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Seonkyu Kim·2020년 4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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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학창 시절 인상 깊게 읽은 세 권의 책이 있다.

이문열 작가님의 『젊은 날의 초상』,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그리고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다.

이 책을 처음 읽은 지 5년이 지난 지금, 우연히 다시 생각나서 책을 읽게 되었다.

5년 전에도 마찬가지였지만, 지금도 내공이 부족한 탓에 이 책의 감상문을 제대로 작성할 자신이 없다.

그렇기에 인상 깊은 문장을 적는 것으로나마 감상문을 대체하고자 한다.

1부. 가벼움과 무거움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

뒤집어 생각해 보면 영원한 회귀가 주장하는 바는, 인생이란 한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한낱 그림자 같은 것이고, 그래서 산다는 것에는 아무런 무게도 없고 우리는 처음부터 죽은 것과 다름없어서, 삶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름답고 혹은 찬란하다 할지라도 그 잔혹함과 아름다움과 찬람함조차도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
그래서 영원한 회귀라는 사상은, 세상사를 우리가 아는 그대로 보지 않게 해 주는 시점을 일컫는 것이라고 해 두자. 다시 말해 세상사는, 세상사가 덧없는 것이라는 정상참작을 배제한 상태에서 우리에게 나타난다. 사실 이 정상참작 때문에 우리는 어떤 심판도 내릴 수 없다. 곧 사라지고 말 덧없는 것을 비난할 수 있을까? 석양으로 오렌지 빛을 띤 구름은 모든 것을 향수의 매력으로 빛나게 한다. 단두대조차도.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9-10

첫 번째 리허설

테레자와 함께 사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혼자 사는 것이 나을까?
도무지 비교할 길이 없으니 어느 쪽 결정이 좋은지 확인할 길도 없다. 모든 것이 일순간, 난생 처음으로, 준비도 없이 닥친 것이다. 마치 한 번도 리허설을 하지 않고 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그런데 인생의 첫 번째 리허설이 인생 그 자체라면 인생에는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렇기에 삶은 항상 밑그림 같은 것이다. 그런데 '밑그림'이라는 용어도 정확하지 않은 것이, 밑그림은 항상 무엇인가에 대한 초안, 한 작품의 준비 작업인데 비해, 우리 인생이라는 밑그림은 완성작 없는 초안, 무용한 밑그림이다.
토마시는 독일 속담을 되뇌었다. einmal ist keinmal. 한 번은 중요치 않다.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한 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17

Es muss sein (그래야만 한다)

물리 실험 시간에 중학생은 과학적 과정의 정확성을 확인하기 위해 실험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오직 한 번밖에 살지 못하므로 체험으로 가정을 확인해 볼 길이 없고, 따라서 자기 감정에 따르는 것이 옳은 것인지 틀린 것인지 알 길이 없는 것이다.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61

토마시는 그의 친구Z에 대해 테레자가 한 말을 떠올리고 그들의 사랑의 역사는 'Es muss sein!' 이라기보다는 'Es konnte auch anders sein.(얼마든지 달라질 수도 있었는데...)'에 근거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64

2부. 영혼과 육체

우연

인간의 삶은 마치 악보처럼 구성된다. 미적 감각에 의해 인도된 인간은 우연한 사건(베토벤의 음악, 역에서의 죽음)을 인생의 악보에 각인될 하나의 테마로 변형한다.
...
역과 죽음의 테마, 사랑의 탄생과 결부되어 잊을 수 없는 이 테마가 그 음울한 아름다움으로 절망의 순간에 그녀를 사로잡았던 것이다. 인간은 가장 깊은 절망의 순간에서조차 무심결에 아름다움의 법칙에 따라 자신의 삶을 작곡한다.
따라서 소설이 신비로운 우연의 만남에 (예컨대 브론스키, 안나, 플랫폼, 죽음의 만남이나 혹은 베토벤, 토마시, 테레자, 코냑 잔의 만남 같은 것) 매료된다고 해서 비난할 수 없는 반면, 인간이 이러한 우연을 보지 못하고 그의 삶에서 미적 차원을 배제한다면 비난받아 마땅하다.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92-93

앞, 뒤

그녀는 말을 멈추더니 다시 덧붙였다. "앞은 파악할 수 있는 거짓이고, 뒤는 이해할 수 없는 진리였지."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114

