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진행한 <히토 슈타이얼 - 데이터의 바다> 전시를 감상하고 왔다.
2022.4.29 ~ 2022.9.18로 약 다섯 달 간 진행하였으며, 나는 이 전시를 뒤늦게 알아서 마지막날인 9월 18일에 다녀왔다.
히토 슈타이얼(1966, 독일)은 디지털 기술, 글로벌 자본주의, 팬데믹 상황과 연관된 오늘날 가장 첨예한 사회, 문화적 현상을 영상 작업과 저술 활동을 통해 심도 있게 탐구해오고 있는 동시대 가장 영향력 있는 미디어 작가이다. 또한 예술, 철학, 정치 영역을 넘나들며 미디어, 이미지, 기술에 관한 흥미로운 논점을 던져주는 시각예술가이자 영화감독, 뛰어난 비평가이자 저술가이기도 하다. 또한 그는 현재 『이플럭스』를 비롯한 다양한 매체, 학술지 및 미술 잡지에 글을 기고하고 있다.
(중략)
전시의 부제 ‘데이터의 바다’는 슈타이얼의 논문 「데이터의 바다: 아포페니아와 패턴(오)인식」(2016) 에서 인용한 것으로, 오늘날 또 하나의 현실로 재편된 데이터 사회를 성찰적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전시의 의도를 함축한다. 따라서 이번 전시는 빅데이터와 알고리즘에 의해 조정되고 소셜 미디어를 통해 순환하는 정보 및 이미지 생산과 이러한 데이터 재현 배후의 기술, 자본, 권력, 정치의 맥락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작가의 최근 영상 작업을 집중적으로 소개한다.
- 국립현대미술관, <히토 슈타이얼 - 데이터의 바다> 전시 소개 中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 소개 중 일부이다.
저번에 부산에서 이형구 작가님 전시를 본 이후로 과학과 예술이 통합된 전시에 꽂혔는데... 데이터와 미디어가 결합된 형태의 전시라고 하니 안 볼수가 없었다. 원래 공학 분야(특히 데이터, 인공지능 분야)와 현실을 연결짓는 걸 좋아했기에 더욱 흥미가 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가 감상했던 전시 중 가장 '뒷통수를 맞은 것 같은' 느낌을 많이 받은 전시였다. 이 전시는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기술과 결합의 현실을 꼬집어주면서도 아름답고 충격적인 형태로 내 앞에 보여주었다. 개발 공부를 하면서 한동안은 기술 그 자체를 공부하는 데에 몰두했는데, 학창시절 개발자의 꿈을 꾸면서 많이 생각했던 '어떤 공학자가 되어야 할까'의 질문을 다시금 끄집어내어주는 전시이기도 했다.
워낙 많은 작품이 전시되어 있고 영상길이도 20~50분 정도로 길었기에 모든 작품을 감상하지는 못했고, 입장 전 팜플렛을 읽고 흥미가 가는 작품들을 선정해 찾아다니는 방식으로 관람했다. 작품마다 담고 있는 내용이 매우 상이하기에 기억에 남는 몇 작품의 감상평을 써보려 한다.
아래 글은 작품의 구체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관람 예정이 있으신 분들은 열람을 권장하지 않습니다.

디지털 기술 기반 세상에서 우리는 안 보여질 수 있을까? 사적∙공적 데이터가 수집∙등록되고, 감시 카메라가 도처에 널려 있는 디지털 세상에서 우리는 완전히 숨을 수 있을까? 빅데이터와 빅브라더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란 과연 누구인가? 구글맵, 인공위성, 감시카메라, 드론, 항공지도 등의 장치를 통해 세상을 위에서 아래로 조망하게 된 시대, 세상과 인간을 인식하는 방식은 그 이전 시기와 어떻게 다른가? 슈타이얼은 영상 설치 작품 <안 보여주기 : 빌어먹게 유익하고 교육적인 .MOV 파일>에서 위와 같은 질문들을 이어간다.
전시장에 들어가서 처음 보게 된 작품이자, 정말 풍자의 끝을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ㅋㅋㅋㅋ 내용답게 영국의 전설적인 코미디 시리즈에서 제목을 따왔다고 한다.
