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방부 퀘스트로 모든 시간을 내다버린 2025년이 드디어 끝났고 2026년이 도래했다.
2025년은 나에게 정말로 끔찍하고 최악이었던 한해 이었기 때문에 2026년은 더욱 희망차고 활기찬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1년 한해를 국방부 퀘스트를 수행하는데 사용해버렸고, 그 퀘스트 기간 진행했던 대부분의 프로젝트들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기 때문에 올해는 삼재의 해라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왔던 것 같다. 외부적으로 좋은 성과는 없었지만, 그 만큼 내실을 다지는데 집중하였고 약간의 성장을 한 것 같다.
물론 2025년 초에 세웠던 목표를 달성했는지에 대해 나에게 자문하면 썩 만족스러운 대답을 할 수 없는 것 같다. 나는 늘 아주 바쁘고 강렬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항상 기대했던 것 이상의 목표를 달성했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나에게 거는 기대는 컸지만, 환경의 제약은 더더욱 컸다. 하지만 어찌 하겠는가? 이미 시간은 흘렀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지난 한해를 되돌아보고 교훈을 얻는 것 뿐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가 AI의 도입으로 더욱 빠르게 흘러간다고 생각한다. 2025년은 그러한 AI와 발전과 더불어 사회와 격리되어 있다는 공간적 특성 때문에 시간이 더욱 더 빠르게(물론 체감상으로는 아주 느렸다...) 흘러 갔던 것 같다. 그 빠르게 흘러간 시간, 국방부의 손에서 흩어져버린 나의 2025년을 지금 바로 회고해 보도록 하겠다.
모든 컴퓨터공학과 학생들에게 알고리즘은 애증의 존재일 것이다. 알고리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매일 매일 행복하게 알고리즘 문제만 풀 정도로 좋아하지만, 알고리즘을 싫어하는 학생들에게 알고리즘은 그저 취업에 필요한 1차 관문 정도의 느낌 일 것이다. 나의 경우 워낙 오래 전부터 코딩을 해왔기 때문에 알고리즘 문제 풀이를 잘 하지는 않지만, 기본적인 테크닉 정도는 가지고 있는 수준이었다. 구현은 당연히 현업을 뛰었기 때문에 자신이 있었으며, 나에게 부족한 것은 언제나 알고리즘 이론과 문제를 푸는 방법이었다.
물론 나의 진로를 대학원 진학으로 이미 확정한 시기였지만, 대학원 진학에 코딩 테스트가 있기도 했고 나 또한 알고리즘 실력에 많은 부족함을 느꼈기 때문에 새해 첫 목표로 바로 알고리즘 재활을 정했었다. 나름 1달 정도는 열심히 풀었고 백준 골드 달성을 목표로 하루에 1문제 이상 꾸준히 풀었던 것 같다. 실제로 1월에 백준 골드5를 달성했었고 여기에 더욱 탄력을 받아 더 많은 문제를 풀고 공부를 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군대에서 퇴근 후 매일 사지방에 가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다.

결국 2월 중순 쯤 정보처리기사 준비와 영어 공부를 핑계로 그만 두게 되었다. 나름 골드 달성이라는 1차적 목표를 달성했지만, 알고리즘 실력을 향상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2021년 쯔음 SW 마에스트로를 위해 코딩 테스트를 준비하던 시절의 실력 만큼만 딱 재활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앞으로를 기약하며 알고리즘 재활은 50일 만에 멈추게 되었다. 무언가 새해 첫 목표이자 도전을 작심 3일 느낌으로 끝내게 된 것 같아서 아쉬웠지만, 어찌할 방도는 없었다. 더 중요한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상병이 된 나의 삶은 아주 바빴다. 자세한 이야기는 전역 후에 공개될 예정이다.
"2024년을 회고하다"에서 언급 했던 것 처럼 군대에서 나의 최우선 목표는 많은 책을 읽고 교양을 쌓는 것이었다. 나는 항상 주변 사람들에게 말 버릇 처럼 "책을 읽는 것은 최고의 공부이다."라고 말했기에, 나 또한 군대라는 시간을 활용하여 많은 책을 읽고자 하였다. 물론 생각보다 군생활을 다른 공부로 바쁘게 보냈기 때문에 예상 했던 것 보다는 적은 책을 읽었지만, 그래도 남에게 자랑할 수 있을 많은 많은 책을 읽기 위해 노력했다.
1달에 3권 씩은 꾸준히 책을 읽었으며, 그 결과 올해도 작년과 동일하게 36권의 책을 읽을 수 있었다. 2025년은 나에게 힘든 한해였기 때문에 공부 보다는 위로를 얻을 수 있고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책을 중점적으로 읽었으며, 대부분 고전 문학 혹은 독일 및 러시아 소설이었다. 물론 짬짬히 나의 전공과 관련된 책을 읽기도 하고 인문학 교양책을 읽기도 하였으나, 내가 집중한 것은 역시 고전 문학과 소설들 이었다.
- 노변의 피크닉
- 눈에 보이지 않는 지도책
- 신이 되기는 어렵다
- 사랑의 기술
- 역사의 쓸모
- 노인과 바다
- 이상선집
- 행복한 왕자
- 크놀프
- 싯다르타
- 자기만의 방
-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 세계여행 플랜북
-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 지하로부터의 수기
- 사슴
- 수용소에서 하루
- 객체지향의 사실과 오해
- 당신 인생의 이야기
- 실용주의 프로그래머
- 탱크의 탄생
- 롤리타
- 가벼운 항공전의 역사
- 제품의 탄생
- 암병동1
- 암병동2
- 저주받은 도시
- 혼자 공부하는 머신러닝/딥러닝
- 여행의 기술
- 마뜨료나의 집
- 정지용 시집
- 절망
- 전락
- 독일인의 사랑
- 인간의 대지
- 야간 비행
위의 목록은 내가 2025년 1월 1일 부터 2025년 12월 31일 까지 읽은 책의 목록이다. 책 제목들을 보면 무언가 우울하거나 어두운 이야기를 담은 책들이 많이 보일텐데, 사실 나는 이렇게 우울하고 어두컴컴한 분위기의 책을 좋아한다. 나는 생각한다. 사람은 두 종류의 인간으로 이분할 수 있다고 말이다. 기쁘고 밝은 글에서 행복을 얻어가는 사람 혹은우울하고 어두운 글에서 위안을 얻어가는 사람 말이다. 나는 완전한 후자의 인간이었기 때문에 우울하고 어두운 책을 읽었다.
누군가는 나에게 질문한다. "이렇게 우울한 책들을 읽으면 함께 우울해지지 않느냐고..." 하지만 나는 반문한다. "우울하고 어두운 분위기의 글 속에 숨어있는 따뜻함, 사소한 행복, 그리고 그 상황 받아들이고 대처하는 자세에서 위안과 교훈을 얻어간다고..." 말이다. 그렇기에 나의 2025년 최고의 책은 암병동 - 알렉산드로 솔제니친이다. 스탈린 사후 혼란한 소련, 변방의 아시아에 위치한 한 암병동에서 치료 받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제목부터 배경까지 어둡고 우울하기 짝이 없지만, 나는 그 책에서 희망과 행복을 발견했다. 나의 삶속에도 그런 희망과 행복이 있을 것임을 말이다.
물론 나의 상황을 이렇게 정말로 어둡고 우울한 책에 비유하는 것은 때때로 적절하지 못하다는 생각도 든다. 당연히 나의 상황은 이 책 속 내용보다 수십수백배는 더욱 긍정적이고 희망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 또한 2025년 정말 힘들고 절망적이었던 시기가 있었으며, 나의 상황 보다 정말 안좋은 이 책의 주인공들도 그 상황에서 희망과 행복을 찾았기에 나도 내 삶에서 희망과 행복을 찾을 수 있었다.
여행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취미이자 리프레시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기에 시간이 날 때마다 새로운 국가와 도시로 떠나기 위해 노력 했었다. 공군 특성상 휴가 일정 조정도 유연하고 휴가도 길었지만, 길게 여행을 떠나는 것은 마음은 즐거워도 몸이 고생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목적지와 일정 선택에 많은 고민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산이었기에 월급에 적자가 나지 않으면서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는 여행지를 많이 고민 했었다. 이에 부합하는 여행지는 말레이시아, 태국, 홍콩 & 마카오 등이 있었고 결국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로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쿠알라룸푸르는 환승을 하기 위해 스탑오버로 여행을 주로 하는 도시이고, 한국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여행지이다. 애매한 거리에 애매한 물가, 그리고 애매한 컨텐츠를 가진 도시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제약사항이 많은 나에게 쿠알라룸푸르는 최적의 도시가 되어 주었다. 왕복 20만원 초반대라는 말이 안되는 가격과 동남아 최상위권 치안, 그리고 수도 근교에 몰려있는 몇몇의 관광지들은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쿠알라룸푸르는 사실 빠니보틀과 공혁준이 방문하여 미식탐방을 했던 도시이기에 이번 여행의 컨셉은 말레이시아 음식을 즐기는 것이었다. 한국에 절반에 불과한 물가에 동남아 여행의 최대 단점인 식중독과 물갈이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고, 중국과 동남아 식문화가 혼합되어 다양한 음식들이 있었다. 역시 기대했던 것 만큼 말레이시아 음식은 정말 맛있었고 가성비도 좋았다. 치킨 라이스, 바쿠테, 나시르막, 나시고랭 등 음식들 모두 내 입맛에 맞았고 한국에 1/2 되는 가격에 정말 풍족한 음식을 즐길 수 있었다.

