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자 시점: 최애의 향수

Flowmap·2026년 4월 21일

취향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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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의 향기를 사고 싶은 사람들

향수는 오감 중에서 기억과 가장 깊이 연결된 감각이라고 한다. 어떤 냄새를 맡는 순간 까맣게 잊었던 장면이 갑자기 떠오르는 경험, 한 번쯤 있지 않나. 냄새와 기억을 처리하는 뇌 영역이 인접해 있어서 생기는 현상이다.
그렇다면 이런 생각도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 혹은 캐릭터의 향기가 있다면?

팬덤에는 오래전부터 '최애의 향'이라는 개념이 있었다. 아이돌이 인터뷰에서 즐겨 쓰는 향수를 언급하면 그 제품이 품절되는 건 흔한 일이고, 트위터에선 최애의 이미지를 향수 노트로 풀어내는 게 일종의 덕질 언어처럼 통용된다. "달콤한 베리와 시트러스로 시작해서 오키드와 일랑일랑이 피어오르는"처럼. 이런 묘사를 보면 조향사 경력이 있나 싶다가도, 이 사람들이 그냥 최애를 너무 깊이 생각한 사람들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그게 이제 실제 향수가 되고 있다.

사례 하나는 트위터에서 시작됐다.

자칭 "일 벌리기 좋아하는 오타쿠"인 한 유저가 반쯤 장난으로 올린 한 줄 "님덜 제가 최애 향수 만들면 사싈?" 이 진짜 프로젝트가 됐다. 텀블벅을 통한 크라우드펀딩이었다.
컨셉부터 기발하다. 향수를 만드는 건 본인이지만, 세계관 속에서의 조향사는 "금지형(K)"이라는 자캐다. 화장품 회사에서 일하는 섬세한 화학자이자 예술가인 캐릭터. 그래서 이 향수의 공식 포지션은 "2D 세계의 조향사가 2D 캐릭터를 위해 만든 향수"다. 3D 세계 실존 인물의 향수는 만들지 않는다. K가 2D 세계 사람이라서. 이 설정이 웃기면서도 내부 논리가 탄탄하다.
향수 한 병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향료만 최소 13만원, 비커와 부자재까지 합치면 회당 20만원이 훌쩍 넘는 작업이라 펀딩이 필요했다. 향료가 120여 가지 이상 확보되면 표현 가능한 조합이 "거의 무한에 가깝게" 늘어나는데, 본인은 이걸 그림물감에 비유했다. 12색 크레파스보다 120색 전문가용 크레파스가 더 다채로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처럼.
구성품은 향수 한 병과 조향사 K의 사인이 담긴 카드. 카드에는 일련번호와 향 설명이 적힌다. 팬이 팬을 위해 만든, 세계관이 있는 향수다.

다른 사례는 홍대에 있는 실제 공간, 악센트 아이디

이곳은 AI를 활용한 조향 서비스를 제공한다. 프로세스는 이렇다.

실제 최애로 탑승해보았다

최애의 이름, 성별, 스타일, 분위기, 이미지. 총 5단계다.
특히 최애의 사진을 업로드하면 AI가 이미지를 분석해 향수 노트를 추천해준다.


분석 결과 화면이 재미있다. "압도적카리스마 유죄인간 이 조합 실화냐고요!!!! 합법이냐고요!!!!" 같은 AI의 코멘트가 달린다. 누군가 X(구 트위터)에서 실제 최애를 두고 한 말 같아서 팬심에 이입하기 좋은 말투다. 이미지 특성은 레이더 차트로 시각화되는데, 섹시함·귀여움·카리스마·다크함·럭셔리함·순수함·독특함 7개 축으로 표현된다. 최애를 이렇게 분석해서 보는 것 자체가 하나의 콘텐츠다.


또한 마냥 AI 분석이 덕질에 용이한 것은 아니다.
어째서 그 향수가 추천되었는지 스스로 선택한 키워드나 AI 키워드를 분석하여 나름의 논리를 펼치고 있다. 이후에는 추천된 향을 시향해보고, 그 향을 얼마나 강하게 유지할지 비율을 설정한다. 추가로 넣고 싶은 향도 최대 두 가지까지 선택할 수 있다. 선택이 끝나면 직원이 그 자리에서 향수를 만들어준다. 완성된 향수는 약 2주 숙성 후 사용하면 좋다고.

단순한 소비가 기획으로 연결되기까지,

냄새는 소비하는 게 아니라 경험하는 것에 가깝다. 포토카드는 가질 수 있고, 굿즈는 놓아둘 수 있지만, 향수는 몸에 닿고 공기 중에 퍼지고 결국 사라진다. 그리고 나중에 어디선가 비슷한 향을 맡으면, 그 날의 기억이 다시 올라온다. 최애의 생일을, 처음 콘서트에 갔던 날을, 오래 기다린 굿즈가 도착했던 설렘을.

향수를 사는 게 아니라 기억을 만드는 것이다.

이런 서비스를 보고 "대체 왜 저런 걸 해?"라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게 따지면 향수 하나에 수십만원을 쓰는 모든 사람이 설명이 안 된다. 좋아하는 것에 돈을 쓰고, 그 경험을 기억으로 남기는 일, 그게 뭐가 됐든 다를 게 없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최애의 향기를 이렇게까지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언어로 풀어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미 꽤 행복한 덕질을 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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