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새로운 수를 놓기 전에는 이미 놓여진 수를 읽어야만 한다.
대학에서 전기공학과 컴퓨터공학을 전공했던 나는 졸업 즈음에 선택을 해야했다.
'어떤 분야로 발을 들일 것인가', 어떻게 보면 앞으로의 미래가 정해지는 결정이었다.
그 때의 나는 꿈보다 안정을 택했다. 빠르게 취업하고, 안정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전기분야 공기업에 지원했고 한전에 들어가게 되었다.입사 후, 첫 부서배치를 받으며 나는 내가 "미생"의 장백기처럼 일할 수 있을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장그래 수준도 되지 못하다는 것을 점점 깨닫게 되었다.
모든 것이 어색했고, 그래서 실수가 잦았으며, 그런 내 모습에 스스로 실망하고 좌절했었다.
그 때의 나는 모든 것을 내 잘못으로 여겼고, '죄송합니다' 와 '감사합니다'를 입에 습관처럼 달고 살았다.
그렇게 매일매일을 몸도 마음도 지친 상태로 보내게 되었다.그러나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준다는 말이 있듯, 시간이 지나고 적응을 하면서 결국 나도 1인분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문제를 마주하기 시작하는데...
- 때로 우리는 남의 바둑판 위에 수를 놓기도 한다.
일은 어찌저찌 할 수 있었지만, 이 분야에서 평생 공부하며 살아야한다는 생각을 할 때, 막막한 감정이 들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생각해보게 되었고, 내가 어떤 분야의 공부를 좋아했는지 되돌아보았다.
개발이었다. 나의 세상을 자유롭게 그릴 수 있던 분야가 개발이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이 창조적인 영역에서 느꼈던 즐거움이 다시금 기억났다.
내가 좋아하는 분야, 내가 일하고 싶은 분야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후부터 내가 잘못된 판에 수를 놓고 있음을 깨달았다.
내가 돌을 놓아야하는 판과 실제로 돌을 두고 있는 판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난 후부터는 괴리감이 더 크게 다가왔다.이런 괴리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해야했다.
삶을 하나의 대국으로 비유할 때, 기존의 수와 전혀 상관 없는 곳부터 새로 시작해야 비로소 내게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래서 더 철저하게 검증해야했고, 자신과 주변의 눈으로 옳은지 살펴보아야 했다.
개발이라는 것이 정말 맞는지 몇 달간 개발을 해보며 재검증하고, 나의 선택이 가족과 주변사람들에게 설득력이 있는지 검증을 받았다.
그리고 새로운 돌을 놓았다...
- 새로운 수를 놓는 과정은 두렵지만, 그 역시도 대국을 완성해가는 과정이 아닐까
새로운 수를 놓는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진 후, 어디에 수를 둘지에 대해서 고민했다.
수를 새롭게 놓아도 된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둬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더욱이, 나이와 같은 주어진 상황을 고려할 때, 새로운 수는 더욱 신중해야했다.
이직을 하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퇴사를 하고 공부를 하는 것이 좋을까, 많은 선택지를 가지고 고민했다.
그리고 마침내 내린 결정은, '한 분야에서 새롭게 시작한다면 제대로 시작해야겠다. 제대로 배우고 시작하고 싶다.' 였다.그런 와중에 발견한 우아한테크코스. 그것은 내게 있어 하나의 목표가 되었고,
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점심시간엔 차에서, 저녁엔 카페와 집에서 프리코스 과제를 풀어나갔다.
5주간의 프리코스와 최종 코테를 마친 후, 노력에 대한 선물을 받듯 합격 이메일을 받게 되었다.
나는 잠깐이나마 정들었던 회사와 동료 선후배분들께 인사를 드리고, 새로운 출발, 나의 바둑판에서 새로운 대국을 서막을 열었다.
- 우리는 아직 모두 미생이다. 완생으로 한걸음 나아갈 뿐이다.
새로운 포부와 달리 나의 바둑판에서의 착수는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모두 이미 자신의 판을 어느정도 그려간 사람들이었고, 이미 놓여진 수를 내가 따라 잡는 것이란 쉽지 않았다.
새로운 바둑판에서 새로운 수를 두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나 자신을 조금 객관화된 눈으로 바라볼 때, 다시 장그래로 돌아온 것 같다.
다시 모든 것이 어색하고, 모든 것이 낯선 공간에 오게 되었다.
낯섦은 때때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익숙하지 않은 공기, 익숙하지 않은 소리, 익숙하지 않은 온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낯섦 속에서 여전히 조금은 두렵고, 조금은 위축되기도 한다.
하지만 두려우면 어떻고, 낯설면 또 어떤가.
이전의 두려움과 낯섦을 시간이 해결해줬듯, 이번에도 주어진 시간 속에서 꾸준히 걸어나간다면 결국 언젠가 완생에 가까워지지 않을까내게 주어진 길을, 그리고 지금에는 꽤나 즐거운 대국을, 계속 이어나갈 뿐이다.
"내가 좋아하는 판 위에서 수를 놓으며 대국을 이어나가는 일은 꽤나 즐거운 일이 아닌가" - 윤성현(악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