물론 쿠알라룸푸르의 볼거리는 음식만이 아니였다. 동남아에서 보기 힘든 스카이라인과 웅장한 건축물, 그리고 바투 케이브와 겐팅 하일랜즈로 대표되는 웅장한 자연 관경들 모두 좋았다. 쿠알라룸푸르는 인종의 용광로 같은 도시였기에 각 구역마다 펼쳐지는 중국, 인도, 말레이 민족들의 문화가 녹아진 거리들 모두 아름다웠다. 특히 나에게 인상 깊었던 것은 이슬람 문화 였다. 도시 곳곳에 모스크가 있었고 특정 시간마다 울리는 기도 소리는 정말 인상 깊었다.
나의 여행에서 항상 일어나는 현지인들 혹은 다른 여행객들과의 만남 또한 쿠알라룸푸르에서 빈번하게 일어났었다. 이슬람 미술관을 가던 도중 알제리계 프랑스 형님을 만나 수시간 동안 이슬람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 강의를 들었었고, 비록 비행기 일정 때문에 가지는 못했지만 게스트 하우스에서는 영국 형님을 만나 저녁 파티에 초대 받기도 하였다. 위성도시이자 행정수도인 푸트라자야에서는 아프카니스탄에서 탈레반의 탄압에서 탈출한 할아버지의 아프카니스탄 탈출 썰을 듣기도 하는 아주 신박한 경험이었다.

쿠알라룸푸르 여행은 비록 혼자 간 여행이었지만, 정말 심심할 틈이 없었기에 2025년 여행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이다. 지인들에게도 쿠알라룸푸르를 항상 작은 육각형의 여행지라고 소개할 만큼 좋은 기억이 많았던 곳이다. 추후 함께 여행할 수 있는 소중한 사람이 생기면 꼭 한번 다시 가보고 싶다.
3학년을 수료하고 학교를 3년 넘게 다닌 지금... 사실 나는 학교 축제를 즐겨본 적이 없다. 1, 2학년 때에는 코로나로 인하여 학교 축제는 커녕 등교조차 하지 않았고, 축제가 다시 시작된 3학년 때는 전공수업에 치여 살았기 때문이다. 한편에서는 에스파가 와서 노래를 부르고 있고 한편에서는 강의실에서 전공 강의를 듣는 대조적인 학교 생활을 해왔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군생활을 하는 나에게 오히려 학교 축제란 시험과 과제의 리스크가 없이 오직 도파민 만을 추구할 수 있는 행사였다.
또한 이번 학교 축제에는 내가 좋아하는 유다빈 밴드가 왔기에 반드시 참여하기를 맘을 먹었다. 물론 아싸 군인이고 4학년에 올라가는 화석이기 때문에 공연을 제외한 다른 부스는 참여하기 어려움이 있었지만, 지금까지 전공 강의실에 살짝 살짝 들려오는 공연만을 들었던 나에게 라이브를 듣는 것만해도 뜻 깊은 일이었다. 그러기에 학교 축제 일정에 맞추어 휴가를 썼고, 몇 남아있지 않은 선후배와 함께 공연을 들으러 갔다.

