해 현실을 보는 것과 더불어 심리적인 것이 반영이 되어 현실을 바라보게 된다.
그래서 심리적인 평정심이 통찰과 더불어 중요해지게 되는 것 같다. 통찰을 통해 심리적인 평정심을 만들어갈 수 있는 것은 통찰로 하여금 직접적으로 자신의 심리를 조절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어떤 종류의 삶의 태도를 만들어 갈 수는 있기 때문일 것이다.

상상계는 착각과 기만의 영역이다. 의식의 명증성을 강조하는 데카르트에 대해서 라캉은 "나는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하고 따라서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라고 말을 한다. 이 말을 개인적으로 해석해보면 나의 존재는 타자화가 되는 과정에서 특정 부분을 잃기 마련이며 구조화된 상징들은 반드시 구조화되지 않은 무언가를 남기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 무의미의 영역에 나의 존재의 흔적이 남게 되는 것 같다. 그리고 라캉은 이 흔적이야말로 가장 나다운 무언가라고 말을 하거나 혹은 나다운 것은 없다고까지 말을 하고 싶은 것 같다.
어디에도 위치하지 않는 곳이 만약 실재한다면 그것은 말해질 수가 없으며, 어딘가에 위치하는 곳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나와 타자와 사회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기에 순수하게 나의 것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자기 중심성은 오류를 만들어내기 마련이다. 선입견, 고정관념, 귀인관계 등은 상상계가 가지는 특징이 된다. 나의 주체를 지배하는 심리적인 구조는 우리에게 주어진 마음의 구축을 위한 유일한 도구이자 족쇄가 된다.

상징계

이미 구성이 된 세계이다. 믿음과 대비되는 규칙 자체를 의미하며 언어자체, 언어 구조로부터 형성된 모든 상징, 문화의 영역이 된다. 라캉의 용어에서 자아와 주체는 상상계에 머무른 1차 동일시와 상징계로 들어선 2차 동일시로 구분이 된다. 여기에서 동일시란 자아 혹은 주체의 자리에 무언가를 놓으려는 시도를 말한다. 다만 강도는 지갑과 목숨이라는 선택지를 주지만 우리는 목숨을 선택할 수 밖에 없듯이 현실은 자아가 반드시 주체로 거듭나게 만든다.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는 사랑과 미움이라는 양가적인 감정이 주체 안으로 들어오기 위한 갈등의 비유다. 다만 이 곳에서 주체는 새로운 욕망을 품게 된다. 주체는 객관성 앞에서 그동안 상상하던 착각이 무너지며 욕망을 하는 방식이 바뀌기에 새로운 욕망의 주체로 거듭나게 된다. 자아의 욕망은 조각이 되어 주체의 욕망으로 바꿈한다. 상징계로 들어올 때 우리는 기표적인 존재가 되지만 동시에 우리는 우리의 어떤 것을 잃어버리게 된다. 기표 속에서 우리는 소외로서 존재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따라서 라캉은 소외된 걸 회복하려는 노력으로서의 욕망을 말하고자 한다. "소외는 주체의 사태다"

소외와 분리


주체는 한쪽에서는 기표에 의해서 대리되고, 또 한쪽에서는 기표에 의해서 대리되지 못하는 분열된 상태로 존재하게 된다. 결국 라캉에 따르면 우리는 분열된 존재가 된다.
라캉이 그려낸 소외는 기표에 의해서 우리의 존재성 S1을 부여받는 거라면 분리는 상실된 부분을 잃어버린 부분a로 받아들임으로 기표의 사슬들과의 대립관계가 시작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우리는 기표가 만들어낸 소외를 벗어나려는 욕망을 가지게 되며 이 욕망이 바람직아게 실현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욕망'이라는 것은 거세된 존재가 감내할 수 밖에 없는 수동적인 운명이 아니다. '결여'는 주체가 가진 역동성을 아주 잘 보여주는 지표이다.

도둑 맞은 편지

애드가 앨런 포의 소설이다. https://namu.wiki/w/%EB%8F%84%EB%91%91%EB%A7%9E%EC%9D%80%20%ED%8E%B8%EC%A7%80
경찰은 과학, 법칙에 충실한 눈먼 에고를 상징한다고 한다. 편지는 은밀한 곳이 아니라 아무나 볼 수 있는 곳에 놓여있다. 편지는 그 자리에 있지만 드러나지는 않는 것으로 기표를 상징한다. 문자는 누구의 눈에나 보이지만 쉽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또한 주체와 상호 간의 관계가 주체의 의도나 행위가 아닌 편지라는 상징계를 통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왕비의 순진함은 대신의 순진함으로 이어진다. 눈치가 빨랐던 대신은 의미가 뒤섞이는 상황에서 바보가 되어버린다. 소쉬르에게 강하게 연결된 기표와 기의는 라캉에게서는 그 거리가 벌어지며 고정된 문자, 정확한 의미를 가진 문자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게 딘다. 다만 편지가 있을 뿐이며 이 편지는 특정한 의미를 부여한다.