3부. 이해받지 못한 말들

삶의 악보

젊은 시절 삶의 악보는 첫 소절에 불과해서 사람들은 그것을 함께 작곡하고 모티프를 교환할 수도 있지만 (토마시와 사비나가 중산모자의 모티프를 서로 나눠 가졌듯) 보다 원숙한 나이에 만난 사람들의 악보는 어느 정도 완성되어서 하나하나의 단어나 물건은 각자의 악보에서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기 마련이다.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152

추구하는 목표

물론 지금까지 그녀에게 이런 의식은 없었고, 그것도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는 항상 베일에 가린 법이다. 결혼을 원하는 처녀는 자기도 전혀 모르는 것을 갈망하는 것이다. 명예를 추구하는 청년은 명예가 무엇인지 결코 모른다. 우리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항상 철저한 미지의 그 무엇이다. 사비나 역시 배신의 욕망 뒤에 숨어 있는 목표가 무엇인지 모른다.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이것이 목표일까? 제네바를 떠나온 이래 그녀는 이 목표에 부쩍 가까워졌다.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202

4부. 영혼과 육체

대답 없는 질문

이런 질문들은 어렸을 때부터 언제나 테레자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왜냐하면 진정 심각한 질문들이란 어린아이까지도 제기할 수 있는 것들뿐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가장 유치한 질문만이 진정 심각한 질문이다. 그것은 대답 없는 질문이다. 대답 없는 질문이란 그 너머로 더 이상 길이 없는 하나의 바리케이드다. 달리 말해 보자. 대답 없는 질문들이란 바로, 인간 가능성의 한계를 표시하고 우리 존재에 경계선을 긋는 행위다.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226

5부. 가벼움과 무거움

권자에 앉은 바보

그는 근본적인 문제는 그들이 알았는지 몰랐는지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문제는 몰랐다고 해서 그들이 과연 결백한가에 있다. 권자에 앉은 바보가, 단지 그가 바보라는 사실 하나로 모든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전이

이렇듯 베토벤은 희극적 영감을 진지한 4중주로, 농담을 형이상학적 진리로 환골탈태시킨 것이다. 이것은 가벼운 것에서 무거운 것으로의 전이(파르메니데스에 따르자면 긍정적인 것이 부정적으로 변화한 것)라는 흥미로운 예다. 이상한 노릇은 이 환골탈태가 우리를 놀라게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역으로 베토벤이 4중주의 진지함으로부터 뎀브셔의 지갑에 대한 4중창에서 보여 준 가벼운 농담으로 변했다면 우리는 분개했을 것이다.
...
그의 가슴속에는 파르메니데스의 정신에 따라 무거운 것을 가벼운 것으로 바꾸고 싶다는 깊은 욕망이 있었다.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317

사랑

사랑은 은유로 시작된다. 달리 말하자면, 한 여자가 언어를 통해 우리의 시적 기억에 아로새겨지는 순간, 사랑은 시작되는 것이다.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337

소설

내 소설의 인물들은 실현되지 않은 나 자신의 가능성들이다.
...
소설은 작가의 고백이 아니라 함정으로 변한 이 세계에서 인간 삶을 찾아 탐사하는 것이다.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356

한 번뿐

인간의 삶이란 오직 한 번뿐이며,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딱 한 번만 결정을 내릴 수 있기 때문에 과연 어떤 것이 좋은 결정이고 어떤 것이 나쁜 결정인지 결코 확인할 수 없을 것이다. 여러 가지 결정을 비교할 수 있도록 두 번째, 세 번째, 혹은 네 번째 인생이 우리에게 주어지진 않는다.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357

6부. 대장정

7부. 카레닌의 미소

관계

우리와 타인의 관계가 어디까지 우리 감정, 우리 사랑이나 비-사랑, 우리 호의 혹은 증오의 결과인지 또는 어디까지가 개인 간 역학 관계에 의해 사전에 규정되었는지 정확하게 가늠할 수 없을 것이다.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470

행복, 슬픔

그들은 피아노와 바이올린 소리에 맞춰 스텝을 밟으며 오고 갔다. 테레자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안개 속을 헤치고 두 사람을 싣고 갔던 비행기 속에서처럼 그녀는 지금 그때와 똑같은 이상한 행복, 이상한 슬픔을 느꼈다. 이 슬픔은 우리가 종착역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행복은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은 내용이었다.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웠다.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506

마무리하며

사랑을 하지 않는 한 누군가에게 완전히 빠져들어 감정적으로 하나가 되는 경험을 하기 쉽지 않다. 그런데 소설은 그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항상 새로운 생각을 하며 보게 되는 책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5년 후에는 어떻게 내게 다가올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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