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차야 은퇴만 안하면 매년 늘어나는거지만, 개발자로서 첫 한해를 보냈다는 사실은 좀 더 특별한 것 같다. 사실 2년차 개발자라는 타이틀을 달기 싫었다. 이제 신입 방패도 쓸 수 없고 책임과 기대도 더 많아질 것 같아서였다. 그렇지만 생각보다 뭐가 달라지진 않았다. 오늘 힘든 일은 어제도 힘든 일이었고 오늘 즐거운 일은 어제도 즐거운 일이었다. 역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말하는 타이틀보다는, 하루 하루를 어떻게 보내는지가 중요한 것 같다. 아무튼 특별한 한 해를 보낸 만큼 지난 한해 동안 어떤 성장을 이루고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 되돌아보려고 한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아도, 환경에 대한 불만이 없어도, 잘하고 싶은 마음이 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전에는 뭔가 더 잘하고 싶어 발을 동동 구르는 이유가 남보다 못난 사람이 되기 싫어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런 이유 없이도 잘하고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 마음에 대해 굳이 이유를 붙이거나 깊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은 꽤나 큰 해방감을 주었다. 남과 비교하지 않고 수치적 목표를 세우지 않으니 불안감이 사라졌다. 단지 어제보다 오늘 더 나아진 걸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나이를 먹을 수록 나 자신에 대해 더 잘 알게 되는 것 같다. 어떤 때는 장점을 많이 알게 되기도 하는데, 지난 한해는 단점을 더 많이 알게 된 것 같다. 어떤 단점은 고쳤지만 어떤 단점은 정말 쉽사리 고쳐지지가 않는다. 성장을 회고하면서 단점에 대해 이야기하는게 좀 슬프기도 하지만, 굿 캐치!라고 해주고 싶다. 모르는 것보단 아는게 낫고, 알았으니 점점 더 나아지지 않을까?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자. 😄
취업 전 공부한 기간까지 포함해서 1년 넘게 프론트엔드만 하다가 갑작스럽게 (하지만 내가 원한) 백엔드로 직무를 전환하게 되었다. 어려운게 너무 많고 모르는 것 투성이라 아직까지 허우적 대긴 하지만 굉장히 잘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직무를 전환한 큰 이유중 하나가 나의 적성을 제대로 파악하고 진로를 결정하고 싶어서였는데, 결론적으로는 쭉 백엔드 개발자로 커리어를 쌓아나가기로 결정했다. 오랜 기간 개발을 한 개발 구루들의 조언을 이리저리 생각해보고 유연한 객체지향 구조를 만들어 나가는게 재밌다.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더 성장해서 컨퍼런스 발표도 해보고 싶다.
'코딩 공부'만 하다가 개발자가 되어 실전을 겪으니 허약한 고시생이 링위에서 쥐어터지는 기분이 들었다. 코드를 쓰는 일은 아주 일부분이라고 느껴질 만큼 정말 많은 일을 처리해야 했다. 나의 결정에 대해 동료에게 설명해야하고, 흐릿한 요구 사항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다른 부서와 커뮤니케이션을 해야하고, 일의 우선 순위를 잘 세워야 하기도 했다. 또 코드가 실제로 운영되고 진화하는 것을 보니 개발에 대한 좋은 원칙들이 왜 지켜져야 하는지 훨씬 더 와닿게 되었다. 어려운 일을 많이 겪은 만큼 정말 많은 것들을 배웠다.
여러가지 크고 작은 위기들을 겪었지만 가장 큰 위기는 발목 수술을 했던 것이다. 한달 넘게 목발을 짚고 다니느라 출퇴근이 매우 어려웠었다. 계속 재택 근무를 하니 일과 휴식의 경계가 희미해져, 더 힘든 기분이 들어 재택도 오래하지 못했다. 운동으로 스트레스 해소를 못하니 마음까지 점점 더 심약해져가는게 느껴졌다. 아직 달리기를 못하기 때문에 이 위기는 현재진행중이다. 물론 이로 인해 배운 것도 많다. 장애인들이 생활하기 얼마나 불편한지 깊이 헤아릴 수 있게 되었고, 다양성을 좀 더 포용하는 해외로 가고 싶다는 결심을 굳힐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치만 이런 일을 다시 겪고 싶지는 않다... 역시나 뭐니뭐니해도 건강이 최고다.
'나를 안다'는 게 무슨 철학자들만 하는 고민인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내가 몰랐던 내 모습이 이렇게나 많았다니..
직무 전환은 큰 결심이었을텐데, 잘 되길 바랍니다. 탁월함은 반복되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