인생 처음으로 즐기는 학교 축제는 솔직히 재미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밴드를 학교를 다니는 것만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고, 유다빈 밴드 공연은 열정적으로 즐겼던 것 같다. 다만 유다빈 밴드의 공연이 끝나고 권은비와 박재범이 나왔을 때에는 솔직히 말해서 도망쳤다. 상대적으로 둘의 인기가 더 좋았기 때문에 사람이 더 몰렸고 더 열정적이었기에 내향인인 나의 에너지는 고갈되었다. 물론 후회는 없다.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일 축제를 즐겨봤다는 것에 만족했고, 이제 나의 자리는 더욱 인생을 더 잘 즐기는 사람들에게 양보해야 한다.
공군 창업경진대회는 군생활에서 가장 기대하고 있던 이벤트 중 하나였고, 먼저 군대를 갔다온 여러 친구들이 해당 대회에서 좋은 결과를 얻었기 때문에 나 또한 좋은 결과 얻고 싶었던 마음이 정말 컸었다. 또한 군대에 오기 전 나는 3년간 실제로 스타트업 필드에서 뛰며 울고 웃었던 경험이 있기에 나의 실력을 뽐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던 행사였다. 하지만 기대와 자만이 너무 컸던 탓일까? 결론부터 먼저 말하자면 나는 공군 창업경진대회에서 모두 실패 했고 이 대회를 기점으로 나 스스로에 대한 의심과 걱정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우리 팀원들은 모두 좋은 학력에 좋은 경력을 가진 뛰어난 인재들이었고, 우리가 낸 아이디어 또한 상당히 괜찮다는 생각을 했었다. 이에 더해 창업을 이미 경험했던 자칭 창업 전문가들이 둘이나 있었기에 실패의 충격은 더욱 크게 다가왔다. 사람들은 말한다. 군대에 있으면 사회에 뒤처진다고 말이다. 나는 공군 창업경진대회의 결과를 통해 사회에서 뒤처졌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몇개월 간 자기 의심과 번민에 빠져 살았던 것 같다.

"나의 창업 경험이 이제는 너무 낡은 것일까?", "수년간 배워온 기획 방법론이 의미 없어진 것일까?", "나의 지식은 이제는 고리타분한 지식이 되어버린 것일까?" 같은 자기 의심과 번민을 탈락 이후 몇달간 스스로에게 계속 자문 해왔다. 이후 자격증 공부와 독서를 통해 조금이나마 생각에 늪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전역이 한달 남은 지금도 여전히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 사회는 너무 빠르게 변화하고 있고 나는 뒤처진게 아닐까 하는 생각 말이다.
공군 창업경진대회를 위해 정말 많은 시간을 투자했었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두 대회에서 탈락한 이후에도 아이디어를 다듬어 여러 대회에 다시 출품해 보았다. 하지만 빈번히 결과는 탈락이었고 2025년은 내가 공모전과 대회에서 수상하지 못한 첫 번째 해가 되었다. 이 결과는 나에게 슬럼프라는 인식을 가져오게 해주었고 여전히 그 인식은 이어지고 있다. 그렇기에 2026년에는 이 슬럼프를 탈출하기 위해 더 노력할 것이다.

2025년 상반기에 수많은 대회에서 탈락하고 슬럼프에 빠져 허우적 되는 동안 그나마 하나의 기쁜 소식을 얻을 수 있었다. 첫 번째는 정보처리기사를 취득한 것이었고, 두 번째는 TOPCIT 최고점을 갱신한 것이었다. 물론 두 자격증 모두 나의 스펙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 자격증 들이지만, 노력에 대한 성취를 얻지 못하던 2025년 상반기에 찾아온 첫 노력에 대한 성취였기 때문에 더욱 크게 의미가 다가왔다.

정보처리기사 취득은 군생활 중 하고자 했던 마이너한 목표이기도 하고, 이 시기가 아니면 취득할 시간이 없을 것이라 판단 했기 때문에 1트에 취득을 목표로 상당히 열심히 했던 것 같다. 전공자임에도 불구하고 정보처리기사 실기 & 필기 기출 문제집을 3회독을 했을 정도로 열심히 했었다. 일반적으로 전공자는 1-2주 공부하고도 합격한다는 인식이 있었던 정보처리기사였지만, 올해부터 실기 난이도가 매우매우 어려워진 탓에 이 노력이 빛을 볼 수 있었다.
사실 2025년도 1회차 정보처리기사 실기는 전공자이자 코딩 꽤나 한다는 나에게도 충격이었다. 기출 문제집에서 코딩 문제는 아주 쉬운 수준이었고 주로 문법을 물어보는 문제였지만, 실제 시험에서는 2개의 함수를 번갈아 호출하는 재귀 같은 상당히 난해한 문제가 출제되었던 것이다. n년간의 손코딩 시험으로 이런 문제에 익숙해져있기 망정이었지, 비전공자들은 정말 한숨을 푹푹 쉬며 문제를 풀었다. 결론적으로 나는 아주 잘하지는 않았지만 여유롭게 합격했으며, 합격률 15%라는 극악의 시험에서 생존했다.

TOPCIT은 내 블로그를 봐왔던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연례 행사 처럼 나의 실력을 테스트하기 위해 보는 시험이다. 정보처리기사를 공부하면서 단순히 기출을 푸는 것이 아닌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는 방식으로 공부하면서 TOPCIT도 함께 공부하였고, 이번 시험에서는 800점을 목표하며 시험을 준비했었다.
매년 TOPCIT을 보면서 항상 상위 0.01% 이상의 성적을 유지하였기 때문에 공군 1등 혹은 국방부 1등이라는 목표를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이번 시험에서도 아주 좋은 점수인 810점을 받았고 드디어 800점이라는 벽을 넘게 되었다. 물론 이번 시험이 쉽게 나온 것도 있지만 TOPCIT 자체가 어려운 시험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물론 올해는 공군 내부에서 TOPCIT 시상을 하지 않아 나의 군내 성적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중학교 때부터 영어는 항상 나의 발목을 잡는 요소였으며, 나는 소위 영포자인 사람이었다. 물론 전공 특성상 영어를 아주 못하는 정도는 아니였지만, 그렇다고 어디가서 영어를 잘한다 내밀 수 있는 실력도 아니였다. 무엇보다 나의 영어는 기술 문서 읽기와 여행 커뮤니케이션에 특화된 실전 압축 영어였기에 영어 시험에 필요한 정석적인 영어와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졸업과 진학을 위해서는... 영어가 필요했다. 아니 필수적이었다. 특히 나에게는 TOEIC 점수가 필요했는데, 그래서 군생활 중 목표 중 하나는 토익 700점대를 달성하는 것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이 점수가 굉장히 쉬운 점수일 수 있지만, 나에게는 상당히 어려웠다. 물론 TOEIC만을 한 것은 아니였지만 타 공부와 병행하면서 하루에 2-3시간을 투자한 결과 700점대를 달성하는데에는 3-4개월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물론 노력한 것에 비하면 썩 마음에 드는 점수는 아니였고 첫 목표는 TOEIC 700점 후반대를 받는 것이었으나, 이 점수면 그래도 졸업과 진학에 큰 지장이 가는 점수가 아니였기에 7월 이후에는 TOEIC을 그만 두었다... 물론 지금 그때 그만 둔 것이 아쉬워서 다시 하고 있긴 하지만, 정말 하기 싫었고 정말 고통스러웠다. 군대에서 독학만으로 매일 LC/RC를 풀고 있는 나의 모습에 너무 현타가 왔었고 솔직히 끔찍한 시간이었다.
가뜩에나 군대에 있는 것 조차 스트레스를 받는데 내가 싫어하는 공부를 6-8문제 차이로 계속해야 한다는 것이 너무 희망 고문이었고, 군생활 하면서 토익을 준비하고 공부하는 시간이 나에게는 너무나 힘들었다. 물론 그 덕분에 영어 실력이 많이 늘긴 했지만... 조금은 더 효율적이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공부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서 지금 다시 토익을 도전하고 있는 것 같다.

