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우치다 다쓰루
지적 흥분을 부르는 천진한 어른의 공부 이야기
제목에 매료되고 일본인에 믿음이 가서 홀린듯이 골랐던 책. 제목뿐만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정말 훌륭한 책으로 현대를 살아가면서 어떤 마음가짐으로 나와 세상을 대해야 하는지 길잡이를 해주는 책이다.
궁금한 게 있으면 뭐든지 생각나는 대로 물어보면 되지 않습니까? 대답을 얻었다고 해서 그 대답에 붙들릴 필요도 없고요. 대답을 듣고도 이 대답은 왠지 틀린 것 같다 싶으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 됩니다. 반대로 '아 그렇구나, 그런 생각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 자신의 뇌 데스크탑 어딘가에 저장해 두면 되고요. 그러다 보면 언젠가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역으로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을 겁니다. 도움이 될지 안될지는 시간이 지나지 않으면 모르는 겁니다.
동이사이에서는 (한국뿐 아니라 중국, 일본에서도) 전통적으로 '자기 나름의 배움의 길'이라는 것을 찾지 않았습니다. 논어에서는 술이부작, 즉 나는 새로 짓지 않고 전달할 뿐이라는 말이 있지요. 공자는 자신이 설파한 것은 자신의 독창적인 사상이 아니라 모두 선현의 가르침을 '조술'한 것에 불과하다고 거듭 이야기했습니다. 참으로 역설적인 말인데요. 이는 공자가 '조술자'라는 위치에 몸과 마음을 두는 것이 창조적으로 사고하는 데 굉장히 유효하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공자는 독창적인 사상가였지만 그가 그만큼 자유자재로 독창적일 수 있었던 것은 한걸음 뒤로 물러나 '나는 조술자에 불과하다'는 위치를 택했기 때문입니다.
좀 어려운 논리일지도 모르지만 '조술자' 혹은 '제자'라는 위치의 이점은 자신이 잘 이해하지 못한 것에 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과학의 객관성을 담보하는 것은 그것이 공공의 장에 나와서 자유로운 검토 과정을 거치는 것입니다. 과학은 어떤 과학자가 제시한 가설이 반증 사례로 뒤엎어지고 그 반증 사례까지 설명할 수 있는 보다 포괄적인 가설이 제시되는 과정을 거쳐 진보합니다. 모든 과학적 가설은 '반증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지요.
반증 가능하다는 말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면 '비교적 구멍투성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자연과학이 상대하는 것은 자연입니다. 자연은 다 퍼올릴 수가 없습니다.
제자와 조술자가 상대하는 것은 '스승'입니다. 스승 또한 다 퍼올리지 못할 지적 경지입니다. 그러므로 제자와 조술자가 스승의 학지에 관해 한 말들은 모두 '구멍투성이'입니다. 모든 말이 반증 가능합니다. 이 '개방성'으로 인해 제자와 조술자는 '과학자'일 수 있습니다.
지금 한국 사회 젊은이들 사이에는 이런 '독창성에 대한 집착'이 퍼져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오리지널리티', 즉 자기 나름의 길이건 독창성이건 없어도 좋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리지널리티란 시간이 충분히 지나고 "그 사람 정말 독창적이었어"라는 말을 들을 때쯤에 비로소 있었는지 없었는지 알 수 있게 되는 것이지, 사전에 어깨에 힘을 팍 주고 "자 세상으로부터 '독창적인 사람'이라고 말을 듣도록 이것저것 해 봐야지" 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니까요
⚓ 저자가 하는 말처럼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나봐야 좋았는 지 나빴는 지 나에게 맞았는 지 맞지 않았는 지 알 수 있다. 즉, 일정한 방향으로 되도록이면 긴 시간을 가지고 변화를 일으켜 보자. 그 변화가 좋을 지 나쁠 지는 시간이 지나야 알 수 있고, 비로소 그렇게 알아감으로 인해 조금이나마 나아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무엇이든 창조자가 될 수 있다.
제가 레비나스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프랑스어 독해 능력과 철학(사)적 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미숙했기 때문이란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현대철학의 조감도'를 한 손에 들고 건너뛰는 읽기를 막무가내로 하고 '앎의 자산 목록'을 늘이는 독서를 하는 한 절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하는 인상을 받았지요.