<안 보여주기 : 빌어먹게 유익하고 교육적인 .MOV 파일>은 크게 다섯 장의 구성으로 '안 보일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한다. 이는 카메라에 안 보이게 하는 방법, 시야에서 안 보이게 하는 방법, 이미지가 되는 방법, 사라짐으로써 안 보이게 되는 방법, 이미지로 만들어진 세계에 병합됨으로써 안 보이게 하는 방법의 다섯 가지이다. 초반에는 디지털 기록 말소를 위한 현실적인 방법을 설명하는 것 같다가도, 나중에 가면 현실과 가상세계의 구별을 모호하게 하는 비현실적인 방법으로, 사람은 보이지 않더라도 데이터로서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의 풍자를 여실히 드러낸다.
작가가 이 작품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하나는 디지털 기술 기반 세계에서는 개인의 사생활이 없이 모든 데이터가 수집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디를 가는지는 CCTV에 찍히고, 무엇을 궁금해하는지는 검색창에 기록되며, 무엇을 사유하는지는 웹사이트 쿠키에 남는다.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모든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이는 더 나은 디지털 서비스로 돌아오기 때문에 마냥 나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가끔 이를 지우고 싶을 때에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 '잊힐 권리'가 실질적으로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SNS에 적힌 한 마디의 말은 이미지가 다 낡아 헤질 때까지 퍼날라지고, 의도치 않게 찍힌 사진과 영상이 인터넷에 수없이 복제되어 떠돌아 지우기 쉽지 않은 경지까지 놓이기도 한다. 히토 슈타이얼은 이를 꼬집으며, 이것이 '어쩔 수 없는 현실'임과 동시에 우리가 이를 자각하고 경계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다른 하나는 디지털 소외계층에 관한 이야기이다. 디지털 소외계층은 일전에 포스트로 한번 다룬 적이 있다. #링크 4장 '사라짐으로써 안 보이게 되는 방법'에는 불량 화소 되기, 필터에 걸린 스팸 되기, 무등록자 되기 등이 언급되는데, 이 장의 마지막에는 '디지털 혁명 시대에 17만 명이 사라진다.'라는 말이 덧붙여진다. 이는 말 그대로 타의로 사라지는 사람들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모든 것이 데이터로 구성되는 세상에서 기술 이용에 소외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가 데이터에 포함되지 않으면 국가의 사람이 아니게 되고, 바뀐 기술에 적응하지 못하면 일상적으로 하던 일조차 어려움을 겪고, 특정 인터넷 사이트 이용자에 포함되지 않으면 그곳에 자신의 정보가 떠돌아다녀도 그 사실조차 모르듯이 말이다.


는 2010년부터 5년동안 빌보드 차트 노래 제목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영어 단어를 제목으로 하는 총 3채널 영상 작품이다. 하나는 재난 현장에 인명 구조를 위해 투입될 휴머노이드 로봇이 끊임없이 발길질을 당하며 균형 훈련을 받고 있는 장면, 그리고 세대를 거듭할수록 진화되는 걷기 유전 알고리즘 학습 과정이 나온다. 다른 영상은 전쟁으로 파괴된 쿠르드족 도시 디야르바르크를 비추며, 또다른 영상은 인명 구조 휴머노이드 로봇의 제작과정을 다룬다.
작가는 재난 로봇이 훈련을 받는 과정과 그 로봇으로 도움을 받고 기술에 의존하는 사람들을 병치함으로써 인륜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진 로봇 제작 과정의 반인륜적인 모습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내가 마음 깊이 동의하는 사상은 아니기에 감명깊게 본 작품은 아니었다. 매정해 보일 수 있지만, 인간의 고통을 본땄을지라도 인간이 받아야 할 고통을 로봇이 대신 받음으로써 인간에게 향하는 고통을 줄여줄 수 있다면 좋은 일이 아닌가...? 라는 생각에 조금은 반발심도 들었다. 내게 아직 인권보다 우선되는 가치관은 없는 것 같다...
<경호원들>은 전쟁과 동떨어져 있다고 인식되어 온 미술관에서 전쟁을 역설적으로 언급한다. 미국 시카고 현대미술관에서 촬영된 이 작품은 군인과 경찰 및 군사시설에서 법을 집행하는 업무 경력이 있는 론 힉스와 마틴 휫필드라는 미술관 경호 요원과의 인터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들은 본인들이 경험한 교전 상황을 열띤 어조로 설명하며 미술관 안에서 총을 겨누는 자세를 취하는 등 전술의 제스처를 극적으로 재상연한다.