병장이 된 나의 삶은 아주 고통스러웠다. 자세한 이야기는 전역 후에 공개될 예정이다.
'그돈씨'라는 생각으로 매번 해외여행을 떠나던 내가 2025년 첫 국내여행을 떠났다. 사실 제주도를 가고 싶은 것 보다, 정기공수를 군생활에 한번쯤 타봐야겠다는 마음이 여행의 동기였다. 물론 제주도에서 학교를 다니는 친구를 만나기 위함도 있었고, 내가 신청한 정기공수 편이 8월 극 성수기에 제주도를 왕복하는 여정이었기 때문에 수십만원을 절약할 수 있다는 것 또한 동기였다. 즉 정기공수 경험해 보기 + '그돈씨'를 이겨버린 정기공수의 엄청난 가성비가 제주도 여행을 결정하게 만들었다.
이 글을 읽고 있다면 이러한 궁금증이 생길 것이다. "그 정기공수가 뭐지?"라는 질문 말이다. 정기공수란 대한민국 공군에서 화물 수송과 같은 작전 목적으로 운항하는 항공기로 사전 신청으로 군 소속 인원이라면 누구나 탑승할 수 있는 항공기이다. 장점은 비용이 무료라는 것과 군 수송기를 타본다는 흔치 않은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단점은 당연히 장점 외의 모든 것이며, 항공기 탑승 여부를 전날에 알 수 있고 많이 흔들리고 불편하고 오래 걸린다는 등 많은 것들이 있다. 아래 사진은 스페인 공군의 CN-235로 대한민국 공군 또한 동일한 기종을 운행하기에 동일한 비행기를 탑승할 수 있다. 이외에 C-130H 기종도 운영하지만, 주력 운영 기종은 CN-235로 내가 가는 서울 - 제주 정기공수 편 또한 CN-235로 운행되었다.

정기공수 편의 탑승 유무와 관련 없이 8월 초는 제주도에서 성수기였으므로 숙소 예약이 필수적이었다. 그렇기에 정기공수 편의 인가가 나지 않더라도 예약된 숙소를 가야했기 때문에, 나의 경우 미리 비슷한 일정의 제주항공 민항기 편을 예약하고 예약 취소 보험을 들어두었다. 덕분에 정기공수 편의 인가가 결정된 시점에 단돈 만원이라는 금액으로 왕복 항공편을 취소 할 수 있었다. 제주도에 친구가 있었지만, 친구는 기숙사에 살고 있었고 예전부터 꿈꾸어왔던 제주도 게스트하우스 여행과 포틀럭 파티를 위해 게스트하우스로 숙소를 예약하였다. 물론 몇몇 사람들이 제주도에서 바라는 클럽과 같은 파티는 난... 선호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최대한 소규모면서 음주가무가 절제되어 있는 포틀럭 파티를 운영하는 곳으로 결정했다. 그냥 밤바다 보고, 밤하늘 보고, 난롯불 보며 불멍하는 시간이 나에겐 필요했다.
이쯤 와서 말하자면 나의 이번 제주도 여행 컨셉은 여유와 힐링이었다. 군대에서는 항상 일과에 맞추어 생활해야하고 또한 나의 인생은 몇년간 아주 계획적이고 철저한 삶이었기 때문에 이번 여행에서는 아무런 계획없이 아무런 속박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 목표였다. 3박 4일 동안 이틀은 친구와 함께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제주도 전문가 친구에게 모든 일정을 부탁하는 '제주 풀코스' 컨셉이었으며, 남은 이틀은 나 홀로 필름 카메라 들고 주변을 방황하는 '스트릿 포토그래퍼' 컨셉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두 컨셉 모두 매력적이었고 성공적인 경험이자 기억으로 남는 것 같았다. 사진, 기록, 공부, 업무에 구속 받지 않는 3박 4일간의 시간을 보냈다.

제주도에서 3박 4일간은 행복했다. 친구와 함께하는 이틀 간의 제주 풀코스는 너무나 반가웠고 너무나 친근했던 고등학교 기억들이 떠오르는 시간이었으며, 모두가 향수 속에 살아간다는 말과 같이 고등학교 시절의 노스텔지어를 불러오게 만드는 수년만의 시간이었다. 혼자 함께한 이틀 동안의 고독에서는 수년간의 고뇌와 번민을 조금이나 떨쳐 낼 수 있는 시간이었으며, 정말 오랜만에 아무것도 안하며 쉴 수 있다는 것에 행복을 느꼈다. 해외 여행도 참 좋은 경험과 시간이었지만, 모든 것이 새로운 환경이기에 나는 언제나 긴장해 있고 더 많이 경험하고 기록해야 한다는 내재되고 잠재된 강박 속에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제주도라는 낯설면서도 너무나 익숙한 환경에서는 이러한 강박을 내려놓고 쉴 수 있었다. 그 점이 여행에서 가장 좋았다.
또한 이번 여행에서는 해외 여행에서의 언어적 장벽으로 제한되었던 많은 교제를 할 수 있었다. 물론 그러한 교제가 지속적이고 유지될 수 있는 교제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냥 서로의 인생에 스쳐가는 존재이며, 기억의 조각속에서 살아가는 어느 한 사람의 피상적인 페르소나 일 뿐이다. 그 사람들은 여행이라는 시간 속에서 서로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을 아름답고 좋은 모습의 마스크로 포장한 페르소나일 뿐이다. 나 또한 그런 페르소나를 가지고 여행 했으며, 서로의 고민와 삶의 애환을 나누는데에는 오히려 서로를 잘 모르는 페르소나 간의 대화가 때로는 더 좋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자신의 문제는 자신이 잘 알고 가장 잘 판단할 수 있고,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는 것은 그 판단에 대한 확신을 얻기 만을 위함이기에, 페르소나 간의 밝고 긍정적인 대화는 서로에게 확신을 만들어 준다. 나에게 제주도는 그런 곳이었다.