언어 구조

상징계는 나와 주체의 관계와 위치, 역할을 부여해주는 질서이다. 상징계의 본성은 언어적인 구조이다. 정해진 규칙을 통해 주체의 생각과 전략이 드러나고, 주체의 생각은 규칙 안에서 끊임없이 흐르고 변화한다. 예를 들자면 컵의 형태는 정해져 있지만 그 안의 유체는 어떤 색인지 정해지지 않은 것이다.
자아(나르시시즘에 가까운 주체)가 자기중심성을 벗어나기가 힘들지만 주체는 타자의 규칙을 수용하며 객관성을 가지게 된다. 이 객관성이 무서운 점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보고, 듣고, 느끼는 감각조차도 어떤 정해진 방식으로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다만 이 객관성에 타자의 규칙과 내안에 내재된 구조가 어느정도의 연관성을 가지는지는 명확하지가 않은 것 같다. 다만 확실한 점은 구조가 우리를 지배한다는 것이다. 언어는 자율적이며 우월하다. 내가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나를 점유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해서 겁먹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나의 결단은 내 한계선에서의 실존에서 내려지는 매우 가치가 있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기적 유전자의 캐리어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매순간을 살아가는 존재로서 가장 소중하다고 믿는 가치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고민하며 이를 삶에서 이행해 나가는데에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인정

존재와 주체의 욕망을 인정해주는 타자(의미)는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는 존재를 성립하게 해주는 조건이 된다. 존재는 타자에 의해서 불리어질때 주체로 구성이 된다.
하지만 의미의 장은 존재의 모든 것을 대변하지는 않는다.
언어는 우리를 구성하고 표현하고 욕망을 지속하시키지만 동시에 소외시키는 도구가 된다. 만들어진 주체는 사실 착각의 가능성(나르시시즘으로 까지 나아갈 가능성)이 될 대단히 높다. 우리는 절대로 세계와 구조와 타자의 욕망을 충족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그것을 충족한다면 우리는 세계와 하나가 되어버릴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충족하지 못하는 욕망을 끊임없이 좇아야만 하는 굴레를 얻게 된다. 결국 언어에 의해 만들어진 욕망이 언어에게 배신되어 우리에게는 언어에 의한 이차 소외가 발생하게 된다.

실재계

상상계와 상징계의 경계선이면서 둘 다 포괄하는 영역인 실재계는 앞선 두 영역과 같은 공간에 있지만 둘의 영역에 속하지는 않는다.
실재계가 '무'라는 말의 의미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의미의 없음이 아니고 언어가 가능하게 해주는 것으로서의 적극적인 '무'이다. 실재계는 상징계에 의해 계속 배제되지만 계속해서 상징계를 이어주는 구성물이다. 욕망이 지속되는 원인도 실재계가 있기 때문이다.
아담과 하와에서의 사과는 불신의 상징이고, 뉴턴에게 사과는 이성과 과학의 상징이다. 기표와 기의의 두 연결 관계는 아폴론적인 구조화이며 도식화이지만 그 반작용은 반드시 존재하기 마련이다. 가령 사과를 지금은 상상 혹은 상징할 수 없는 무언가로 그려낸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 일이지만 가능하지도 않는 일은 아니다. 그러니까 두 연결 관계는 타자에 의해 이루어진 지나치게 의도적인 연결관계이며 그 의도성으로부터 파생된 반작용으로인한 욕망의 공간에서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가 있는 것이다. 어쩌면 아폴론적인 구조화는 미학을 벗어나서는 미적 승화보다는 주입에 가깝다고 말을 해야할 것 같다. 그러니까 디오니소스는 미학에서든 다른 모든 종류의 영역에서든 반구조화를 향하는 욕망(마음에 생긴 구멍과 같은 빈자리)으로서 일관성이 있는 파괴를 향한 욕망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다만 실재계의 역할은 크게 2 가지로 나뉘어서 하나는 아폴론적인 구조화를 위해 남겨진 미지의 영역(과학, 공학에서의 연구과제 / 미학에서의 충동의 미적 승화의 대상)으로 생각할 수 있으며 다른 하나는 디오니소스적인 해체를 위해 남겨진 미지의 영역(기표와 기의로 연결된 자의성을 해체하려는 욕망의 구멍)으로 생각할 수 있을듯 하다.
이 두 공간의 공통점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무'의 공간이라는 것이며 우리와 어쩌면 가장 가까운, 우리가 시작한 태초의 공간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욕망하게 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를 따지고 들어가면 그 어떤 구조도 설명을 해낼 수 없으며 그저 그렇다고 말할 수 밖에는 없는 일이 될 것이다.


실재계가 상징계로 표현되는 순간 어떤 부분들은 반드시 소실이 된다. 라캉에 따르면 "실재계는 불가능이다" 실재계는 잃어버린 대상이며 닿을 수 없는 것으로서 욕망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따라서 생물학적인 욕망은 본능에 더 가까운 것이고, 인간의 본성이 되기는 어렵다.