이 경험을 하고 나 뒤로 책 읽는 방법이 바뀌었습니다. 어렸을 때는 '난독', 즉 손에 잡히는 대로 이것저것 마구 읽었습니다. 고등학생 때부터는 지도를 만들어 지도 속의 빈칸을 메우는 방식으로 '체계적 독서'를 했지요. 대학원에서 레비나스 선생님을 만나고 나서부터는 그때까지와는 전혀 다른 독서를 하게 되었습니다. 완전히 무방비 상태로 읽기. 저자를 가상의 멘토로 삼고 읽어 나가기. 내가 이해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모르는 것, 나의 생각과는 다른 것을 마크하면서 읽기. 그리고 '왜, 어떤 근거로, 어떤 추론을 거쳐 저자가 이런 식견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물으면서 읽게 되었습니다. 이런 '무방비innocent 독서'를 지금까지 40년 정도 즐겁게 이어오고 있습니다.
⚓ 저자의 독서관을 보면서 머리가 띵해졌다. 지금까지 책을 읽으면서 약간 나와 생각하는 바가 비슷하다. 나도 저자와 같은 맥락의 생각을 했고, 이 저자가 그 생각을 이렇게 글로 표현하는 구나 하면서 감탄하면서 읽기. 그리고 그 생각을 메모하고 곱씹어보는 독서를 해왔었다. 하지만 저자처럼 나의 생각과 다른 것을 마크하는 정반대의 관점에서 책을 읽어보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깨달았다. 그것이 나의 세계관을 조금 더 확장시켜줄 수 있으리라고 그게 더 효과적인 독서의 방법인 것 같아 기억해둔다.
'콘텐츠가 넘치는 지금 같은 세상에서 어떤 방식으로 지식과 문화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관심사와 공부거리를 찾아야 할까요?'라고 질문했었지요? 그게 책이든 인터넷 속 정보든, 지식을 마주하는 자세는 위의 세 단계를 거칠 것이라 생각합니다.
독서에는 세 단계가 있지요. 난독 체계적 독서 자신을 내려놓는 독서, 즉 무방비 독서. 무방비 독서는 난독과 비슷한 면이 있지만 체계적 독서 단계를 거치고 나면 읽을 가치 있는 책과 읽을 가치 없는 책을 구별할 만큼의 안목이 생깁니다. 그 덕에 난독이 되지는 않습니다.
⚓ 저자는 콘텐츠가 넘치는 시대에 살기 때문에 더욱 더 난독과 체계적인 독서 단계를 거쳐서 자신에게 중요한 콘텐츠를 알아 볼 수 있는 안목을 기르는 것이 매우 중요함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래야만 수 많은 콘텐츠에 현혹되지 않고 자신이 중요히 여기는 가치를 지키면서 자신의 세상을 무방비 독서를 통해 확장시킬 수 있다.
질문이 어떻게 인풋하는가였는데, 저는 특별히 인풋하지 않습니다. 그냥 살아가는 것뿐이라는 말씀밖에는 드릴 수가 없겠네요. 그런데 살면서 우연히 마주치는 '왠지 잘 삼켜 넘길 수 없는 것'을 저장하려는 노력을 저는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저 자신이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을 만나면 왠지 두근두근합니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의 목록을 길게 만들 여유가 있으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의 목록도 아이때부터 길게 만들어두라고요.
외국어라는 새로운 세계
물론 회화라는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런데 회화라는건 오로지 '서로를 아는 일'을 가산해 나가는 작업입니다. '모어로 이렇게 말하는 것을 영어로는 이렇게 말한다'라고 동의어쌍의 목록을 주야장천 늘려 나가는 작업입니다. 문제는 이런 식의 학습은 '모어의 감옥'바깥으로 나간다는 외국어 습득의 목적과는 방향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런 학습 방식의 목표는 '모어의 적용 범위를 가능한 한 멀리까지 확대해 나가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지적 흥분과 지성의 작동
개성있는 저의 관점이 멀까요? 그런 것이 있다면 그건 제가 집단의 퍼포먼스를 향상시키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늘 고민한다는 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지성'이란 집단적으로 발현하는 것인라고 봅니다. 집단 안에서 활발한 대화가 오가고 이론이 난무하고 계속해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는 것이 '지성의 작동'이고, 이런 일은 개인 혼자서는 좀처럼 달성할 수 없습니다.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어려운 일임은 분명하지요.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지성인이냐 아니냐는 '그 사람 덕분에 주변 사람의 지성이 활성화되고, 그 덕에 새로운 지점에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계속 나오는 상태'가 생기는지 아닌지로 평가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 한 사람이 가진 지식과 정보량이 얼마나 많고, 얼마나 두뇌 회전이 빠른지가 기준이 아니라는 거죠. 집단의 지적 퍼포먼스를 향상해 나가는 사람이 지성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