홍콩과 마카오 여행은 군생활에서의 3번째 해외여행이자 누군가와 함께한 여행이었다. 사실 홍콩과 마카오는 나에게 그다지 매력적인 여행지는 아니였다. 나는 이미 대만을 갔다 왔기 때문에 중화권에 대한 여행 경험이 있었으며, 홍콩과 마카오가 2000년대 초반 처럼 특유의 문화를 가진 아시아의 문화 선진국이 아니였기 때문이다. 1980년대 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아시아의 문화와 경제를 홍콩과 마카오가 이끌었지만, 1997년과 1999년에 각각 이루어진 홍콩과 마카오 반환 이후, 각 도시만의 특색은 사라지고 그저 하나의 중국이 되었던 것이 여행지로써의 매력을 상당히 반감 시켰다.
하지만 나는 계속된 홀로 여행으로 많이 지쳐있었고, 여행에서 느낀 소회를 나눌 사람이 필요했다. 그렇기에 함께 할 여행 메이트를 찾게 되었고 부대원과 함께 여행지를 고민 하던 중 홍콩과 마카오라는 선택지를 찾아내게 된 것이다. 사실 우리는 홍콩 & 마카오, 태국 방콕, 일본 히로시마 라는 후보군을 두고 많이 고민을 하였다. 나의 1픽은 태국 방콕이었지만, 일본 외에 해외 여행이 처음이었던 부대원을 배려해서 상대적으로 난이도가 낮고 안전한 홍콩 & 마카오로 결정하게 되었다. 물론 나의 취미가 필름 사진이었기 때문에 홍콩과 마카오의 도시와 야경을 필름에 담고 싶었던 이유도 있었다. 중경삼림 속 홍콩을 나의 카메라에 담는다는 것... 지금 생각해도 매력적인 이유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첫 여행지는 마카오였다. 홍콩 공항에서 마카오로 가는 공항 버스편을 무료로 제공하고 있기도 했고 상대적으로 밋밋한 여행지를 먼저 가야한다는 나의 철칙의 따라 마카오를 첫 여행지로 결정하였다. 마카오는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만큼 다양한 포르투갈 풍의 유적지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 매력 포인트였으며, 포르투갈과 중국이 적절하게 조화된 특유의 분위기가 매력적인 도시였다. 물론 마카오 또한 상당히 중국화 되었기 때문에 건축물 외에서는 포트투갈의 향취를 맡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마카오가 가지고 있는 매력은 포르투갈의 유산 뿐이 아니였다. 마카오는 '카지노'의 도시라는 타이틀에 걸맡게 여러 카지노 호텔은 아주 웅장하고 거대했으며, 마치 리조트 혹은 쇼핑몰과 같은 정말 거대한 카지노와 어트랙션들이 아주 신기했다. 지하에는 카지노가 있고 지상에는 쇼핑몰, 그 위에는 호텔이 있으며, 외부에는 워터파크, 카트장과 같은 다양한 시설들이 하나의 지구에 있는 것이 신기했다. 카지노가 주 수입원인 만큼 카지노 외의 시설은 저렴하고 이용에 제한이 없었으며, 특히 호텔 가격은 홍콩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아주 저렴했다. 대한민국 국민은 속인주의 원칙에 따라 카지노를 할 수 없지만, 그 시설들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관광의 가치가 있는 도시 였다.

그 다음 우리는 페리를 타고 홍콩으로 이동했다. 무료 공항 타고와 몰랐지만, 이용 요금이 편도 4-5만원에 육박하는 폭력적인 가격을 듣자마자 "우리가 홍콩에 가고 있구나"라는 느낌이 들었다. 홍콩은 아시아 금융의 허브였던 만큼 마카오보다 더욱 발전되어 있고 실제 업무 지구로 이루어진 마천루가 아주 화려했다. 홍콩의 빅토리아 피크에서 내려다 보는 야경은 절경 그 자체였으며, 낮에도 동남아 특유의 푸른 바다 빛과 어울어진 마천루 들이 정말로 아름다웠다. 또한 홍콩 영화의 유산들이 아직 곳곳에 조금은 남아있었기에 그것들을 하나하나 찾아보는 것도 재미였다.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우리의 숙소가 위치한 구룡의 건물들이었다. 나의 숙소는 그 유명한 충킹 맨션 옆에 위치한 미라도 맨션이었다. 악명 높은 충킹 맨션 만큼은 아니였지만, 이 곳 또한 낡고 좁았기 때문에 사실 숙소의 컨디션은 흡사 공군 훈련소 아이브동과 비교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영화와 뉴스에서 보던 그 낡고 허름한, 그리고 좁디 좁은 곳에서 내가 실제로 왔고 이틀밤을 보낸다는 것이 나름 의미 깊었다. 영화 속의 한장면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고, 군생활 때문에 강제로 늘어난 생존력과 적응력 덕분에 나는 나쁘지 않았다. 딱 이틀 밤 까지만 재미를 얻을 수 있었던 것 같다.

홍콩과 마카오의 3박 4일은 짧지만 길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여전히 홍콩과 마카오는 관광지로 매력적인 도시이다. 맛있는 음식, 다양한 문화, 멋있는 광경 등등 작은 2개의 도시에 많은 컨텐츠들이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아쉬움과 실망스러움도 많이 남는 도시이다. "빛나는 과거가 있었기에, 우리가 기억하는 홍콩과 마카오가 있기에" 말이다. 이제는 중국이 되어버린, 그저 물가 비싼 중국이 되어버린 도시이다. 처음 여행을 떠나는 사람에게는 추천할 수 있는 도시지만, 무언가 기대를 품고 떠나는 사람에게는 추천하기 어려운 도시가 되어버렸다.
9월은 전역까지 약 6개월 남은 시점이었고 나 또한 전역을 하게 되면 복학 후 진학 준비 및 취업 준비를 해야 했기에, 잠깐의 뜬 시간은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만들기 적절한 시간이었다. 약 2주 정도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만들기로 기간을 설정했고, 목표는 전역 후 미팅과 컨택을 포멀하지 않은 자유 형식의 이력서를 만드는 것이었다. 즉 추후 다시 대학원 혹은 기업에 제출하기 위한 이력서를 만들때 쓰기 위한 기초 자료를 만듬과 동시에 어디든지 가볍게 나누어 줄 수 있는 자세한 이력서를 만들고자 했다.