욕구, 요구, 욕망

욕구는 제한적이며 욕망의 출발점으로 기능하지 욕망이 되지는 않는다.

욕구(needs) : 무엇을 얻고자 하거나 무슨 일을 하고자 하는 바람이다. 생물학적으로 자연스러운 것이기에 항상 대상을 상정하기에 충족되면 해소가 된다. 인간에게의 자연적인 욕구는 타자의 도움으로 사회속에서 표현이 된다. 욕구를 해소하는 경험은 타자에 의해서의 규정화와 타자에 의해서의 실현 가능성을 통해 각색이 된다.
요구(demand) : 어떠한 것을 필요하다고 바라거나 요청하는 것이다. 타자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생물학적인 충동을 넘어 욕구가 언어적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아이에게 요구는 규정화와 실현 가능성을 넘어서려는 특징을 가진다. 그래서 요구는 쉽게 무제약적인 것으로 변화하게 된다. 그렇기에 아이는 결핍을 느끼게 된다. 요구라는 마스크를 쓴 욕구는 무제약적인 사랑을 원하는 강도로 변하게 된다.
욕망(desire) : 부족한 무엇을 가지거나 누리고자 간절하게 바라는 것이다. 욕구와 요구 사이의 불일치 혹은 갭gap에서 욕망이 발현된다. 그리고 이 불일치는 자세히 보면 언어 구조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라캉에게서의 욕망은 항상 자신의 대상에서 빗나가며, 결여의 차원에서 작동하는 것으로 욕망의 완전한 충족의 '구조적 불가능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욕망은 충족을 위한 식욕도 아니고 사랑을 위한 요구도 아니며 욕구로부터 요구를 뺀 차이이다" 욕망에 대한 반복과 집착의 원인은 타자와 언어가 된다.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따라서 타자의 욕망이 커지면 커질수록 주체의 욕망은 사라지게 된다. 인간이 그토록 불안해하고 고통을 받는 것은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욕구에서 느껴지는 결핍과 언어로 표현된 요구와 욕구 사이에서 느끼는 갭에서 오는 비존재성에서 오는 것이다.

물신주의와 훼손된 욕망

인간의 욕망은 (우리가 어머니 아버지에게 의존하던 아이일때부터) 타자로부터 비롯한 욕망이기에 타자로부터의 인정을 내 욕망으로 믿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소외의 전형이다. 타자의 욕망을 좇다보면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불안감으로부터 결여가 발생하게 된다. 욕망에는 절대성이 없기 때문에 타자의 욕망이 실현되는 순간 나와 나의 욕망은 소멸되게 된다.
타자의 욕망은 철저하게 이중적이다.
욕망의 윤리는 욕망이 존재 회복(어쩌면 반구조화를 지향하던 디오니소스적인 충동을 주창하던 니체의 의견과 연결이 될 것 같다.)과 연결되어야 한다는 진리의 명제라고 요약할 수 있다.
소비 사회가 조장하는 거짓 욕망은 왜곡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그 안에서 실현하기를 요구한다.
이에 대해 Erich Fromm은 이러한 기만적인 시장적 정체성은 인간의 악덕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비판한다. 따라서 그는 사회 조건을 개혁해야 한다고 보았으며 인본주의적, 공동체적 사회주의의 실현을 주장했다.

햄릿의 비극

햄릿이 행동하지 못한 것은 우유부단해서도, 우둔해서도 아니었다. 그는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려 했기 때문에 자신의 역할을 하지를 못했다. 햄릿은 자신이 그렇게도 밀어내던 오필리아가 죽고나서야 자신이 오필리아를 사랑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를 속박하던 타자의 욕망은 자신을 속박하며 불안을 일으키며 망가뜨렸다.

욕망의 윤리

(어떤 종류의)욕망은 존재의 회복에 대한 열정이다. 이것은 타자와의 관계, 상징계, 상상계 속에서 실현될 수 밖엔 없지만 우리는 욕망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함으로 틀어지는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의 축을 제대로 잡아줄 수가 있을 것이다.

'순수'욕망

욕망이라는 것은 타자의 인정으로부터 매개하여 시작되지만 인정은 욕망의 본질이 아니다. 인정의 욕망에 집착하는 것은 존재의 소외를 낳게 되기 때문이다. '순수'는 칸트적인 개념으로 어떠한 감각적, 경험적 요소도 포함하지 않고서 그 자신에게서 존재하는 자립적, 자발적 성질로서 존재의 회복을 위한 욕망으로 나아가기 위한 핵심 키워드가 된다. 그렇다면 타자의 욕망으로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하는 것은 인정 받고 싶은 심리를 통해 스스로를 기만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소외되는 마음의 어딘가에 집중함으로 밸런스를 잡아나가는 데에 있다. 즉 타자의 욕망으로 표현되는 구조의 세계에서 자신의 욕망이 위치해야 하는 지점에 계속해서 집중을 해야하는 것이다. 이 순수한 욕망은 극도의 주관주의와 인정주의 사이의 어딘가에 있는 바람직한 욕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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