사전에 안내책자를 읽을 때는 별 생각이 없었다가 함께 간 일행이 이쪽에 시선을 뺏기길래 옆에 서서 같이 봤는데, 보면 볼수록 생각이 많아지는 작품이었다. 작품의 주인공은 일전에 겪었던 교전 상황을 미술관을 배경으로 설명하며, 미술관 안에서 전술 제스쳐를 취하고 적을 물리치는 방법을 설명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연출은 작품에서 교전 상황을 설명하는 내내 FPS게임에서 보일 법한 조준경의 시야처럼 사각형 격자무늬가 화면에 자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외부의 적으로부터 미술관을 보호하고자 하는 경호원의 의지를 나타내려는 것처럼 보였다.
히토 슈타이얼은 지속적으로 '미술관은 전쟁처인가?' 라는 질문을 던져왔다고 한다. 예술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작가의 가치관을 드러내기에, 미술관은 언제든 억압과 통제 하에 놓일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를 보고 우리나라에서 일제 시대에 이루어진 문화 통제가 떠올랐다. 문화예술은 사람들의 저항정신을 상기하므로, 그러한 사상을 전파시키지 못하게 하기 위해 불온서적을 등록하는 등 문화를 통제한 것이다. 이렇게 우리나라의 역사와도 겹쳐보이고, 이 전시관에 있는 작품들도 사회현상에 대한 히토 슈타이얼의 가치관을 뚜렷하게 드러내주는 작품들이 많아 더 와닿았다. 지나친 예술만능주의는 물론 좋지 않겠지만, 개개인의 가치를 존속하기 위해 예술은 많은 사람에게 공유되고 유지될 수 있게끔 '미술관을 지켜야'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를 위한 미술관 경호 요원들의 행적이 정말 가치있게 느껴졌다.
이러한 통제 속에서도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이 예술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내가 예술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를 상기시켜주는 작품이었다.

설명을 보자마자 꽂혀서 일행을 졸라서 보러 갔고, 그만큼 정말 감명깊게 보고 나온 작품이다! 이 후기는 이 작품을 위해 쓰고있는 거나 다름없다. 시간만 많았으면 세 번은 돌려봤을 것 같다.
<이것이 미래다>는 신경 네트워크와 인공지능이 예견한 미래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는 알고리즘에 관심을 가진 이래로 항상 예측 알고리즘과 인공지능에 관심이 많았고, 그것이 인간의 삶을 질을 높임으로써 더 나은 미래를 가져올 거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이 작품을 보면서 처음으로 내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스쳤다. '알고리즘은 항상 미래를 예측하는데, 그래서 그 미래는 대체 언제 현재로 다가오지?'
이러한 생각은 항상 미래를 예측하고 대비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면서도 과거를 돌아보고 예측이 얼마나 들어맞았는지 확인하는 일에는 소홀했던 내 태도를 반성하게 하면서도, 이조차도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작품에 등장하는 미래 정원의 식물들은 SNS 중독으로 뇌가 병든 사람을 치유하거나, 혐오와 선동에 둔감하게 하거나, 독재자를 독살하기도 하는 등의 마술적인 치유의 힘을 갖고 있다. 기술만능주의를 꼬집는 것이다. 주인공의 독백 중 '네트워크는 내가 나의 정원을 찾을 거라고 예측한다.'라는 대사에서 보이는 현재를 외면한 채 미래만을 예측하고 인간 개개인의 삶을 데이터로서 예측하여 조종하는 모습은 먼 과거 신화에 나오는 '신탁'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발전하였을 기술이 오히려 미래의 가능성을 좁히고, 예측된 미래에 인류의 모습을 맞춰나가는 모습이다. 이런 기술의 발전이 사회에 허무주의를 전파시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또한 중간중간 뜨는 '경고 : 네트워크의 예측은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라는 문구가 예측 알고리즘의 회의를 더해주는 것 같았다. 과거를 바탕으로 미래를 예측하고는 있지만, 항상 그 미래가 맞지 않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 미래 예측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라는 의문이다.
기술에 대한 깊은 이야기를 다룰수록 회의적인 면모만 보여주던 다른 작품과는 달리, <이것이 미래다>는 이 회의감을 일축하는 한 마디를 주인공의 입을 빌려 던져 준다.
"미래가 무엇이든 간에 언제나 지금 여기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이게 내가 말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개인의 미래를 정하는 것은 예측 알고리즘도 인공지능도 아닌 개인이고, 과거에 쌓인 데이터가 아닌 현재의 결정이 미래에 더 많은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이는 세상이 알고리즘에 매몰되고 능동적인 개인의 가치는 점점 줄어들지라도, 인간이 직접 그려가는 서사는 의미있고 아름답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