나는 고등학생 때부터 컴퓨터공학과 컴퓨터과학을 전공했기에 남들에 비해 쓸 수 있는 내용들은 정말 많았다. 고등학교 시절 프로젝트 부터 시작해서 창업, 그리고 인턴 연구원 생활의 프로젝트까지 정말 많았다. 그렇기에 그 방대한 내용을 정리하고 정제하는데 정말 많은 시간을 투자했던 것 같다. 이러한 모든 내용을 적은 이력서인 CV(Curriculum Vitae)를 만드는 작업부터 시작했으며, Resume는 추후 필요할 때 제출처에 맞게 작성하는 것으로 계획하였다. 일반적으로 CV는 수 페이지 분량에 아주 자세하게 작성하지만, Resume는 1-2페이지는 작성하기 때문에 이렇게 전략을 설정했다.
CV는 당연하게도 영문으로, 그리고 작성의 용의성을 위해 LaTeX를 활용하여 작성했으며, 아주 유명한 CV 템플릿인 Awesome-CV를 포크하여 작성하였다. 사실 2주 정도 이력서를 만들자고 생각했으나, 방대한 양과 9년 간의 자료를 다시 모아서 정리하는 것이 상당히 오래 걸렸기 때문에 예상했던 2주를 한참 넘은 4주 가량의 시간이 투자되었으며, 사무실에서는 CV의 각 항목에 들어갈 내용을 한글로 생각하고 퇴근 후 생활관에서는 싸지방에 달려가 해당 내용을 정제하고 영어로 작성하는 방식으로 작성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CV는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지만, 나름 잘 정리되었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종종 나를 소개할 일이 있으면 간편하게 CV 부터 한 부 인쇄해가며 요긴하게 사용하고 있다.

포트폴리오는 이력서에 설명한 프로젝트 중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4개의 프로젝트를 뽑아 매우 상세하게 작성하여 만들었다. 아무래도 이력서는 나의 전문적 경력을 포괄적으로 설명하는 서류이기 때문에 프로젝트 마다의 설명이 부족한 점이 많다.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내가 무엇을 하였고, 이를 위해 어떤 기술을 사용했으며, 이 기술을 사용한 이유는 무엇인지, 또 얻은 성과는 무엇인지"와 같은 프로젝트 별 아주 상세한 내용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즉, 포트폴리오는 나의 성과물을 소개하기 위한 서류이기 때문에 '나'의 성과 보다는 '프로젝트'의 성과를 작성하는데 집중하였다.
포트폴리오는 일반적으로 Github에 정리하기도 하고 자기만의 Blog를 만드는 경우도 많지만, 솔직히 나는 서면으로 볼 수 있게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생각 했기에 슬라이드 방식으로 만들었다. 물론 PPT를 활용한 것은 아니고 A4 용지에 깔끔하게 인쇄될 수 있도록 Figma를 활용하여 슬라이드 형식의 포트폴리오를 만들었다. 마치 디자이너 포트폴리오에 가까운 방식이었다. 이렇게 한 이유는 나의 프로젝트는 하나의 기술을 강조하는 것에 대해 나의 소프트스킬을 포괄적으로 강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였다. 나는 단순히 개발자가 아닌 Solutions Architect로의 커리어를 쌓고 싶기 때문이었다. 개발을 넘어 기획과 제품, 그리고 고객을 아는 나의 역량을 강조하고 싶었다.

이러한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는 군생활에서도 나름 요긴하게 사용되었다. 전역 후 미래를 설계하기 위해 나를 소개하는 단계에서 대면이나 비대면 미팅이 힘든 나를 소개할 수 있는 하나의 무기가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지금 군생할을 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군 생활 동안 자신의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보는 것이 좋을거라는 조언을 하나 던지고 싶다. 그뿐이다.
올해 1월에 이어 시즌 2,147,483,647번째 알고리즘 재활을 시작했다... 아무래도 알고리즘 문제 풀이는 영어, 시험 공부에 비하면 우선 순위가 밀리기도 하고 군대에서는 환경적으로 하기 어려움이 있기에 바쁜 일정이 생기면 중단하는 경우가 많았다. 올해 초에도 정보처리기사 공부 때문에 알고리즘 재활을 중단했기에 아쉬움이 남는다. 참 하루에 한 문제 푸는데에 1-2시간이 걸리니 시간을 투자하기 참으로 어려우면서도 중요성이 크다보니 완전히 포기하지는 못하고 짬짬히 재도전을 하게 되는 것 같다.
이번 알고리즘 재활은 올해 초와 다르게 백준이 아닌 프로그래머스로 시작했다. 내가 준비하는 코딩 테스트가 프로그래머스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보다 실전과 유사한 경험을 쌓기 위해 프로그래머스를 선택했다. LV.1 ~ LV.3 까지의 문제를 풀고 프로그래머스의 알고리즘 고득점 KIT를 푸는 것을 목표로 재활을 시작하였다. 아무래도 백준 보다는 테스트 케이스도 적고 실행 시간이나 메모리 제한도 널널했기 때문에 보다 쉽게 문제를 풀 수 있었던 것 같았다.

약 10월 초부터 이 글을 쓰고 있는 2026년 1월 말까지 91문제를 풀었으니 해외 여행 기간과 시험 전날을 제외하면 정말 꾸준히 문제를 풀었던 것 같다. 이번에는 더욱 코딩 테스트에 적합한 C++를 주력으로 공부했고 정석과 같은 문제를 풀어 다양한 유형을 익히는 것에 집중하였다. 덕분에 실버 후반 ~ 골드 초반 까지는 빠르게는 풀지 못해도 고민을 통해 문제를 풀 수 있는 수준 까지는 실력을 상승시킬 수 있었다. 나의 목표가 골드 후반까지 수월하게 푸는 체급을 만드는 것이기에 상당히 만족스러운 결과라고 생각 한다.
물론 2026년에도 휴식 기간을 제외하고 계속 알고리즘 재활을 이어나갈 계획이며, 2026년에는 꼭 골드 후반까지 쉽게쉽게 푸는 나를 보고 싶다. 물론 목표하는 코딩 테스트에서 좋은 점수를 얻는 것도 당연하게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주변에 알고리즘을 잘하는 친구들이 너무너무 많기 때문에 골드인 나의 랭크는 참으로 사소하고 초라하지만, 뭐 어떤가? 나의 무기는 알고리즘이 아니며, 알고리즘은 나를 목표로 다가설 수 있게 만들어주는 티켓일 뿐임을 언제나 되새겨야 하는 법이다.
공군 해커톤은 2024년에 나에게 큰 명예를 주었던 공군 내의 큰 대회이다. 함께 참여했던 부대원들은 전역을 했지만, 새로운 팀을 꾸려 새로운 명예를 얻기 위해 다시 한번 도전하게 되었다. 공군 해커톤 전까지 모든 대회에서 실패만을 거듭했기 때문에 이 대회는 나의 자신감 회복을 위한 장이자 2025년의 유종의 미를 얻기 위한 도전이었다. 특히 이번 년도 주제는 AI·빅데이터를 활용한 MZ세대 창업 실패요인 분석 및 재도전 지원체계(한국청년기업가정신재단 과제) 창업을 경험해본 우리 팀에게 아주 적합했기에 더더욱 자신감이 있었다. 하지만 2025년이 나에게 삼재가 껴있는 해였던 만큼 공군 해커톤 또한 허무하게 실패하고 말았다.

앞서 참여했던 대회들은 아이디어 보다는 완성도로 승부를 봤던 대회였고 이번 공군 해커톤은 완성도와 동시에 좋은 아이디어를 함께 가지고 갔었다. 그러기 위해 함께 SW 마에스트로를 연수했던 사람과 팀을 꾸렸고, 아이디어 또한 수번의 브레인스토밍을 통해 발전시켜 나갔다. 그랬기에 기존 대회와 달리 예선 탈락이라는 결과는 얻지 않았고 본선까지 올라가 최종 발표까지 진행하였었다. 최종 발표에서도 최고는 아니지만 최선의 발표를 했다고 믿었기에 더욱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기대가 컸던 만큼 본선 결과가 나오고 입선하지 못하는 결과를 얻었을 때 실망감이 더더욱 컸었다. 정말 나에게 무엇이 문제가 있는 것인지, 나의 경험과 배움이 이제는 쓸모 없어진 것인지 자책을 정말 많이 했었다.
하지만 인생에서 실패에 대한 정답을 찾기란 정말 어렵다. 우리는 최선을 다했고 우리의 아이디어는 사랑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기와 장소를 잘못 만난 것이라고 위로할 뿐이다. 사실 이 공군 해커톤 이후 2025년에는 또 다른 대회에 참여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저 슬럼프를 인정하고 그 파도에 몸을 맡길 뿐이었다. 더이상 "무엇이 문제일까?", "무엇이 잘못된걸까?"라는 질문은 의미가 없었다. 조용히 변곡점을 찾아야만 하는 시기가 온 것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도 나는 슬럼프의 변곡점을 찾지 못했고, 지금까지 모든 대회의 우리 팀의 아이디어가 좋았다고 믿는다. 하지만 "조금은 자만하지 않았나"라는 사실은 인정하고 싶다. 우리에겐 다른 팀과 다른 시행착오가 없었다. 그저 경험과 지식에 의존한 프로세스를 진행했을 뿐이었다. 심사위원들이 보기에 우리 팀은 오만한 팀 이었을 것이다. 창업을 도전하는 헝그리 정신과 풀뿌리 정신이 결여된 썩어빠진 창업자였을 뿐이었다. 나는 생각하고 느낀다. 더욱 열정적으로 더욱 간절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올해는 그럴 것이다.
올해의 마지막 여행은 너무나도 편안하고 잘 아는 일본으로 선택을 했었다. 본래 카자흐스탄 알마티 여행을 계획했으나 정규 항공편 노선의 폐선으로 취소되고, 이후 계획한 태국 방콕 여행은 캄보디아 사건으로 인한 치안 문제로 취소(부모님의 격렬한 반대) 당했다. 혼자 여행하는 것에 항상 걱정하시고 마음 졸이는 부모님의 마음을 알았기 때문에 올해의 마지막 여행은 일본으로 결정하였다. 특히 일본 소도시를 가고 싶었는데, 그 후보지에는 도쿠시마, 시즈오카, 마쓰야마 등이 있었다. 하지만 너무 뜬금없이 오비히로로 여행을 떠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당연하게도 항공권 가격 때문이었다.
에어로케이 항공에서 청주 - 오비히로 직항을 운행하면서 왕복 10만원이라는 말도 안되는 가격에 표를 뿌렸었고, 홋카이도에 한번도 가보지 않았던 나 이기에 이 여정은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또한 검색을 통해 오비히로가 홋카이도의 맛의 도시라는 것 알게 된 것도 이 여정을 결정한 이유 중 하나였다. 오비히로 자체가 낙농업 육성을 위해 만들어진 도시였기 때문에 토카치 목장에서 나온 다양한 농축산물로 만든 요리들이 많았다. 특히 부타동은 오비히로에서 시작된 요리였으며, 이외에도 카레, 구움과자, 아이스크림 같은 유명한 음식들이 정말 많았다. 그렇기에 난 2박 3일 이라는 짧은 여정으로 오비히로로 떠났다.

안양에서 청주 공항으로 이동하는 강행군을 거쳐 약 16시 30분에 도착한 오비히로는 너무나 어두웠다. 표준시의 영향으로 도쿄 또한 서울보다 30분 일찍 해가 지는데, 오비히로는 도쿄보다도 더 동쪽에 있어 약 1시간 일찍 해가 졌다. 또한 역시 눈과 겨울의 고장 홋카이도 답게 아주아주 추웠다. 그래도 난 계획했던 여행 일정은 꼭 완수하는 사람이기에 언덕 전망대로 약 1시간 30분을 걸어가는 일정을 소화하고자 했으나, 너무나 추운 날씨와 오비히로에 불곰이 자주 출현 한다는 소식을 듣고... 하루만에 일정을 포기했다. 이후에 일인데, 저녁 먹으러 들어가는 식당마다 불곰 조심하라는 이야기를 했던거 보면 안가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계획을 틀어 오비히로에서 아주 유명한 음식인 인디언 카레를 먹었다. 사실 나는 카레를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소고기 베이스의 루로 만든 카레는 아주 진하고 고소했다. 가격도 만원 언저리였기에 정말로 만족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다음날에 먹은 부타동도 가격이 조금 비쌌다는 것을 제외하면 정말 정말 맛있었다. 불맛이 강했고 일본 음식 특유의 짠맛이 적어 간간하게 먹을 수 있어 만족스러웠다. 이동하는 중간중간에 먹었던 아이스크림, 유키콘 치즈, 사쿠사쿠 파이, 각종 구움과자 들도 정말 다 하나 같이 맛있었다. 왜 미식의 도시라고 불리우는지 알 수 있는 맛 이었다.

하지만 오비히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드넓게 펼쳐진 평원과 아름다운 단풍이 든 방풍림이었다. 한국은 평지가 거의 없기에 평원이라는 개념이 정말 희박한데, 유럽에서나 봤던 평원을 바로 옆나라 일본에서 다시 한번 볼 수 있었다는게 감동이었다. 이 평원 한 가운데 만들어진 방풍림은 늦가을 단풍과 어울어져 고즈녁하면서도 웅장한 분위기를 내주었다. 약 1시간 30분 가량을 걸어서 갔었는데, 그 힘듬이 전혀 후회되지 않았다.
나의 여행에는 항상 특이한 이벤트들이 따라 다니는데, 오비히로에서도 역시 그랬다. 방풍림을 가던 도중 어떤 한국인 여성분이 말을 걸어 동행하고 함께 사진 찍어 주었던 이벤트, 우연히 말을 산책시키는 오비히로 축산 대학 학생들을 만나 말을 쓰다듬어 봤던 이벤트, 여행 마지막 밤 게스트하우스에서 한국인들과 일본인들과 일본어/한국어/영어를 모두 써가며 대화했던 이벤트 등 크고 작은 이벤트들이 있었다. 그 여행지에서 만났던 한 분과는 여전히 인연을 이어가고 있을 정도로 즐겁고 행복한 이벤트들이었다.

나에게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를 묻는다면, "첫 번째는 자유로운 사고와 탐구요.", "두번째가 예측하지 못한 이벤트들이요." 라고 답할 것이다. 한국에서는 나의 진로와 미래 때문에 모든 것을 계산하고 예상하여 실행하는 인생을 살아간다. 이는 너무나 피곤한 일들이고 나의 인생이 달린 일이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오차가 생기면 아주 큰 스트레스를 받기 마련이다. 하지만 여행에는 이런 걱정이 없다. 그냥 흐르는 시간에 나를 맡길 수 있다.
OPIc을 하게 된 계기는 졸업하기에 TOEIC 점수가 아주 사알짝 부족했기 때문이고, 또한 여행으로 만들어진 나의 실전 듣기 & 말하기 실력이 어느정도 수준인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우리 학교 졸업 요건에 TOEIC 점수는 공대 기준 꽤나 높은 편이지만, OPIc은 겨우 IL이기 때문에 빠르게 OPIc으로 졸업 요건을 충족시켜 편안한 마음으로 학교를 다니고 싶었다. 물론 군인 할인이라는 아주 거대한 할인 혜택이 있다는 점도 이 시험에 대한 도전으로 나를 이끌었다. 의무적으로 하는 군생활... 조금이라도 스펙 만들고 혜택 받으면 좋지 아니한가?
그렇기에 시험 일주일 전 접수를 하고 딱 5일만 공부해서 OPIc에 응시하였다. 진짜 시험을 어떻게 보는 거고, 난이도 선택은 뭐고, 어떤 문제 유형이 나오는지만 알아보았던 것 같다. 물론 IL이라는 점수가 진짜 가서 대충 말하기만 해도 나오는 점수라는 소문을 들었기에 딱히 공부하고 싶은 마음도 안들었다. TOEIC을 산으로 표현하고 OPIc을 언덕으로 표현한 이유는 앞서 말한 것들과 같다. TOEIC에 비해 간절함과 동기부여가 부족했었다.

위에 사진 처럼 나는 1트에 IM2라는 성적을 받았다. 보통 사람들이 IH를 목표하고 OPIc을 응시하기 때문에 그렇게 높은 점수는 아니지만, 그래도 공기업이나 대기업에 입사 지원하기 위한 최소 성적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당연하게도 IL 보다 한참 높은 점수이기 때문에 한번에 대학교 졸업 요건을 통과 했다는 점에서 상당히 기뻤으며, 조금은 허무했다. 내가 TOEIC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OPIc으로는 1트만에 통과해버린 것에 대한 한탄 같은 느낌이었다. 딱 이정도 느낌이었다. 연말에 1주일 공부하고 만든 점수이기에 작은 언덕을 넘는 느낌이었다.
기억에 남는 점은 OPIc 시험이 오후 였던지라... 꽤나 밖에서 오랫동안 대기 후에 시험장에 가서 시험을 봤다. 그러기에 하루종일 공군 약정복을 입고 카페에 앉아서 중얼거리며 오픽 연습을 할 수 있었던 색다른 경험이었다. 사람들이 지나갈때마다 나를 한번씩 둘러보고 감과 동시에, 내가 계속 중얼거리고 있으니까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사람들의 모습들이 기억이 난다. 12월 말의 대전은 추웠고 약정복을 입고 돌아다니기에는 상당히 힘든 하루였다.

2025년은 1년 내내 군 생활을 했기 때문에 가장 단조롭고 수동적인 한해였다. 군 생활 중에서도 자기개발과 여행을 통해 조금이나마 인생에 이벤트를 만들어보려 했지만, 나 또한 군생활로 인하여 머리가 굳어버렸는지 모든 것이 쉽지 않았다. 생활관에서는 강의를 듣고 근무지에서는 책을 읽고 문제를 푸는 삶을 1년 내내 정말 꾸준히 반복한 것 같다. 교대 근무 덕분에 물리적인 시간은 많았지만 불면증과 불면증에 시달렸기 때문에 이 물리적인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지는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2025년에 목표했던 목표 중에 겨우 6-70% 정도만 달성한 것 같지만, 인생은 언제나 100%를 달성하게 해주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부족하게 때로는 초과하게 달성하게 만들기 때문에, 올해를 거름으로 삼아 내년이든 내후년이든 120%의 인생을 살고 싶다.

사회와의 연결이 단절된 군대에서 많은 좌절과 실패를 맛보면서 수천, 수만번 고뇌하고 번민했다. 슬럼프를 인정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으며, 그 슬럼프를 벗어나기 위해 아직도 몸부림 치고 있다. 이러한 고통과 절망의 원인을 나에게 돌리고 더 열심히 노력하고 살아가는게 익숙한 나였지만, 단절은 원인을 환경으로 돌리게 만들었고 여전히 환경탓이라는 자기합리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원인이 무엇일까 생각하면 아직도 난 모른다. 나는 그저 이 환경의 제약이 곧 끝난다는 것만 알고 있고, 제약이 끝난 후 과거는 깔끔하게 잊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만을 알 뿐이다.
2026년은 중요한 일들이 많이 존재 한다. 21개월을 이어온 군생활의 끝인 전역부터, 4년간의 대학생활을 끝마치는 졸업, 그리고 졸업 이후에 일인 진학까지 많은 일들이 남아 있다. 물론 나에게 2026년의 목표는 현재 확고하게 존재하고 있고, 지금도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매일 설계하고 실행하고 있다. 하지만 미래는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고 결과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다만 내가 간절히 바라고 노력하고 행동한다면 무엇이든 이루고 달성할 수 있다는 믿음 하에 오늘도 공부할 뿐이다. 난 2026년을 120%의 인생으로 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